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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할 사전 지식 없이 '옛 그림'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담긴 뜻을 알아야, 상징하는 것을 알아야, 그린 사람의 면면을 알아야,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올바르게 감상할 수 있는 그림들이 많다. 게다가 고사나 한자를 알아야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있는 그림도 있다.

 

위 그림은 <강산무진도>로 유명한 이인문의 <어부지리>다. 갈대 우거진 강가에서 조개와 새가 힘을 겨룬다. 조개는 자기를 파먹으려는 새의 부리를 꽉 물고 버티고 새는 어떻게든 부리를 빼려고 발버둥 친다. 이게 웬 횡재냐. 돌 하나 안 던지고 두 마리 다 잡게 생겼구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진 어부, 웃음 가득 머금고 그들을 낚아채고자 살금살금 다가간다.

 

어부지리는 <전국책>에 나오는 고사다. 역사책에 종종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다. 연나라와 조나라가 싸우는 통에 힘센 이웃인 진나라가 득을 본다는 유명한 고사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으리. 여하간 이 그림의 제목을 모르면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제법 많을 것이다.

 

옛 그림, 시대를 알아야 이해한다

 

그림이 그려진 시대 상황을 알아야만 보이는 그림들도 있다. 멀리 갈 것까지 있나. 최근 화제가 된 '쥐 벽서 그림(사건)'은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지난해 서울에서 개최된 G20 개최 홍보 포스터에 모씨가 청사초롱 부분에 쥐를 그려 넣어 인권과 언론 탄압을 일삼으면서 앞에서는 국격 운운하는 MB정권을 통렬하게 비판한 풍자 그림, 그 사건 말이다.

 

지금은 이 풍자 그림을 다들 알지만, 50년 100년 후 사람들은 오늘 우리의 기록을 들춰보지 않으면 쉽게 이해할 수 없으리라.

 

우리 조상들이 남긴 그림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옛 그림 중에도 이처럼 시대 상황을 알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그림들이 많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현암사 펴냄)는 이처럼 그림에 얽힌 것들을 알아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우리 옛 그림 68편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 주는 우리 옛 그림 감상 길잡이 책이다. 저자는 미술 컬럼니스트인 손철주.

 

'쥐' 이야기가 나왔으니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수많은 그림 중 이왕 '쥐'가 그려진 그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책 한 권을 쓰고자 작가는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십 년 심혈을 기울였겠지만, 짧은 지면에 이런 저런 이야기 늘어놓으면 책 소개는커녕 폐만 끼칠 것 같으니.

 

여하간 오늘 주인공은 쥐. 쥐는 사실 오래 전부터 잡아 없애야만 하는 '공공의 적'이었다. 시골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대부분 알리라. 시도 때도 없이 천정을 굴러다니는 통에 거슬리던, 뼈 빠지게 농사지은 곡식들을 염치없이 도둑질 하는 쥐를 잡고자 덫도 놓고 밥이나 고구마에 약을 섞어 버무려 놓아 아까운 개까지 희생했던 것들을.

 

쥐가 재물, 다산, 다복을 상징한다는데... 그럴까?

 

옛날 사람들에게 쥐는 어떤 존재였을까? 옛날 사람들은 쥐를 어떻게, 왜 그렸을까? '조그만 쥐가 어떻게 열두 가지 띠 첫 번째 동물이 되었는가' 이야기로 '꾀 많은 동물'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옛날 사람들도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 쥐는 번식력이 왕성하다. 그런지라 혹자들은 쥐가 재물 혹은 다산, 혹은 다복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수박은 씨가 많고 쥐는 새끼가 많다. 둘 다 다산을 상징하는 소재다. 이 그림 보고 다산과 다복을 들먹이면 욕먹는다. 애써 가꾼 과실 채소 조지는 음충맞은(성질이 매우 음흉한 데가 있다) 쥐새끼들 아닌가. 정선의 그림은 깔축없는 풍자화다. 간신배와 탐관오리를 흔히 쥐에 빗댄다. 집쥐 들쥐 얄밉지만 관청에 숨어사는 쥐는 공공의 적이다. 당나라 시인 조업이 지은 시에도 나온다.

 

관청 창고 늙은 쥐 크기가 됫박만 한데(官倉老鼠大如斗) /사람이 창고를 열어도 달라나지 않네(見人開倉亦不走) /병사는 양식 없고 백성은 굶주리는데(健兒無糧百性飢) /누가 아침마다 네 입에다 받쳤는가(誰遣朝朝入君口)-<관청 창고의 쥐(官倉鼠)>

 

수박과 쥐는 16세기 신사임당도 그리고 18세기 정선도 그렸다. 그 쥐가 살아서 도둑질한다. 나라의 혈세를 빼먹고 시민의 지갑을 턴다. 쥐가 얼마나 지독한지 꼼꼼히 보면 안다. 이 그림은 비단 위에 그렸다. 그 비단마저 어귀어귀 파먹었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에서

 

요즘 사람들에게 한동안 '쥐 그림' 하면 '쥐 벽서 그림'이 떠오르겠지만, 우리 옛 그림 중 떠오르는 쥐 그림은 겸재 정선의 <서과투서>(위)와 신사임당의 <초충도> 한 장면이다. 둘 다 커다란 수박을 쥐가 훔쳐 먹는 모습을 그렸다. 정황이 비슷한지라 혹자는 '신사임당의 그림을 정선이 모방했다'고 하지만 글쎄. 

 

옛날 사람들에게도 쥐는 잡아야만 하는 공공의 적

 

끔찍하게 싫어하는 쥐지만, 이 설명 읽기까지 옛 그림이나 옛 문헌 속 쥐는 혹자들의 말처럼 다산 혹은 재물 혹은 다복을 상징한다고 알고 있었던지라 이 그림은 정선이 지인에게 자자손손 번성하라는 마음을 담아 그려 선물한 것이려니, 옛 사람들에게 쥐는 요즘과 달리 다산과 재물을 상징하는 것이려니 했다.

