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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화), 아내와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와 묘역이 있는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 다녀왔다. 4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봉하마을은 노 전 대통령이 이루고자 했던 친환경 생태농업의 현대식 농촌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본산 공업지구 삼거리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에는 노란 바람개비들이 신 나게 돌며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초여름의 무더운 날씨였지만, 모내기 철을 앞두고 물이 흥건해진 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혀주었다.

 

아내와 함께 찾아간 이유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부친의 사상 문제로 권양숙씨가 곤경에 처하자 "아내를 버리고 대통령이 되느니 차라리 대통령을 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을 정도로 애처가였던 노 대통령이 반가워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인사 여쭙는 심정으로 생가(生家) 찾아

 

봉하마을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30분, 살아계신 어른께 안부 여쭙는 심정으로 노 대통령 생가를 찾았다. 초가로 복원된 생가는 아버지 노판석씨와 어머니 이순례씨 사이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노 대통령이 8살까지 살았던 집이란다.

 

 

부엌이 딸린 안방, 사랑방, 헛간으로 사용하는 바깥채로 구성된 생가는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책상, 화로, 요강, 문갑 등 안방에 놓인 정겨운 소품들을 대하며 코흘리개 시절의 노 대통령이 말썽을 피우다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관광안내센터 안내원은 생가 외에 노 대통령이 살던 집이 세 곳 더 있다고 말했다. 마을에서 세 차례 이사했는데 마지막 집에서는 단감 농사가 잘되어 큰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마지막 집에서 결혼도 하고 사법고시에도 합격했다고. 

 

노 대통령은 6살 때 천자문을 외워 동네에서 '노천재'로 불렸단다. 동네 어른들에게는 '인사 잘하는 귀여운 아이'로 귀여움을 받았고,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는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기억했다.

 

생가는 노 대통령 형님과 누님의 기억을 살려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을 참고 해서 복원되었다고 한다. 안내판에는 생가 복원과정과 사실적인 복원도 중요하지만, 창조적인 상상력과 균형미를 살리면 좋겠다는 노 대통령의 희망이 담긴 친필 글씨가 복사되어 있었다.

 

봉하마을은 1940년대까지 농가 몇 채에 불과한 벽촌이었으나 60년대 초 마을 앞 늪지가 농지로 개발되면서 마을이 형성됐단다. 노 대통령도 1946년에 태어나 부산으로 떠나던 70년대 중반까지 살았으니 마을 토박이인 셈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공식 기념품 가게'에서

 

생가 옆에는 노란 우산, 책갈피, 만년 다이어리, 머그잔 세트, 텀블러, 티셔츠, 노무현 대통령 관련 도서 등을 파는 기념품 가게가 있었다. 잠시 쇼핑을 하면서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년 '새 터' 펴냄) 16쇄 본 한 권을 구입했다.

 

계산대에서 책값을 치르는데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책 첫 쪽에 '사람 사는 세상, 봉하마을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적힌 고무인을 '꽝' 하고 찍어주었다. 가장 뜻있는 기념품을 골랐고, 생가를 다녀간 확인증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방명록에 서명하고 돌아서다 벽에 걸린 작은 액자 하나를 발견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최고의 명연설'이란 제목이 발길을 붙잡았고, '명계남이 씀'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 명계남. 글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어머니가 남겨주었던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면서 살아라!'였습니다.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타일렀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였습니다.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생략)"

 

명계남은 글을 끝내면서 "우리의 영원한 대통령 노무현, 2001년 12월 11일 힐튼호텔 대선 출마 연설문 중에서"라 쓰고 "원고도 없이 이렇게 역사를 꿰뚫어 우리 가슴에 불을 지르는 대통령을 보았는가?"라고 묻고 있었다.

 

국민의 눈물과 정성으로 꾸며진 '묘역'에서

 

기념품 가게에서 묘역으로 발길을 잡았다. 봉수대가 있었다는 봉화산(烽火山) 정상(140m)을 바라보며 조금 걸어가니 작은 공원처럼 아담하게 꾸며놓은 광장이 나타났다. 입구 오른편에 세워져 있는 '김대중평화센터' 이희호 이사장이 보낸 조화가 잠시 발길을 멈추게 했다. 

