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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성노동자> 1권 표지
 <나, 여성노동자> 1권 표지
ⓒ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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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 '알몸투쟁'란 단어가 들어왔다. 철거현장에서 용역들이 옷을 벗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시위자가 '알몸투쟁'을 하다니. 살펴보니 일부분이 모자이크 처리된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엔 쉰을 넘긴 여성들이 몸싸움을 한다. 이분들은 어떤 절박함으로 옷을 벗었을까? 모두 두 권으로 이루어진 <나, 여성노동자>라는 책에 '알몸투쟁'의 주인공 광주시청 청소노동자들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윤옥주씨와 이매순씨는 광주시청에서 청소노동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2004년에 입사했다. 2004년은 광주시청이 신청사로 이전하는 시기이다. 입사 초기엔 공사를 막 끝낸 신청사를 청소해야 했는데, 그 곳은 물 한잔 마실 정수기도, 잠깐 앉아서 쉴 의자도 하나 없는 공간이었다. 또한 입주 기일이 촉박해 장시간을 일해야 해서 무척이나 힘들었단다. 그렇게 일하고도 받는 월급은 59만 원뿐이었다.

그리고 이분들을 힘들게 했던 또 한 가지는 멸시였단다. 젊은 시청 직원들의 반말, 참기 힘들었으리라. 이 부분을 읽으면서 건물청소 일을 했던 친정엄마가 생각났다.

'헌신의 과일'을 나눠먹고 있는 우리

18년 전쯤 친정엄마는 강남의 빌딩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 직원의 요청으로 잠겨진 회의실 문을 따러 갔단다. 엄마는 열쇠꾸러미에서 회의실 열쇠를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왜냐면 엄마는 노안이라서 열쇠에 붙어 있는 견출지 글씨가 잘 안 보였기 때문이다.

직원은 기다리면서 화가 단단히 났는지 나중에 소장에게 "아무리 청소아줌마라도 글은 읽는 줄 아는 사람을 구해야죠?" 하고 따졌단다. 정말로 엄마가 글을 못 읽었다면 얼마나 더 서러웠을까? 사실 그 일은 엄마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상처가 되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 일을 잊지 못했다. 덕분에 청소 일을 하는 것이 어떤 멸시를 받는 일인지 엄마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광주시청 청소노동자들이 받았을 멸시가 상상이 되었다.

광주시청 청소노동자들은 이런 나쁜 근무 환경을 바꾸기 위해 노조를 만들었다. 노조가 만들어지자 당장 근무시간이 8시간으로 줄었다. 실수령액도 72만 원으로 올랐다. 뿐만 아니라 시청 직원이나 관리자들의 반말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런 평화도 얼마가지 못한다.

2007년 재계약 시점이 되면서 아줌마들은 모두 계약해지가 되었다. 결국 이분들은 험난한 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일 년 뒤, 그동안 투쟁을 계속한 딱 두 명만이 시청 청소직으로 복귀되었다.

하지만 이분들은 복귀 후, 소장이 주도한 철저한 '왕따'를 경험했다. 이매순씨를 왕따시킨 동료들은 이매순씨가 노조를 만들고 투쟁한 덕분에 과거 이매순씨가 일하던 것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료들은 이매순씨와 친하게 지내면 생기게 될 불이익이 두려워 소장의 왕따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아이러니다.

1월 12일 오전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홍익대학교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지지하는 대학생 기자회견'에서 청소노동자들이 처우 개선과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1월 12일 오전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홍익대학교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지지하는 대학생 기자회견'에서 청소노동자들이 처우 개선과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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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들이라면, 남편은 내게 뭐라고 했을까

이 글에 나오는 여성노동자들은 대부분 지리한 투쟁의 역사로 자신의 삶의 황금기를 보낸 사람들이다. 그로 인해 삶의 의미도 깨닫고 보람도 있었지만 상처는 오롯이 개인들만의 몫이다. 어떤 분들은 그 상처를 돌아볼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 의해 생긴 과실은 언제나 우리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 갖는다. 미안하게도 말이다. 이 책을 읽고만 있는 나 역시 이분들의 헌신의 과실을 나눠먹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들과 함께 힘들었을 가족들이 궁금했다. 내가 저분들이었다면 우리 남편은 어땠을까? 월급도 못 받아오면서 투쟁을 위해 점거농성을 하고 몸싸움을 하고 연대투쟁을 하러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면 우리 남편은 뭐라 할까? 남편의 대답은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때려치워."

딱 그 한마디 했을 것이다. 물론 남편이 내세울 이유는 딱 한가지다. 나의 가장 약한 고리.

