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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군기지 건설 문제가 나올 때마다 호주의 시드니항, 미국의 샌디에이고항이 거론된다. 주로 해군기지 찬성 측에서 주장하는데, 세계적인 미항에도 해군항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주 해군기지를 건설하면 시드니나 샌디에이고 같은 아름다운 항구가 될 것인데 왜 반대하느냐는 이야기다.

 

지난 6월 23일 국회 공청회에서 한 찬성 측 토론자도 "시드니, 싱가포르, 나폴리 등 항구 이름에서 '미항'을 떠올리지 '전쟁기지' 따위의 단어들을 연상하지는 않는다"며 "제주 해군기지는 미항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주 해군기지가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제주 해군기지에 '관광미항'이라는 수식이 따라붙은 것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다. 지난 2008년 9월 11일 당시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제주 해군기지의 공식 명칭을 '민∙군복합형관광미항(제주해군기지)'으로 확정한 것이다. 제주 해군기지를 '복합형관광미항'으로 개발하기로 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다.

 

지금 추진하고 있는 제주 해군기지를 과연 '관광미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민·군복합형관광미항'을 위해 계획 중인 예산은 530억 원에 불과하다. 터미널 1개와 진입도로 1식, 토지보상 등이 전부다. 사실상 터미널 하나 짓는 셈이다. 이것이 관광미항 실체의 전부다.

 

여기에다 이를 위해 지난 2008년 국토해양부 예산으로 반영된 15억 원의 설계용역비도 현재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용역예산도 사실은 지난 2008년 말, 2009년도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해군기지 관련 예산 삭감 주장에 대응해 즉흥적으로 국토부 예산으로 반영된 성격이 짙다. 결국,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은 사실상 제주해군기지의 실체를 감추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나아가 미항 수준은 아니더라도 민과 군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복합항이라는 개념 또한 불분명하다. 게다가 복합항도 아니고 '복합형'이다. 해군이 밝힌 대로 군항을 만들어놓고 크루즈 선박이 공동으로 이용하도록 하겠다는 발상이다. 최근 우근민 제주도지사는 서귀포 동지역 간담회에서 "해군기지가 건설되면 매일 크루즈 선박이 한 대씩 들어온다"고 발언했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이미 강정마을에서 불과 7~8km 떨어진 제주 화순항은 8만 톤 규모의 크루즈 선박 입항이 이뤄지고 있을 정도로 크루즈 접안시설을 갖춰놓고 있다. 최근 개발된 제주시 외항도 크루즈 선박을 위한 선석이 마련됐다. 어떤 크루즈 선박이 군항인 이곳에 군의 통제를 받아가며 들어오려 할까? 그것도 매일 한 대씩 말이다. 그만큼의 수요는 있을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지난 2008년, 크루즈항 건설의 경제적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한 용역이 실시된 적이 있다. 결론은 당연히 '돈이 된다'였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강정마을 인근에 크루즈 입항 시설 존재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작성한 당시 보고서대로라면, 오히려 크루즈 선박 기항이 늘어날 수록 적자폭만 더 커지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애초 경제성이 없는 사업의 경제적 타당성을 도출하기 위해 비재무적 요소까지 편익요소에 억지로 반영시키는 등 데이터상의 짜맞추기를 하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해군은 물론 용역을 시행한 도당국은 해명 한 마디 없었다.

 

더 큰 문제는, 크루즈 선박 기항시설이 기본적으로 민간용이라면 국토해양부의 몫이 되어야 하는데, 국토해양부는 이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지난 2008년 국회에서 만난 한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군 기지를 만드는데 왜 국토해양부가 예산을 지출해야 하느냐"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크루즈 선박 접안을 위한 선석이 해군기지 예산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실상 항공모함 접안용이라는 것이 주된 시각이다.

 

일부 제주도민들이 해군기지 건설을 찬성하는 이유는 대부분 경제적 이유에서이다. 해군기지를 건설하면 경제가 발전할 것이란 기대가 크다. 지난 6월 <제주도민일보>가 도내 각계 전문가 200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6%가 '크루즈항 중심의 민·군복합형 기항지'를 주문했다(기항지는 배가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잠시 들르는 항구를 뜻한다). 해군의 계획대로 이지스함을 포함한 기동전단과 잠수함 전대 등 대규모 군사기지에 찬성하는 응답률은 18%에 불과했다.

 

지난 2008년 1월, 제주KBS가 도민 800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도민의 33%가 '해군기항지+관광미항'을, 35%는 '해군기지+관광미항' 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 해군기지'에 찬성하는 여론은 4.6%에 불과했다.

 

해군, 그냥 정직하게 주민 설득하세요

 

백보 양보해서, 제대로 된 민간크루즈 선석을 갖춘 항구를 건설한다고 치자. 이미 몇 킬로미터 인근에 민간 크루즈항이 마련돼 있는데, 또다시 수천억 원의 예산을 들여 크루즈항을 만든다? 혈세 낭비 논란에 휘말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나아가,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제주도민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수백억 원, 혹은 수천억 원의 예산을 쏟아 붓는 것 자체는 '돈 줘서 안보를 사는 꼴'이다. 해군 측의 주장대로 안보상의 중대한 이유 때문에 해군기지 건설이 필요하다면, 있는 그대로 설득하는 일에 정직하게 나서야 한다.

 

최근 우근민 제주도지사는 정부가 제주 해군기지 건설 대가로 법적 수준의 지원을 약속했다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가가 수천억 원에 이른다 해도, 제주도가 군사기지 건설 탓에 장래에 치러야 할 비용을 생각한다면, 제주도지사 역시 신중해야 한다. 제주해군기지, 지금이라도 허울 좋은 가면을 벗고 민얼굴로 솔직해져야 한다.


태그:#해군기지, #강정마을,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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