 

좌측엔 "노무현 대통령 묘역은 '국가 보존 묘지 제1호'로 지정된 묘역으로 국민들의 눈물과 정성으로 조성된 세계 최초의 '국민 참여 묘역'이며 대통령의 삶과 정신을 기억하며 자신을 비우는 성찰의 광장입니다."라고 쓰인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묘역 광장 바닥에 깔린 1만5천여 개의 박석에는 추모 글귀들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발걸음을 한 발짝 뗄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누군가가 나 대신 추모 글귀를 써놓은 것 같아 한편 고맙게 생각되기도 했다.

 

아내와 나는 교대로 헌화대에 국화를 바치고 고인을 기렸다. '너럭바위'(지하의 안장 시설을 덮고 있는 고인돌 형태의 낮은 바위) 밑에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글귀는 노 대통령의 간곡한 당부로 느껴졌다.

 

봉화산 사자바위 아래에 자리한 노 대통령 묘역은 왜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소박하면서도 산뜻했다. 참배객은 어린아이에서 신혼부부, 노인까지 세대를 초월했고, 두 손을 모으고 묵상에 잠기거나, 합장하고 염불을 외우고, 절을 하는 추모객도 있었다.

 

노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밟았던 부엉이바위가 시야에 들어왔다. 부엉이가 많이 살아서 이름을 붙였다는 부엉이바위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갖 감회가 밀려왔다. 노 대통령이 즐겨 거닐었다는 길을 따라 올라가고 싶었으나 아내 몸이 허락하지 않아 카메라에 담으며 상념에 잠기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오월의 은행잎'처럼 떠난 노 대통령 '추모의 집'에서...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추모의 집'에 들렀다. 전시관에는 노 대통령이 사용하던 물건과 서류들이 조금 어둡고 은은한 조명아래 전시되어 있었다. 생전에 쓴 일기도 보였는데, 소품에 불과하지만, 물건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와 역사가 담겨 있는 듯했다.

 

특히 노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탔다는 자전거는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을 연상시켰다. 퇴임식 하는 날(2008년 2월 25일) 귀향, 고향의 자연과 함께 지내면서 꼬마를 뒤에 태우고 활짝 웃으며 논길을 달려가는 밀짚모자 차림의 모습을 언론을 통해 자주 봤기 때문이었다.

 

서거 2주기 공식행사(23일 오후 2시)가 치러진 다음 날임에도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추모객들이 고인을 추모하며 타오르는 촛불을 올려놓고 있었다. 표정들이 너무도 경건하고 숙연하여 말을 붙이기조차 어려웠다.

 

화가로 활동하는 설치미술가 임상옥씨가 1주기 추모 때 사용했던 노란 리본으로 만들었다는 노 대통령의 환한 미소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착상이 시(詩)적이고, 리본으로 제작한 얼굴이 실제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임 작가의 작품 소재가 된 리본들은 소명을 다하고도 사람들 발길에 짓밟히는 길바닥의 '은행잎'과 비교되기도 했다. 연한 싹으로 봄의 전령사 역할을 마치고 오월의 소나기에 떨어진 은행잎처럼 처연하게 떠나갔기 때문이었다. 문득 노 대통령의 마지막 유서가 떠올랐다.

 

"너무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노 대통령은 2년 전 위와 같은 유서를 남기고 우리 곁을 미련 없이 떠나갔다. 초록의 향연을 앞두고 그 누가 '오월의 은행잎'이 되겠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슬퍼하지도 말라며 참기 어려운 고통과 치욕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대통령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고향 살리기에 열정을 쏟았던 바보 노무현. 전관예우가 판치는 나라의 전직 대통령이 된 그가 왜 5월의 은행잎이 되었는지는 천하가 알고 있으니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그의 평소 뜻이었던 '지역균형 발전'과 '기회주의 타파'는 꼭 실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노무현대통령, #묘역참배, #오월의은행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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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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