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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부터 장마가 들겠다는 기상대 예보대로 오랜만에 비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단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21일까지만 해도 논바닥이 갈라지기 일보 직전이어서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말라가는 어린 모들이 안쓰럽게 보였거든요.

 

이번 비가 밭작물 해갈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달부터 장마가 올라온다는 예보가 두어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시궁쥐 오줌 누듯 뿌리고 지나가 버려 농민들 애만 태웠거든요. 이번에야말로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기상대는 필리핀 마닐라 해상에서 발생한 5호 태풍 '메아리(Meari)'가 중심 부근에 강한 바람과 많은 비를 동반하고 있다며 26일쯤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하고, 23일에도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보했는데요. 엊그제 모내기를 마쳐 산들바람에도 힘겨워하는 어린 모들이 걱정됩니다.

 

22일은 1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입니다. 하지는 망종(芒種)과 소서(小暑) 사이에 드는 절기로 보리 수확과 모내기가 끝나는 시기이지요. 특히 보리는 '씨 뿌릴 때는 백일, 거둘 때는 삼일'이라고 할 정도로 시간이 촉박합니다.

 

보리를 수확한 후에는 '보리 깍대기'를 태워야 모내기가 편하고, 모를 심어도 빨리 뿌리를 내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골 들녘은 이때쯤이면 보리수확이 끝난 논마다 보리깍대기 태우는 연기로 장관을 이루게 되지요. 지나가다 불났다고 신고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망종은 말 그대로 까라기 종자라는 뜻이니 까끄라기가 있는 보리를 수확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망종이 일찍 들면 보리농사가 잘되고 늦게 들면 나쁘다고 했습니다. 망종까지는 보리를 베어야 논에 모도 심고, 보리를 심었던 밭에 배추랑 콩이랑 심게 된다는 얘기지요.

 

열 번째 절기 하지는 일찍 심은 모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아가는 때이기도 한데요. 농촌은 이때부터 비료 치기와 벼 병충해 방제작업에 들어갑니다. 장마와 가뭄 대비도 해야 하는 만큼 추수와 더불어 1년 중 가장 바쁜 때이기도 하지요.

 

우리 마을(군산시 나포면 '만호뜰')도 5월 초에 모내기가 시작되어 엊그제 20일까지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웃하고 있는 '십자뜰'은 아직도 보리와 밀을 수확하지 않은 논들이 남아 있습니다. 오는 27일까지는 모내기가 모두 끝날 거라고 하더군요.

 

만호뜰에서 가장 늦게 모내기를 끝낸 백운길(50세)씨에게 모를 늦게 심어도 미질과 수확량에 차질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추석 전에 나오는 햅쌀, 즉 조생종 벼는 일찍 심고, 늦게 수확하는 만생종은 늦게 심는다며 올해도 풍년을 기약했습니다. 

 

"작년에 모를 일찍 심은 사람들은 한 필지(1200평)에서 나락(60kg)을 37~38개씩 건졌어유. 근디 저는 젤 늦게 심었는디도 53개나 얻어먹었어유. 꼭 일찍 심어야 헌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거든유···."  

 

8대조 할아버지부터 나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고 있다는 터줏대감 백씨. 그는 물길이 좋은 논은 일찍 심고 나쁜 논은 조금 늦게 심는 게 순서라고 여유를 보였는데요. 1년 동안 땀 흘려 일해서 거둬들인 수확물을 땅에서 '얻어먹었다'며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풍년이 들어도 논 주인과 절반씩 나눠 먹어야 하고, 절반에서 농약값, 비룟값 제하고 트랙터 이앙기 빌리는 값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면서도 농사밖에 없다던 이웃마을 할머니는 올해도 남의 논 품삯 뜯어먹기에 나섰더군요.

 

할머니는 어린 모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넘어진 모를 바로 세워주고, 잡초도 뽑아주고, 이앙기가 그냥 지나간 자리에 모를 심느라 허리가 휘는 줄도 모릅니다. 함께 사는 아픈 딸의 약값을 생각하면 1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짓날 하루 해도 짧기만 합니다.

 

올해 칠순을 맞이하는 할머니는 며칠에 한 번씩 논에 나오십니다. 제비새끼 같은 자식을 다섯이나 남겨놓고 남편이 일찍 떠나는 바람에 20년 넘게 홀몸으로 사는데요. 지금은 정신과 치료를 받는 30대 후반의 딸과 함께 지내고 있어 뵐 때마다 마음이 아립니다.

 

허리를 할미꽃처럼 잔뜩 숙이고 어린 모를 손보던 할머니는 "아자씨도 일로 와서 나랑 넘어진 모나 세우슈!"라며 웃더군요. 소작으로 어렵게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할머니 장딴지에는 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는데요. 가장 영광스러운 인생의 훈장처럼 느껴졌습니다. 

 

삼복더위 앞둔 '등동(燈洞) 마을' 풍경

 

등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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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종안

할머니와 헤어져 집으로 오다가 '등동마을'(등불을 밝히고 공부하는 이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삼복(三伏)더위를 앞둔 시골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였는데요. 산바람을 타고 오는 흙냄새가 기분을 상쾌하게 했습니다.

 

군산에서 가장 높다는 망해산(230m)과 봉화산, 취성산 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요. 쑥국새(뻐꾸기)가 구슬프게 우는 마을 주위에는 송림이 우거지고, 층계논과 저수지가 있어 도시형 농촌이면서도 옛 시골 정취가 물씬 풍겼습니다.

 

등동마을은 황토와 돌을 엇갈리게 쌓아 만든 돌담이 남아 있어 그 옛날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길가에 활짝 핀 함박꽃 군단은 밭에서 허리만큼 자란 옥수수들과 함께 여름을 노래하고 있었는데요. 옥수수는 저만치 있는 '무더위'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나포 모내기, #가뭄, #장마, #등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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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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