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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겨울 금요일 낮시간, 공기는 차갑지만 습기가 적당히 함유된 산뜻한 한기를 느끼게 한다. 여기는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 멜번(*Melbourne은 한국에서 주로 '멜버른'이라고 표기하는데, 이는 'ㄴ' 받침 발음을 못하는 일본식 발음의 잔재이다. 빅토리아주 관광청 한국사무소에서도 '멜번'으로 표기하고 있다) 동남쪽 바닷가에 있는 Mordialloc Beach Primary School(모디알록 해변 초등학교). 돛단배가 둥둥 떠 있는 바닷가가 지척에 있어서, 학교 주변에 차를 세우니 바다 냄새가 난다.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거주 지역이다.

 

지난 24일 모디알록 초등학교에서는 한국어 과목 개설 기념식이 열렸다. 모디알록 초등학교는 프렙(Prep *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는 초등학교에서 한국의 유치원에 해당하는 과정부터 시작한다)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이 132명인 비교적 작은 학교이다. 아이들이 직접 부화시킨 닭을 키우고, 텃밭이 있는 학교 마당을 지나 아담한 강당에 들어서니 여러 한국어 교육 관련자들의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한국어 과목 개설의 최대 후원자인 시드니 한국교육원의 조영운 원장도 이미 자리해 있다.

예상보다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서, 장인선 교사를 비롯한 교직원들이 바쁘게 의자를 움직이는 가운데 색동 저고리를 입은 꼬마 아가씨들과, 파란색 한복을 차려 입은 남자 아이들이 강당에 앉기 시작한다. 

 

행사는 호주국가와 애국가 제창으로 시작했다. 한국어교육원에서 기증한 프로젝터로 애국가가 흘러나왔지만, 이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6개월도 안 된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이 애국가를 알리는 만무하다. 조용한 가운데 장인선 교사의 어머님이 부르는 애국가 소리만 낭랑하게 울려퍼진다.

 

모디알록 초등학교 Gillian Phillips 질리안 필립스 교장의 귀빈 환영사가 끝난 후 먼저 프렙과 1학년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나왔다. 장인선 교사의  "큰 절 하세요~", "일어나세요~~", "들어가세요~~"라는 구령에 맞춰 큰 절을 했다. 제법이다.

 

필립스 교장은 조영운 한국어교육원장을 소개하면서 교육원에서 주최한 호주 교장단 한국방문 연수에 대한 소감을 얘기했다. 이 연수는 호주의 초중등학교 교장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발전상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한국어교육원과 NSW주 교육부가 지난해부터 시작한 프로그램으로 매년 2차례 실시된다. 필립스 교장은 올해 4월, 3기에 참여했다.

 

필립스 교장은 한국 연수가 "가장 기쁘고 흥미로운 문화교류 경험이었다"며, 연수를 통해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려는 열정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3기 연수에는 NSW와 빅토리아주에서 학교장 총 14명이 참석했으며, 빅토리아주에서는 필립스 교장이 유일한 참가자였다.

 

조영운 교육원장은 한국어 홍보 행사가 문화와 언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이번 행사를 통해서 더 많은 학생이 한국 문화와 언어에 관심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두 학기(*오스트레일리아 학교는 고등학교까지 term(텀)제로 돼 있다. 1년이 4학기(term)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학기는 약 10주이다) 동안 배운 한국어 실력을 자랑하는 시간은 한국 노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로 시작했다.

 

부채춤을 선보이기 위해 화려한 한복을 입은 아이들이 무대에 나왔다. 한 아이의 옷고름이 풀어져 있자, 최명숙 멜번한국어학교 교장이 얼른 다시 매준다. 짧은 시간에 꽃모양도 만들다니, 기특하다.

