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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달라"는 한마디 스스로 내뱉으려고 지금껏 살아왔을지도

어머니의 유골함을 가슴에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습니다. 그제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모르는 여인으로부터 위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불현듯 제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를 좀 안아주세요."

살아오면서 한번도 해본 기억이 없는 아주 낯선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이물스럽지 않고 반가웠습니다. 제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이틀이나 지난 지금도 저는 그 말을 거둬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한마디를 스스로 발음하기 위해 50년 이상을 살아왔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울어야 할 일이 있거나 울고 싶을 때는 항상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들곤 했지요. 기막힌 죽음이 전국의 거리 도처에 뿌려지던 80년대를 지나오면서도 '진짜' 눈물은 언제나 자취방으로 기어들어가서 혼자 흘리곤 했습니다.

눈물이, 눈물을 흘리는 행위 자체가 무슨 도둑질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래서 부끄러웠던 것일까요. 그래서 혼자 숨어서만 흘려야 했던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저의 그런 눈물의 기원을 찾다 보면 반드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어머니가 그러셨습니다. 밖에서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말없이 돌아서서 혼자 눈물을 흘리곤 하셨습니다.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때면서 가끔 얼굴을 당신의 무릎 위에 얹을 때, 그때 어머니의 눈은 젖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밤에 자다가도 가만히 일어나서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달을 보며 울곤 하셨지요. 

외종당숙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외양간 옆에 혼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서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지요. 심지어는 아들 내외가 격렬하게 싸우던 날도 어머니는 그 싸움에 말 한 마디 보태지 않고 거리로 나와서 아무도 없는 곳에다가 눈물을 뿌리셨습니다.

17개월 전 막내아들 결혼식 날 셋째아들의 집에서. 그날 어머니는 막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는커녕 결혼이 무엇인 줄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시집가도 되겠네"하는 누군가의 말은 금방 알아듣고 "보내주면 못갈까" 하셨지요. 자식들은 왜 그때까지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자식새끼란 역시 저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의 제왕들 같습니다.
 17개월 전 막내아들 결혼식 날 셋째아들의 집에서. 그날 어머니는 막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는커녕 결혼이 무엇인 줄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시집가도 되겠네"하는 누군가의 말은 금방 알아듣고 "보내주면 못갈까" 하셨지요. 자식들은 왜 그때까지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자식새끼란 역시 저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의 제왕들 같습니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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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울음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고 합리적인가 하는 공부를 따로 한 바 없는 저는 그렇게 어머니로부터 '울음의 기술'을 전수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하나에서 열까지 저의 거룩한 스승이신 어머니가 이제 당신 어머니의 곁으로 가셨습니다. 가셔 버렸습니다.

"이거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어머니가 임종하기 직전

제가 병실에 들어서서 당신의 몸을 만질라치면 가만히 눈을 뜨고 만면에 가득 미소를, 마치 하얀 종이에 스며드는 분홍색의 물감처럼 천천히 웃음의 표정을 지어보이곤 하셨던 어머니, 미소와 함께 "우리 오빠 오셨네"하는 말씀으로 병실의 다른 환자들을 웃게 만드셨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그날은 눈도 안 뜨고 미소도 안 지어주시고 말씀도 한마디 없이 땀만 흘리고 계셨습니다.

열이 있는가 싶어 이마를 만져보았지만 가을처럼 선선했습니다. 윗옷 단추를 풀어 가슴에 손을 넣어보고 배를 만져보고 등허리 쪽으로 다시 손을 넣어보았지만 모두 다 가을이었습니다. "엄마, 눈 떠 봐. 눈 떠 응?"하고 소리를 지르면 마지못해 그런다는 듯 눈을 뜨시기는 하지만 미소를 지어내지는 못하셨습니다. "우리 오빠 오셨"다고 반갑게 떨리는 목소리를 만들어내지도 못하셨습니다. 그저 땀만 흘리고계셨습니다.

이거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하고 간호사를 불렀더니 그녀는 침대를 조절해서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나아지기는커녕 더 많은 땀이 나고 체온은 점점 더 겨울처럼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간호사가 달려와서 맥박을 재고자 했지만 잡히지가 않았습니다. 두 번, 세 번을 거듭해도 안 된다는 듯 간호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간호사들은 바빠졌습니다. 담당 의사가 뛰어 올라왔습니다. 중환자실로 옮기자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담당 의사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고, 중환자실은 취소하고 여남은 명이나 되는 간호사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땀을 뻘뻘 흘러내리며, 이런 기계 저런 기기 각종 것들을 밀면서 혹은 끌면서 뛰어야 했습니다. 병실 내 다른 여덟 분의 환자들은 자신들의 병상이 한쪽으로 거칠게 밀려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침묵으로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그때가 하필 저녁 식사 시간이었는데 밥상을 받아놓은 채로 먹을 수도 없고 안 먹을 수도 없는 참으로 고약한 상황이던 것이지요.

