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5월 26일 서울고등학교에서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 및 영어과 교육과정 개정 방향 공개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초등학교에서 몇 년 동안 영어를 가르치면서 엉성한 교육과정 구성에 문제의식이 있기도 했고, 그런 문제를 본지 지면을 통해 여러 차례 기사를 쓰기도 했기 때문에 새롭게 바뀌는 교육과정에는 뭐 좀 새로운 것이 있을까 싶어서 찾아갔습니다. 결론은 제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 아이 영어 사교육 안 시키면 부진아 되겠구나'입니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 때문인지 공교육 사교육 관련자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러나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에 대한 발제가 끝나자 많은 참석자들이 자리를 떠났다.
▲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 및 영어과 교육과정 개정 방향 공개 토론회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 때문인지 공교육 사교육 관련자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러나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에 대한 발제가 끝나자 많은 참석자들이 자리를 떠났다.
ⓒ 한희정

관련사진보기


제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여러 해 동안 나름 열심히 가르쳤다고 했는데 왜 사교육을 받지 않은 아이들은 3학년 때는 벙어리, 6학년이 되면 영어포기아(영포아)가 될까?'에 있었습니다.

학기 중이나 학기 말에 아이들의 학습 정도를 평가해보면 사교육을 받지 않은 아이는 도저히 '매우 잘함'이라는 평가 결과를 받기 어렵다는 경험은 영어교과 전담교사인 저에게 무척이나 아픈 현실이었습니다.

교사로서의 자괴감도 들었습니다. '내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라는 교과가 과연 아이들에게 의미있는 학습이 일어나는 시간일까?' 처음에는 그런 고민에서 시작되었지만 영어 교육과 관련된 논문들이나 논의들을 찾아보면서, 또 영어과 교육과정 전체를 들여다보면서 결국 부실한 영어과 교육과정이 부진아를 양산하며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기수법과 서수법 같은 것입니다. 3학년에서는 "How many ~?" 같은 표현을 배웁니다. 4학년에서는 "What time is it?" 6학년에서는 "How much is it?" 같은 표현들을 배웁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체계적으로 영어로 숫자를 세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더 심하게는 교육과정의 어휘 목록 선정 기준에서 기수법과 서수법은 제외를 시켰습니다.

우리 말로 숫자를 세는 것도 초등학교 들어와서 1학년 1학기에는 1부터 50까지, 2학기 때는 100까지 배우는데 외국 말인 영어로 숫자 세는 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미 우리말로 숫자 세기를 배워 수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이와 비교하면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원리만 이해하도록 가르치면 되는 영어 숫자세기를 초등학교 어느 학년에서도 배우지 않은 채 졸업을 하게 되는 겁니다.

또 하나, 이미 여러 번 지적했지만 파닉스(음철법)를 배우지 않습니다. 영어 문자의 기본 음가들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으니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읽는 법을 모릅니다. 물론, 수세기도 파닉스도 사교육을 통해 이미 많은 아이들이 배웠겠지요. 그러니 사교육을 전제한 교육과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부실하게 교육과정을 구성해 놓고 성취도 평가라는 명목으로 전국의 아이들을 줄세우는 일제고사를 치릅니다. 이제는 학교까지도 줄 세우겠다고 하니 교육 현장에서는 답답한 한숨 소리만 들려옵니다.

그래도 이번 공청회에서는 그동안 비판했던 것들이 조금이나마 반영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었습니다. 결과는 아니올시다, 더 부실한 교육과정이 나올 것 같은 예감입니다.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에 대한 관심으로 공청회 장소는 앉을 좌석이 부족할 정도로 만원이었지만, 현장의 어려움과 비판의 목소리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2009 개정 영어 교육과정이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을 위한 교육과정이 아니냐 하는 비판이 있었지만, 결국 가장 큰 문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하겠다는 너무나 과도한 목표를 설정해 두고 그 목표에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중학교 교육과정을 아래로 아래로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구겨넣고 있다는 겁니다.

중학교 영어 교육과 초등학교 영어 교육의 연계성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서 배운 것을 기반으로 중학교 교육과정을 구성해야 하는데, 거꾸로 중학교 교육과정에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맞추겠다는 발제가 나왔습니다(임찬빈,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선임연구위원, "영어과 교육과정 개정 방향" 발제 중).

그렇게 되니 방과후학교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되니 초등학교 1학년부터 파닉스 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되니 2009 개정 영어 교육과정은 6개월 연구 졸속 교육과정이 될 것이고, 부모들은 사교육을 시켜 그 구멍을 메우고, 아이들은 과도한 학습 부담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현재의 집필진들에게 기대할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종합 토론 시간에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one, two, three, four 같은 기수법은 새로 배워야 할 어휘인지 아닌지 교육과정 개정 문제를 발제한 임찬빈 선임 연구원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새로 배울 어휘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교육과정 상에는 새로 배울 어휘에 기수법은 포함되지 않으며 새로운 어휘로 가르치지도 않는다고 하자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현장과 현실을 비판과 어려움을 무시한 탁상공론 교육과정의 전형을 보는 듯하여 씁쓸했습니다.

토론회를 마치고 임찬빈 연구위원에게 현장의 문제의식을 담은 자료니 꼭 참고하시라고 지난 5월 3일 전교조에서 주최했던 '초등교과서와 교육과정 어떻게 바꿔야 하나?' 자료집을 드렸습니다.

영어 교육 문제를 마주대하게 될 때마다 내 아이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질문이 따릅니다.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하셨던 한 초등학교 선생님도 종합 토론 자리에서 '우리 아이 사교육비 많이 들겠다'는 생각을 전하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8월이면 고시될 2009개정 영어 교육과정이 근본적인 변화 없이 그대로 추진된다면, 그 교육과정의 부실을 그대로 떠안고 가야하는, 이제 7살인 우리 아이에게 영어사교육을 꼭 시키거나 다른 길을 찾거나 할 생각입니다.


태그:#국가영여능력평가시험, #2009개정교육과정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