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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과 야외로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날을 잡았다. 모두들 바쁘게 살다보니 바깥바람 한번 맛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지라 약속장소는 광주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전남 담양 창평으로 잡았다. 그런데 장소를 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다.

창평 어디쯤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가는 길목에 공교롭게도 내가 주말마다 찾아가는 주말농장이 있었다. 주말농장에는 지금 상추며 고추 같은 게 지천인지라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보면 좋아할 것 같아서 아짐씨 일곱을 일단 농장으로 부르기로 했다. 사는 곳이 각각 다른지라 두 대의 차를 이용해서 움직이기로 했는데, 광주 상무지구 쪽에 사는 이들이 먼저 도착해서 주말농장을 찾아갔던 모양이다.

주인도 없는 농장이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내가 다른 이를 싣고 농장에 도착했을 때는 앞서 도착한 이들은 전화 한 통도 없이 메타쉐콰이어 길을 보겠다고 담양으로 쌩 날아가버리고 없었다. 바쁜 세상을 사는 이들이라는 걸 익히 짐작은 하면서도 소위 집에서 살림이라는 걸 하고 사는 아짐씨들이 유기농 채소들을 눈앞에 두고서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가버렸다는 게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

내 차에 태운 그녀는 다행히도 아주 반가워하면서 상추들을 봉지 가득 따며 좋아했다. 상추 잎을 다 따고 바쁜 길을 가려다 말고 돌아보니 마늘밭 사이에 남겨두었던 시금치가 허리를 꺾은 채 쓰러져 있다. 지난가을에 씨를 뿌려 봄 내내 나물을 해먹고, 그중 시금치 씨앗을 받으려고 몇 포기 남겨둔 것인데 어쩐 일인지 꽃이 진 자리에 씨앗을 맺고 있는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꽃은 무성하게 한 아름씩 잘도 피었던 것 같은데 꽃이 진 자리에 당연히 내려앉아 있어야 할 씨앗이 보이질 않는다. 놀라서 다시 들여다보아도 여전히 꽃이 진 자리만 누렇게 남아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씨앗을 맺고 있는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한두포기라면 어쩌다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겠는데 마늘밭에 심어 놓은 시금치는 모두가 다 그 모양을 하고 있다.

하긴 처음 종묘상에서 시금치 씨앗을 사와서 뿌릴 때 보니 가시가 달려 있는 보통의 시금치 씨앗과는 달리 가시는 고사하고 둥글기까지 한게 매끄럽기까지 했다. 일부러 가시를 다듬기라도 한 듯 매끈한 것도 모자라 거기에 붉은 색칠까지 되어 있는 시금치 씨앗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종묘상에서 사온 시금치 씨앗은 마늘밭 가장자리에 뿌리고 청풍마을 할머니가 자신이 농사일 하며 해마다 받아온 씨앗이라며 한 줌 건네준 가시 달린 시금치 씨앗은 호박 모종을 할 자리 옆에 뿌려두었다.

씨가 있는 시금치
 씨가 있는 시금치
ⓒ 박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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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할머니가 건네준 시금치는 꽃이 진 자리에 사방이 가시가 뾰족하게 돋아 있는 씨앗을 수없이 달고 있는 데 반해 종묘상에서 사온 시금치는 씨앗 맺을 생각은 커녕 힘없이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 모양새가 하도 이상해서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여전히 그저 쭉쟁이 같은 몰골로 서 있다.

씨가 없는 시금치
 씨가 없는 시금치
ⓒ 박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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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 어디쯤에 있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농장에서 뜯어 온 상추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돌아 와 저녁 준비를 하다가 말고 초등학교 '훈장(교사)' 노릇을 하고 있는 딸아이랑 시금치 씨앗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을 가만히 앉아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딸아이가 제법 심각해진 얼굴로 며칠 전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덧붙인다.

'나비를 꿈꾸는 애벌레'라는 테마를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교실 창가에서 배추흰나비를 키워보기로 했단다. 교재자료를 파는 곳에서 배추흰나비 애벌레를 주문했는데 며칠 후 도착한 애벌레는 모양이 참 귀엽고 예뻤단다.

청경채 이파리 뒤에 붙어 자라는 흰나비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어 있는 놈부터 이제 막 알을 부화해 놓은 것까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더란다. 번데기가 되어 있던 몇몇은 며칠 만에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어 제법 아이들로 하여금 환호성을 지르게도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막 애벌레로 붙어 있던 놈들이었다.

배추흰나비
 배추흰나비
ⓒ 박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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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벌레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아이들에게 집에 있는 냉장고에 들어 있는 야채를 조금씩 가져 와 먹여 보라고 했단다. 아이들은 제각각 어린 배추들을 가져와 창가에 도란도란 모여서 애벌레가 배추를 먹는 모습을 제법 진지하게 바라보곤 했단다.

배추흰나비 애벌레
 배추흰나비 애벌레
ⓒ 박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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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나흘 후부터 아이들이 애벌레들에게 주려고 가져 온 어린 배추 잎들을 먹고 자라던 애벌레들이 까맣게 말라죽어가기 시작했단다. 사오던 당시 번데기로 있던 놈들은 나비가 되어 날아갔건만 아이들이 집에서 어린 배추 잎을 가져다 먹인 애벌레들은 약간의 시간 차이가 있었을 뿐 모두 다 까맣게 말라죽어버렸다는 것이다.

딸아이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단다.

"배추흰나비 애벌레가 왜 죽어버렸을까요?"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서요."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요."
"아니요, 우리가 물을 안 줘서요."

천진스러운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지만 딸아이의 생각은 좀 달랐다. 배추흰나비 애벌레가 죽어버린 건 아이들이 집에서 가져온 농약 묻은 배추 이파리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잔류농약 검사까지는 못해봐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늘 야채를 먹을 때마다 농약 걱정을 하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딸아이의 생각이 터무니없어 보이진 않았다.

언제부턴가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덤비는 시대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이렇게 우리 식탁에 오르는 배추나 시금치마저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참 우울한 일이다.


태그:#시금치 ,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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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주부이자 직장인 입니다. 주변의 이야기나 일하면서 느끼는 일들을 써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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