각종 기기의 모니터에 비치는 어머니의 호흡은 70에서 50, 30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80으로 올라왔다가 또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심장박동 지수는 80에서 60, 40, 30 그렇게 자꾸 떨어지고만 있었습니다. 담당 의사는 어머니의 입을 벌려 무엇인가 쇠붙이 같은 것을 목구멍 깊이 찔러 넣고 그 속으로 다시 무슨 호스 같은 것을 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진 젖가슴 부위를 두 손으로 힘껏 눌렀다가 떼기를 반복하는 동안 의사의 온 몸은 땀으로 젖어들어 갔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가시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힘껏 누르는 그 잠깐 동안만 어머니의 심장 박동은 30 정도로 오르고, 손을 놓는 순간 다시 0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이상 징후를 발견한 때로부터 잘해야 한 시간여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도 바쁘게, 서둘러서 어머니는 가버리셨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본 의사와 간호사의 표정, 저는 못 잊을 겁니다

그렇게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상황을 종료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을 하는 순간에 지어보인 의사와 간호사들의 표정을 저는 아마 영원히 못 잊을 것입니다. 미증유의 어떤 공포에 사로잡힌 그 표정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다. 혹시 환자 보호자인 제가 왜 살려내지 못했느냐고 달려들까 겁이 나서 그랬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사람의 마지막을 선언해야만 하는 고통이 그런 표정을 짓게 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사흘에 한 번씩은 죽음을 겪는 사람들에게도 죽음은 언제나 새로운 각성과 새로운 떨림으로 다가오는가 봅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그런 표정을 발견한 제 입이 내놓을 수 있는 말은 "미안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제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제 목소리는 이미 울음에 점령당해 버렸으니까요.

기가 막혔습니다. 사실 저는 그 무렵에 야광별을 잔뜩 사다 놓고 어머니의 퇴원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담당 의사도 가퇴원 얘기를 하고 있었고, 저 또한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들이 갓난아기를 위해 천장에 붙여놓는 그 야광별을 무려 이천여 개나 사다 놓고 퇴원축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뭐가 그렇게도 바쁘셨는지 제가 병원에 도착한 지 한 시간여 만에 가버리셨습니다.

촛불이 켜지고, 선향에서 올라오는 가느다란 연기 저쪽에서 엷은 미소를 짓고 계시는 어머니의 영정 앞에 당신의 이야기로 도배된 책을 내려놓았습니다. 40여 일 전에 나온 <아들을 오빠라 부르는 울 엄마 참 예쁘다>라는 제목의 그 책을 말입니다. 그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내가 이 책으로 어머니의 등을 떠밀어댄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벼락처럼 머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뭐해요? 하면 책봐요. 하시던, 잠시 뒤에 다시 뭐해요? 하면 글씨봐요 하시던, 그러면서도 그 책이 당신의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다는 것은 끝내 모르셨던,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걸로 하셨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때가 겨우 40여 일 전이었습니다.
 뭐해요? 하면 책봐요. 하시던, 잠시 뒤에 다시 뭐해요? 하면 글씨봐요 하시던, 그러면서도 그 책이 당신의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다는 것은 끝내 모르셨던,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걸로 하셨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때가 겨우 40여 일 전이었습니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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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던 어머니 관련 글을 책으로 묶자고 출판사 관계인들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그런 선물을 자청해서 만들어주신다니 너무도 고맙다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생각없이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이 나오고 일주일쯤 뒤부터 어머니는 식사를 못 하시게 되었습니다. 우유나 미음 외에 아무것도 넘기지를 못하는 어머니를 사흘 만에 병원으로 모셨지요. 그리고 31일 뒤에 어머니의 심장박동은 멈추어 버렸습니다. 혹시 제가 어머니를 그쪽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태워드렸던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8년 전에 이미 심근경색으로 죽음의 선고도 한 차례 받았던 분이 아니냐고, 무엇을 더 바라느냐고, 어머니가 그나마 이때까지 살아계셨던 것은 아들이 당신에 대해서 쓴 글들이 책으로 묶여지기를 기다렸던 것이라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책이라는 이름의 고속티켓을 어머니에게 끊어드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편으론 '그곳'이 '이곳'보다 훨씬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생각하면 '그곳'이 '이곳'보다 훨씬 좋을지도 모르겠다, 여겨지기는 합니다. 얼마나 당신의 소녀 시절이 그리웠으면 아들을 오빠라 부르는 방식으로 '이곳'을 부정하셨을까. 얼마나 당신의 어린 시절이 그리웠으면 학교 대신 나물 캐러 갔다가 종아리 맞았던 때의 일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내실까. 얼마나 '이곳'이 지긋지긋했으면 그 많은 자식 새끼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오래 전에 돌아가신 당신의 어머니와 오빠와 친구들은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셨을까.

