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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숙라를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친구를 따라 그 집에 들어섰을 때의 고즈넉하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첫 눈에 봐도 단아하고 똑똑해 보이는 그 친구의 집은 한옥이었는데 첫 대문을 들어서자 한 쪽 켠에 백합이 가득 피어 향이 너무도 강렬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 째 대문을 들어서자 마당이 나왔고 대청마루 양 쪽에 방이 붙어 있었고 사랑채가 작게 따로 있었습니다. 여름이었는데 대청마루의 작은 뒷문이 열려 있어 바람이 시원했습니다.

 

우리는 대청마루를 통해 숙라의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방 역시 숙라만큼이나 단정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여러권의 책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윤동주 시인의 시집이 눈에 띄었습니다. 숙라는 내가 사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속하는 그러니까 엄마가 늘 말하던 몰락하기 전 엄마가 살았다던 집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인데도 숙라의 엄마는 작은 소반에 고구마와 물김치 그리고 젓가락과 숟가락을 단정하게 차려내어 주었습니다. 나는 부러웠습니다 엄마는 당시 허리를 다치면서 일을 못하게 되자 우울증까지 앓고 있어서 집 정리 같은 걸 할 생각도 없이 지냈기 때문에 우리 방 벽에는 엄마의 겨울옷이 그대로 걸려 있는 게 갑자기 생각 났습니다. 난 우리 엄마도 청소를 깨끗이 하고 친구들이 오면 이렇게 어른처럼 음식을 차려내 대접을 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나는 숙라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숙라에게는 이미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고 전교 회장이었던 그 아이 곁에는 언제나 많은 친구가 따랐습니다. 그것이 내 가슴을 허전하게 했습니다. 하루는 내가 숙라에게 '회색노트'처럼 우리도 일기를 교환해서 써보자고 했더니 그러자고 했습니다. 나는 당시 '회색노트'라는 책을 읽고 무척 감명을 받은 상태였고 흉내를 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숙라가 내 일기장에 적었던 일기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렇게 조용하고 정숙한 밤은 내겐 못견디게 답답하고 어설프기만 해.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아 한 케치같이 구겨진 오늘을 응시하는데 동터오는 새벽은 멀다해도 이젠 별도 나의 벗이 될 수는 없지 않느냐? 봄이 와도 푸른 물오를 나무 한그루 없는 허허벌판이듯이...

 

끝없는 지평선에는 구겨진 내일로 모레로 계속되는 나날이 얼마나 좁고 밤의 처소가 성가시냐! 한오리 빛과 같이 노래와 같이 겨운 보람이 일어나야 할텐데. 나는아직 보람속의 열쇠를 못찾고 달팽이마냥 껍질을 뒤집어 쓴 것에 싫증을 느끼지 않느냐?

 

학현이의 일기장. 왠지 가슴이 허전하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나와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나와. 나자신이 생각하고 또 현재에 존재하는 하고 있는 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죄책감이랄까 여튼 이상스런 기분이다. 좀더 사랑스런 소녀가 되고 싶다. 모든 것을 사랑할수 있고 모든 것을 긍정 할 수 있는 나를 키우고 싶다. 학현이는 왠지 깨끗하고 티 없는 백조를 연상케 한다. 그녀와 대화를 하노라면 가슴이 탁 터지는 그런 느낌이다. 헌데 난 자꾸만 그녀를 멀리하려는 것 같다. 왤까? 왤까? 아마도 나자신을 너무나 멸시하기 때문인 것 같다. 위선자! 위선자! 매일 입으론 진정한 휴머니스트가 되고 싶다느니 착하게 살고 싶다느니 지껄이지만. 보라 무엇하나 제대로 해 낸 것이 있는가? 위선에 둘러 쌓여 있는 내가 싫은 거다. 솔직하지 못한 나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럽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학현이는 박선생님을 이성적인 면에서 그러니까 존경보다는 조금 위인 것. 즉 사랑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나 역지 마찬가지 이지만...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나쁘다고 보진 않는다. 감정이란 것에 옳고 그른 것을 따진다는 자체 부터가 우스운 일이지만 학현이가 박선생님 이야기를 할 때 마다 왠지 가슴이 텅빈듯한 그런 것을 느낀다. 그건 질투도 아니요 시기도 아니요 패배감은 더욱 아니다. 한 사람을 두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 어쩌면 너무도 불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난 여태것 나만이 그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너무 이기적이었던 거 같다.

 

학현이가 그 선생님을 무척이나 좋아한단다. 난 이제 선생님 이야기를 않겠다. 학현이와 선생님이 더욱더 친해지기를 빌며...'

 

일기장에 쓰인 숙라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조숙하고 성숙한 친구로 여겨졌습니다. 숙라의 일기장에 나오는 박선생님은 여자 체육선생님이었는데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얀 유니폼을 입고는 지휘봉을 들고 운동장 교단에 서 있었고, 대규모 마스게임 같은 것도 기획해서 운동회 때 발표를 한 적도 있는 요즘 말로 하면 카리스마가 잘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숙라가 일기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는 그 선생님을 존경보다 조금 더 위인 사랑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성에게 느끼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 좋은 감정과 동경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내가 좋아하는 시 같은 것을 적어 선생님의 집 대문 밑으로 밀어 넣고 학교로 가고는 했습니다. 나는 누구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으로 타고 났나 봅니다. 가끔 숙라와 연락을 하고 있고 나는 아직도 그녀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아닌 추억 속의 친구로 존재한다는 것이 지금도 허전합니다.

덧붙이는 글 |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태그:#숙라의 일기, #연재동화, #최초의 거짓말, #학현이, #장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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