"아이들 다 팽개치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그 한마디에 아마 나는 활동을 접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분들의 가정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결혼한 노동자가 가정과 아이들 걱정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 분들은 흔들렸을 것이다. 그 고민을 읽고 싶었다.

네 번의 겨울을 난방기구 없는 천막에서 지낸 재능교육 노동자들.
 네 번의 겨울을 난방기구 없는 천막에서 지낸 재능교육 노동자들.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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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의 고통 속에 이어져온 노동운동

<나, 여성노동자> 1권에 나오는 청계피복노조 '6번시다' 유정숙씨의 글을 읽으며 내가 읽고 싶었던 그 고뇌를 읽게 되었다. 유정숙씨는 전태일 열사가 죽은 뒤 여성노동자회인 아카시아회를 조직해서 많은 성과를 냈다. 1973년에는 160명 회원이 있었고 이들은 청계피복노조의 든든한 뿌리가 되었다.

유정숙씨는 같이 노조활동을 하던 남성과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남편은 청계노동자 출신의 첫 노조위원장이 되었고, 유정숙씨는 아이 둘을 키우며 가업으로 생계를 책임졌다. 그 시기 청계노조는 10인 이상 사업장에 퇴직금제도를 도입시켰다. 노조의 놀라운 성과였다. 그러나 1981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남편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 등과 함께 구속된다. 유정숙씨는 돌이 된 둘째 아이를 업고 다니며 남편의 구명활동을 펼쳤다.

"면회를 다닐 때 작은 딸을 등에 업고 세 번씩 버스를 갈아타고 다니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어떻게 그런 힘과 억척스러움이 나왔는지. 심지어 따라다니는 형사가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택시를 타고 다니자며 택시비를 내주면서 자기를 떼어놓고 혼자 다니지 말라고 한 적도 있었다." - <나, 여성노동자> 중에서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교통이 얼마나 불편했나? 따라다니는 형사가 보기에도 유정숙씨의 모습이 오죽이나 힘들어 보였으면 그랬을까? 하긴 버스 타고 다니는 유정숙씨를 따라다니는 형사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초인적인 힘으로 버텼던 유정숙씨, 남편이 출감하고 결국 몸에 탈이 난다.

이미 유정숙씨의 몸이 쇠약해져서 허리를 세워 설 수가 없어 기어다니는 상황이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도 산후조리도 못하고 육아에 생계까지 책임지고 또 남편의 옥바라지까지 하느라 얼마나 몸과 마음이 상했을까? 어린 아이를 둘이나 둔 엄마가 허리를 세우지 못할 정도로 몸이 상했으니 유정숙씨 스스로는 또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재능교육 노동자의 아이가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씨에게 보내는 희망노트에 희망버스를 그리고 있다.
 재능교육 노동자의 아이가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씨에게 보내는 희망노트에 희망버스를 그리고 있다.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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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값진 책

결국 유정숙씨는 남편에게 노조에 복귀하면 이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너무나 인간적인 유정숙씨 부부의 갈등 내용을 읽으면서 나는 속으로 '당신들은 충분히 했다. 이젠 가정을 돌봐야 할 시기이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활동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문장을 읽을 때는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편은 끝까지 노조를 지키지 못한 것을 괴로워했고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는 유정숙씨도 안타까웠단다. 유정숙씨 부부 말고도 얼마나 많은 활동가 가족들이 이런 고통을 겪을까? 대부분의 노동운동은 가정의 참기 힘든 고통 속에서 힘겹게, 힘겹게 진행되어왔다.

6월 11일, 한진중공업 투쟁을 응원하기 위한 희망버스가 서울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출발하던 날, 나는 짐이 무겁다는 핑계로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농성천막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막에서 우리 집 막내와 비슷한 또래인 대여섯 살의 남자 아이 둘과 재능교육 노동자의 남편 한 분을 보았다. 이 아이들은 엄마가 길거리 천막에서 왜 생활하는지 알고 있을까? 선해 보이는 남편은 또 아내에게 뭐라 말할까? 그냥 궁금했다.

그런데 <나, 여성노동자>의 판매 수익금이 모두 재능교육 노동자들을 위해 쓰인단다. 겨울에도 전기장판 없이 천막 하나로 길에서 3년 7개월을 지낸 재능 학습지 선생님들. 그분들도 이제 쉴 차례가 되었지만 지금도 여린 어깨에 올려진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이 재능교육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맙다. 진솔한 삶을 내어 준 여성노동자들과 출판사 모두.

덧붙이는 글 | <나, 여성노동자(1, 2권)>(유정숙, 신순애, 김한영, 이승숙, 유옥순 씀, 그린비 펴냄, 2011년, 각 20000원)



태그:#재능교육, #나, 여성노동자,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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