 

한글 자모는 몸을 사용해 표현한다. 먼저 4-5학년 학생들의 장구 연주에 맞춰 6학년 학생들이 하늘, 땅, 사람, 3가지 상징으로 이루어진 모음 형상을 만드는 시범을 보였다. 다음에는 자음이다. 객석에 앉은 2학년 학생들의 소고에 맞춰 3-4학년 학생들이 손으로 한글 자음 모양을 만든다. 'corner ㅋ' ' nose ㄴ' 'groovy Ms Chang ㅈ' 이런 식이다.  (멋쟁이 장선생님은 당연히 한국어 선생님을 가리킨다) 

 

아담한 강당에서 한국어 개설을 축하하는 마지막 순서는 '삼고무' 공연이다. 멜번에서 한국문화패 '소리'를 이끌고 있는 김민정, 이성범 부부가 준비한 화려한 대단원의 막이다. 한복을 맵시있게 차려 입은 김민정씨가 이성범씨의 장구 반주에 맞춰 역동적인 북춤을 공연하는 동안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와 손님들도 모두 넋을 잃은 듯 눈이 북채를 좇느라 바쁘다. 북소리가 멈추자 박수소리에 강당이 떠날 것 같다. 색동 한복을 입은 한 여자 아이는 "again"이라며 앙코르를 외친다.

 

행사가 끝나고 한국어 지도자들이 준비한 잔치음식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행사장에서 만난 모든 어머니들은 한국어 교사에게 오늘 행사에 대해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너무 굉장했어요! 고마워요"라며 진심이 담긴 감사인사를 했다. 한 어머니는 한국에 대해 지난해까지는 거의 알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한국을 통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어 과목 개설에 대해 장인선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한 남자 교사가 한국음식을 손에 들고 다가와 장인선 교사에게 학교 웹사이트에 한국어판을 추가해야겠다고 말했다.

 

장인선 교사는 이제 2학기를 배웠지만, 아이들이 "한국어를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사랑한다고 해야 할까… 어떤 아이들은 자기를 한국인으로 바꿔달라고 할 정도예요"라고 말했다. 물론 학교의 다른 선생님들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1주일 일과가 끝난 후 금요일 회식 때는 소주를 마시기도 한다.

 

모디알록 초등학교에는 외국어 전용 교실이 따로 있어서 한국어 교육 준비가 쉽다. 뿐만 아니라, 다른 교사들이 먼저 적극적으로 한국의 행사에 관심을 가져 4월에는 식목일 행사도 가졌고, 앞으로 한글날도 학교 전통으로 지킬 예정이라고 한다. 행사가 끝나고 학교마당에서 만난 4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교 아이들 9명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국어를 배우기 전에 한국에 대해 알고 있었냐고 물었더니, 조쉬와 브랜든, 마리오는 월드컵과 박지성을 얘기하고, 남한과 북한이 서로 싸운다는 걸 알고 있다고 얘기한다. 태권도도 역시 한국의 최고 수출상품이다. 에이다는 아버지가 태권도 챔피언이어서 한국에 대해 알았다.

 

한국어 시간에 배운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태권도와 한복이 대세다.

존은 가라데를 배웠는데 학교에서 태권도 돌려차기를 배우면서 다른 아이들보다 잘할 수 있게 된 것이 좋단다. 엘라와 브리아나는 부채춤 공연을 해서인지 두 말 할 것 없이 부채춤과 한복을 꼽는다. 키아라는 붓글씨와 한국음식이 제일 좋은데, 밥이랑 불고기를 제일 좋아한다. 벤은 불어보다 한국어가 더 역동적이어서 오히려 한국어가 더 재미있다고 한다.

 

"이제 한국어 신문에서 인터뷰를 했으니 한국에서 유명해질 거야" "아냐, 여기서 나오는 신문이잖아"라며 옥신각신하는, 한국에 흠뻑 빠져 있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교정으로 나가니, 다시 바다 냄새가 섞인 상쾌한 겨울날의 공기가 기다리고 있다.

 

모디알록 아이들과 학부모들, 교사들의 표정에는 단순한 미지의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 호감 있는 '동경'이 역력했다. 한인사회에서 한국어 교육에 대해 이들보다 더 많은 기대와 관심을 갖는다면, 이 아이들이 갖고 있는 '동경'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때까지 유지되고 '애정'으로 더 커질 수 있을 것 같다. 기분 좋은 금요일 오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호주일요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호주, #한국어, #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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