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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찍이 분노했던 적이 있었다. '4·19학생혁명'과 '5·18민주화운동', 그리고 '6·10민주항쟁'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지금 우리 뇌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1987년 이후로 우리가 분노했던 적이 있는가? 우리는 24년 동안이나 분노를 망각한 채 살아왔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것은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1921~1992)가 남긴 창연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찍이 '저질렀던' 세 번의 분노는 지금 역사일까 신화일까? 망각되어 가는 역사가 '역사'일 수는 없을 터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 있다. 우리는 세 번씩이나 되는 분노의 역사를 '역사'로 간직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벌써 월광에 물드는 신화가 되어가고 있는 지경인데, 세속을 사는 우리에게 유용한 것은 역사이지 신화는 아니다.

"93세, 이젠 내 삶의 마지막 단계에 온 것 같다. 세상을 하직할 날이 멀지 않았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출신 스테판 에셀(Stéphane Hessel)의 책 <분노하라>(돌베개, 임희근 옮김)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고 회상한 후, 부디 이제 총대를 넘겨받고 분노하라고 외친다.

왜 분노해야 하는가

프랑스에서 출간 7개월만에 200만부를 돌파한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한국어판(임희근 역, 돌베개)의 표지.
▲ 분노하라! 프랑스에서 출간 7개월만에 200만부를 돌파한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한국어판(임희근 역, 돌베개)의 표지.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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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를 원한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15쪽)

분노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는 것이고, 이것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간명한 답변이 된다. 요컨대 저자가 말하는 분노의 목적은 '정의와 자유의 확장'에 있다.

누구에게 분노하란 말인가

저자의 말대로 과거에 비해 오늘은 분노의 표적이 확실하지가 않다. 그만큼 세상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상대는 작은 특권 계층이 아니다. 어느 작은 특권 계층이야 우리가 명확히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에게는 제국주의 세력과 독재세력이 그들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과 함께 앞서 말한 4·19, 5·18, 6·10 등의 분노가 그런 종류들이었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려면, 재대로 들여다보고 제대로 찾아야 한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라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22쪽)

저자는 분노의 표적을 찾기 위해서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전제한 후,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인간의 기본 요소를 상실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다.

저자가 우선적으로 거론하는 분노의 표적은 '빈부격차'와 '인권 유린' 두 가지이다. 

먼저 빈부격차는 20세기와 21세기가 낳은 폐해이다. 저자는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진단한다.

저자가 참여한 세계인권선언(1948년 채택)의 문안에는, '모든 개인은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모든 사람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저자는 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박해하는 프랑스 사회의 반인권성을 통렬히 비판한다. 저자는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는 '누구를 막론하고'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인권에 대해서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한다.

어떻게 분노해야 하는가 

저자가 말하는 분노의 방법은 비폭력적이다. 하지만 그는 폭력을 무조건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는 폭력을 용납할 수는 없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팔레스타인처럼  '자신이 지닌 무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폭력의 방법에 의해 점령당한 쪽의 입장에서 보면, 민중의 방법이 꼭 비폭력적일 수만은 없다는 점을 인정해 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부인하는 것은 폭력의 효과이다. 분노는 희망을 가져야 성공한다. 희망이 없는 분노는 '격분'일 따름인데, 바로 이 격분을 표출하는 방식이 폭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폭력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희망을 가진 분노'는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가? 이에 앞서 저자는 젊은이들에게 투표와 정당 참여를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저자는 지금의 현실이 이런 소극적인 분노 행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저자는 '평화적 봉기'를 선동한다. 그렇다면 봉기의 대상 즉 표적은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에게 오로지 대량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마지막 39쪽)

부록에 있는 편집자 후기에 따르면 저자 스테판 에셀은 1995년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 국민이 설마 자크 시라크를 대통령으로 뽑을 만큼 신중하지 못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크 시라크의 당선은 이후 저자의 사회당 입당 동기가 된다. 그런데 자크 시라크에 비해 이명박은 어떠한가? 저자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한국 대통령은 '분노'의 대상이자 '평화적 봉기'의 표적이 될 자격이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의 늙은이와 젊은이, 모두에게 던지는 메시지

35쪽밖에 안 되는 <분노하라!>는 책이 아니라 유인물이라고 해야 맞다. 프랑스는 제국주의와 핵무기의 나라라는 점에서 불량국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94세의 레지스탕스 출신 늙은이가 '분노하라'고 외치자 이에 호응하여 국민이 200만 부 이상씩 책을 사 주는 나라이기도 하다.

반면 한국의 늙은이들은 분노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분노는 정숙하지 않은 짓이라고 타이른다. 불과 50대인 필자의 친구들만 해도 한결같이 정숙한 중늙은이들이다. 대한민국에 '원로'라는 것이 있는가?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이 없다. 1987년 이후 한국의 대학생들은 수수방관과 이기주의가 지혜인 줄 알고 처신해 왔다. 그리하여 이명박 정부 들어 참혹할 정도로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남북관계가 파탄 나도 '나 몰라라' 하며 도서관에 묻혀 있든지 아니면 대중소비문화 따위에 영합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오늘의 등록금 투쟁이 안쓰러워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장황하지만 사족(蛇足) 하나를 덧붙이려 한다. 며칠 전 김준엽 총장(91)이 타계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는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끌려가 탈출을 감행했다. 그는 장준하 등과 함께 6000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광복군에 합류한 한국 최초의 학생 레지스탕스였다. 물론 김준엽 총장 말고도 레지스탕스는 더 있었다. 그러나 어디 대한민국이 노(老) 레지스탕스에게 발언의 기회라도 한 번 제대로 준 적이 있었던가? 그는 한사코 조용히 타계했다.

그래도 김준엽 총장은 성공한 레지스탕스에 속한다. 그의 광복군 동지였던 장준하 선생은 독재에 저항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분노하라'고 외치다가 50대를 못 넘기고 죽음을 당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이야기는 이제 역사도 아닌 것처럼 되고 말았다. 월광에 물든 신화처럼 퇴색하고 만 것이다. 오히려 그를 야만적으로 박해한 박정희가 시퍼런 역사로 살아 있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그의 딸이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는 현실 하나만으로도 이 점은 확연히 증언될 수 있지 않은가.


태그:#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레지스탕스, #김준엽,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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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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