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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여성, 여성을 말하다'는 세대별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인물 르포입니다. [편집자말]
(1편에 이어 계속)

물론 이혼은 끝이 아니었다. 엄마가 아빠와 헤어진 후 공장 등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아빠가 엄마가 글을 잘 모른다는 걸 이용해 보증 등을 세웠던 게 곳곳에서 나타났다. 엄마 이름에 아빠와 바람났던 아줌마가 사인한 경우도 여럿 있었다. 엄마는 카드 파산을 했다.

선혜는 엄마 대신 그 아줌마를 찾아가 마구 퍼부었다. "니는 그런 짓 하는 게 니 아들한테 부끄럽지도 않냐? 아들 똑바로 보면서 심장에 손 얹고 앞으로도 죄 짓고 살지 말고, 계속 부끄러운 줄 알라"고. "어른한테 말하는 '싸가지'가 뭐냐"는 아줌마의 말에 "어른이라고? 니가?"라고 말을 막하기도 했다. 어른이라고 봐줄 수 없었다. 아빠가 그 아줌마랑 싸우면 그 불똥이 바로 집으로 튀었던 게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선혜 자매의 마음과 몸을 추스르는 것도 남아 있었다. 선혜의 머리는 여전히 빠졌고, 동생은 눈 밑이 피멍이 든 것처럼 시커멓게 변해갔다. 함께 병원에 가면 뭣 모르는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선혜에게 "네가 얠 때린 거니?"라고 물었고, 선혜는 억울한 맘을 내비치지도 못한 채 "저 그런 애 아니에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몸이 아픈 건 약으로 치료하면 됐다. 상처받을 대로 상처받은 맘은 어떤 약도 특효약이 되지 못했다. 선혜는 불쑥불쑥 짜증이 몰려왔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있는 돈을 다 털어서 먹을 걸 사먹었다. 돈이 없을 땐 그 화를 참지 못해 집안을 한바탕 다 뒤집어놨다. 선혜네 낡은 옷장 한 구석은 선명한 발자국 모양으로 파여 있다. 어느 날 화가 난 선혜가 발로 '뻥' 차서 생긴 거다.

상담치료도 받고, 미술치료도 받았지만 마음의 병이 쉬이 낫지는 않았다. 왜 때리는 걸 맞고만 있었는지, 그동안 아빠한테 한 번도 개개어 보지 못한 게 가슴에 한으로 맺혔다. 그래서 그런지 아빠가 자주 꿈에 나타났다. 사이좋은 장면이라도 아빠가 꿈에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너무 나빴다. 선혜에겐 이런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중 2때 같은 반이었던 한 친구와 유일하게 집 상황에 대해 속속들이 나눴다. 마음이 좀 편해지긴 했지만 아직 부족했다.

선혜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공부방 선생님에게로 달려갔고 얘기를 하다가 둘이 껴안고 엉엉 우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마음 속 상처로 남은 딱지가 떨어져 나갔다. 사진은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공부방에서 하교 후 공부하는 아이들
 선혜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공부방 선생님에게로 달려갔고 얘기를 하다가 둘이 껴안고 엉엉 우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마음 속 상처로 남은 딱지가 떨어져 나갔다. 사진은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공부방에서 하교 후 공부하는 아이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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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학교에서 동네에 있는 공부방(지역아동센터)을 소개받았다. 골목에 있어서 그런 데가 있는지 전혀 몰랐던 곳이었다. 한 번 가보니 책이 많기에 시간 날 때 가서 책을 읽는 곳인 줄 알았다. 그런데 공부방 선생님은 내일부터 학교 끝나면 바로 공부방으로 오라고 했다. 억지로 공부도 시켰다.

그렇게 하루, 이틀 공부방에 가는 날이 늘어나면서 선혜가 공부방 선생님한테 털어놓는 이야기도 많아졌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공부방 선생님에게로 달려갔고 얘기를 하다가 둘이 껴안고 엉엉 우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마음 속 상처로 남은 딱지가 떨어져 나갔다.

아빠의 초췌한 모습에 말 한마디 못한 내가 원망스러워

그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던 선혜가 여전히 맺혀 있는 응어리 하나를 풀어놓는다.

"전 정말 싫었는데 엄마가 같이 가자고 해서 (교도소에 있는) 아빠 면회를 간 적이 있어요. 거기가 힘들긴 힘든가 봐요. 꼬질꼬질 해갖고…. 아빠가 먹을 걸로 자기 나가게 해달라고 꼬시더라고요. '먹고 싶은 게 뭐냐, 나가면 평소에 먹고 싶던 거 다 사주겠다'고. 신경질이 나서 '먹고 싶은 거 없다'고 대답하고선 면회시간 남았는데 엄마랑 동생 남겨두고 확 나왔어요.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라고요."

선혜는 아빠의 초췌한 모습에 '쫄아서' 또 아무 말도 못한 자신이 한스러웠다. 가정폭력 등으로 형을 살고 있어 가족의 용서가 필요했던 선혜 아빠가 보여준 반성 없는 태도는 선혜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겼다.

어린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일들을 겪은 선혜 앞에 중학교 졸업이란 현실이 닥쳤다. 고등학교를 선택해야 했다. 중학교 내내 학교보다는 밖으로 나돌았던 선혜에게 고등학교는 큰 의미가 없었다. 더하기, 빼기, 곱셈, 나눗셈 다 할 줄 아는데 꼭 고등학교에 가야 하나 회의가 들었다. 가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가더라도 절대로 인문계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들 과외하고 학원 다니는 속에서 그럴 형편이 안 되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다닐 때도 한두 번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지만 엄마, 아빠는 "공부만 하라"고 하고 별 다른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 그때도 좌절했다. 고등학교에 가선 그런 일을 겪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차에 한 실업계고 선배들이 학교 홍보를 왔다.