 

아마도 나처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저자 역시 그에 대해 '욕 먹을 짓'이라며 언급하고 있는 걸 보면. 쥐는 제법 등장한다. 대부분 그리들 설명한다. 그러니 옛 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 같은 독자들은 그리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의 말을 빌리면 옛날 사람들에게도 쥐는 잡아 죽여야만 하는 공공의 적이었던 것이다.

 

'관청 창고의 쥐'를 읽노라니 이달의 '이삭 줍는 노래'란 한시가 떠오른다. '뼈 빠지게 지은 농사 세금으로 바치고 나니 남는 것이 없다. 이삭이라도 주워 굶주림을 면할까. 그런데 이삭 주워 목숨 연명하는 것을 관리들이 어찌 알았는지 올해는 이삭까지 싹싹 긁어가는 통에 하루 종일 헤매고 다녀도 이삭 하나 없노라'고 이삭 줍는 아이가 말하네. 이런 내용이다.

 

백골에까지 세금을 매기다니 어찌 그리도 참혹한가. 한 마을에 사는 한 가족이 모두 횡액을 당하였네. 아침저녁 채찍으로 치며 엄하게 재촉하니 앞마을에선 달아나 숨고 뒷마을에선 통곡하네. 닭과 개를 다 팔아도 꾼 돈을 갚기엔 모자란다네. 사나운 아전들은 돈 내 놓으라 닦달하지만 세금 낼 돈을 어디 가서 얻는단 말인가.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도 서로 보살피지 못하고/가죽과 뼈가 들러붙어 반쯤 죽은 채로 얼어붙은 감옥에 갇혀 있다네.

-정내교의 <농가탄>

 

정내교의 <농가탄(農家歎)>이란 시도 있다. 백성들 돈 빼앗는데 재미 들리고 혈안이 된 관리들이 죽은 사람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시인데,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도 정선의 '수박 파먹는 쥐 그림'과 조업의 '관청 창고의 쥐'와 이달의 '이삭 줍는 노래(습수요)', 정내교의 '농가탄' 속 실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만의 생각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최대의 적은 부패한 관리들(정치인)이란 생각 때문인지 그림에 대한 저자의 설명, 후련하게 와 닿는 한편 이처럼 생각 분분하게 한다. 관청의 쥐님들 아시는지? 아직 여름도 채 무르익지 않았는데 공과금 다 오른다는 가을을, 태산 같은 그 공과금들 짊어지고 넘어가야만 할 올 겨울을 벌써부터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사대부 화가 남계우는 별명이 '남 나비'다. 나비 그림만큼은 조선 제일이었다. 수 백 종의 나비를 채집해서 꼼꼼히 관찰하고 치밀하게 묘사했다. 나비 한 마리를 잡다 놓쳐 십리 길을 따라간 그다. 한 생물학자는 나중에 그의 그림에서 희귀한 열대종 나비까지 찾아냈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에서

 

그림 한편에 그 그림의 핵심 부분을 잘라낸 이미지 하나. 빼곡하게 적은 엽서 한 장 정도의 분량을 약간 웃돌 정도의 짧은 글이 이 책 그림 한 점에 대한 설명 전부다. 그런데 이처럼 명확하고 신랄한 그림 설명과 함께 당시의 상황, 그림에 얽힌 사연, 역사 상식, 풍습, 그림 그린 이에 대한 이야기 등을 쉽고 재미있게, 그리고 후련하고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장원급제해서 임금 뵈라는 기원 깃든 김홍도의 <게와 갈대>

 

어떤 이가 김홍도의 <게와 갈대>를 보고 말한다. "어찌 보면 낙서 같고 어찌 보면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 같고, 도무지 알 수 없네"라고. 그린 사람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웹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얼핏 유치한 그림인지라 이 그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특히 많은 것 같다. 그런 분들을 위해 저자의 설명 한 부분을 더 소개하며.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게는 꽃게가 아니다. 갈대밭에 있으니 참게나 말똥게쯤 될까. 게 맛은 갈대 피는 철과 무관하다. 그럼 게가 갈대꽃을 꽉 물고 있는 그림은 무슨 뜻일까. 갈대 '로(蘆)'자는 말 전할 '려(臚)'자와 발음이 비슷하다. '려'자가 들어간 단어에 '여전(臚傳)'이 있는데, 이름이 불린 과거 급제자가 임금을 알현한다는 뜻이다. 게의 껍질은 '갑(甲)'자라서 일등과 통한다. 풀이하자면 장원급제해서 임금을 뵈라는 기원이 이 그림에 숨어 있다.

 

단원은 거기서 한술 더 뜬다. 그림에 써 넣기를 '바다 용왕이 있는 곳에서도 옆걸음 친다'고 했다. 이 말이 무섭다. 게걸음은 옆걸음이다. 조정에 불려가더라도 "그럽죠, 그럽죠" 하지 말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똑 부러지게 행세하란 주문이다. 게의 별명이 '횡행개사(橫行介士)'다. '옆걸음 치면서 기개 있는 선비'란 말이다. 모두 '예스'라고 할 때, 혼자 '노'라고 말하는 야무짐이 벼슬하는 자의 기개다. 게가 맛있는 철이 돌아온다. 관리들이여, 게살만 발라먹지 말고 게의 걸음걸이도 떠올릴지어다.-<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에서

덧붙이는 글 |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l저자:손철주 l현암사 l2011.5.27 l 값:15000원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현암사(2011)


태그:#서과투서, #쥐 벽서, #쥐 그림, #간송미술관,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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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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