그런저런 지난 일들을 생각하노라니 배가 너무나 고팠습니다. 살아오면서 그렇게도 배가 고파본 적은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조화였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상주랍시고 어머니의 영정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내 배가 고파서 틈만 나면 쥐새끼처럼 빈청을 들락거렸습니다. 누가 술이라도 한잔 하라고 권하면 사양하지 않고 쪼르르 달려가서 안주를 정신없이 집어먹었습니다. 그렇게 먹고, 또 먹고, 또 먹어도 배는 고팠습니다.

당신이 주무시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신 어머니. 아들의 이런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습니다.
 당신이 주무시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신 어머니. 아들의 이런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습니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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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마지막으로 어머님께 한 말씀씩 하세요."

입관을 주관하시는 분이 저희들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형제들은 어느새 입관실에서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살아서는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는 꽃신이 어머니 발에 신겨지고 있었습니다. 살아서는 거의 해본 적이 없는 색조화장이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을 발그랗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살아서는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각종 옷들이 어머니의 몸에 입혀져서 그토록 깡말랐던 어머니의 몸은 이제 커다래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어이없고 황당해서 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엄마! 황룡댁! 황룡댁! 그곳에서는 불쌍하지 마세요. 자식새끼들 따위에게 발목이 잡혀서 허둥거리지 마세요. 자식새낄랑은 낳지도 마시고 그냥 홀가분하게 자유롭게 사세요. 절대로, 절대로 불쌍하지 마세요."

어머니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으셨습니다. 생의 모든 것을 자식새끼들에게 쏟아부으셨던 어머니에게도 유일하게 당신 자신을 위한 바람이 있으셨습니다. 죽어서는 남편 곁으로 가지 않겠다고, 불에 태워서 산이든 강이든 아무 곳에나 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어머니가 즐겨 쓰는 단어가 '암치케나'였습니다.

'암치케나', 아무렇게나. 그러니까 그 어떤 격식이나 예식이나 의식에 구속됨이 없이 그냥 자유롭게 훨훨 날려보내 달라는 말씀이셨던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하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어머니의 그런 소원마저 못 들어드린다면 어떻게 자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안의 일부 어르신들이 극구 반대하는 화장을 저는 강행했습니다.

어머니 뜻에 따라 화장했건만... 결국 보내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어머니를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유골함에 담긴 어머니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평소 주무시던 곳에 모셔놓고 촛불을 켰습니다. 대나무향이 나는 선향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렇게도 자식이란 끝까지 이기적인가 봅니다. 이 좁은 방구석 안에서 어머니는 얼마나 답답하실까, 생각은 하면서도 감히 밖으로 훨훨 날아가시게 할 엄두는 못 내고 있습니다.

이제 외할머니께 여쭙겠습니다. 외할머니는 저의 물음에 답을 주셔야 합니다. 어머니는 지금 '그곳'에서 어떠하신가요. 잘 웃으시는가요. 숨은 고르게 잘 쉬시는가요. 밥은 잘 드시는가요. 오줌은요?

아니 그보다도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이 좁은 방구석에 모셔져 있는 어머니를 제가 어떻게 해야 어머니의 소원에 답하는 것일까요. 지금 저희 집 마당에는 하얀 나비들이 유난히도 많이 날고 있습니다. 금년에는 장마도 빨리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무 현명한 생각도 짜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눈물만 훔쳐내는 바보멍텅구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잃었다기보다 스승을 잃어버린 자가 치러야 할 당연한 몫이라 여겨지기는 합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외할머님께 여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알면 삶이 오천 배는 즐거워진다는 외할머니의 말씀을 제가 잊지 않고 있으니까요. 이제부터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어떻게 해야 눈물이 아닌 웃음으로 어머니를 보내드릴 수 있는 것인가요.


태그:#어머니의 장례, #유골함, #자유, #불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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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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