다른 건 당기는 게 없었는데 남녀공학이란 말에 솔깃했다. 중학교도 남녀공학이었지만 남자애들이 너무 재미가 없었다. 고등학교는 좀 수준이 올라가지 않을까 기대가 됐다. 집에서 1시간은 가야할 곳이었지만 "그 까짓껏 별로 안 멀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각 구에서 오니까 개성이 다양한 애들이 모일 테니까 재미있을 것 같았다. 엄마한테 어디로 가겠다는 얘기도 안 했다. 기초생활수급자여서 나라에서 나오는 고등학교 등록금 지원을 받기 위해 엄마가 동주민센터에 등록금 고지서를 갖다 줄 때에야 학교 이름을 말했다. 엄마는 멀다고 노발대발했다. 선혜는 그에 개의치 않았다.

영어단어시험 100점 맞고 처음으로 느낀 성취감

남녀공학에 대한 기대는 일찌감치 무너졌다. 웹디자인과에 온 남자애들은 디자인보다는 일본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더 좋아했다. '재미'의 수준이 아니라 '오타쿠'의 수준만 올라갔다. 그건 실망스러웠지만 선혜는 이 학교에선 자신이 남들과 다르지 않아서 안도했다. 학교엔 자신처럼 부모가 이혼해서 엄마나 아빠하고만 사는 애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선혜는 친구들 이야기를 전할 때 "아빠랑 사는 애", "엄마, 아빠는 다 있는데…" 등으로 설명했다.

이혼한 경우 말고도 기초생활수급 가정도 꽤 됐다. 친구들은 그런 사정을 감추기 위해 더 꾸미고 다녔다. 그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선혜는 일부러 감추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런 사정이 부끄러운 게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선혜가 자신이 정신을 차린 계기를 들려줬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첫 시험을 봤을 때다. 영어단어 수행평가를 앞두고 별 생각 없이 영단어를 외웠는데 외워지더란다. 실제로 수행평가를 보니 다 맞았다. 왠지 모를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초등, 중학교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성취감이었다. 다음 수행평가에선 하나를 틀렸다. 옆 친구는 다 맞았다고 좋아했다.

누가 나를 이겼다고 하니 괜한 승리욕이 발동했다. 다음번 시험에선 더 잘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어가 그러하니 다른 과목도 조금씩 공부를 하게 됐다. 전혀 손을 떼고 있던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중학교 1학년 문제집까지 샀다. 다른 과목은 영어만큼 성적이 나오진 않았지만 시험을 볼 때면 문제는 보지도 않고 OMR카드에 답을 체크해 하트 모양 등을 만들었던 중학교 때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우연히 앞자리에 앉았던 것도 행운이었다. 앞자리가 선생님과 친해지기에도 좋고 은근히 딴 짓하기에도 좋은 자리라는 것도 알게 됐다. 늘 어떻게 하면 선생님 눈에 안 띌까 하면서 선혜와 함께 뒷자리를 챙겼던 중학교 때 친구들은 선혜가 고등학교에 들어가 앞자리에서 공부한다는 말을 지금도 믿지 않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나에 자신감이 붙으니 다른 것들에도 의욕이 생겼다. 계속 공부를 하다 보니 이기는 것보다 여러 가지를 알게 되어 좋았다는 선혜는 그렇게 인생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대학에 가려던 계획, 3년 뒤로 미루다

선혜는 가르치는 게 좋다. 자신은 제대로 못 했어도 동생은 공부를 잘 하길 바라면서 어렸을 적부터 동생을 가르쳤다.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내 주제에…'란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부방에서 '큰 언니'로 동생들을 돌보다 보니 그런 바람이 더 커졌다. 지난 겨울엔 동생과 함께 올해 중학교에 올라가는 공부방 아이들에게 국어, 영어, 수학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공부방에서 식사를 배식하거나 나들이를 갈 때면 선혜는 거의 공부방 선생님이었다. 이젠 유아교육과보다는 아동복지학과나 사회복지학과를 나와서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 그래서 선혜에게 살 희망을 줬던 공부방 선생님처럼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그런 마음으로 "교통비 등 너한테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줄 아느냐, 돈을 벌어 오라"고 했던 엄마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면서 아르바이트 한 번 안 하고 지난 3년 동안 매일 공부방으로 출근해 공부를 했다. 통째로 날렸던 중학교 3년의 공백을 매워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입학 땐 웹디자인과가 두 반 합쳐 65명이었는데 지금은 54명으로 줄었다. 학교를 나간 아이들은 대개 낮은 시급을 받으면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때 '놀아 본' 선혜는 그들과는 다른 정도를 걷고 싶었다. 그래서 수시전형 대학입시에 응시할 계획이었다. 첫 번째 취업 의뢰에 선생님이 이름을 적어가고, 덜컥 이력서를 넣기 전까지는….

면접결과가 나온다는 4월말이 되자 머리가 복잡했다. '붙으면 어떻게 하지. 백화점에서 정해진 유니폼 입고 정해진 신발 신고 일하는 거 싫은데. 게다가 속옷을 팔아야 된다니…' 생각하다가도 '또 못 붙으면 엄마한테 어떻게 말하지. 실망하실 텐데….' 걱정이 됐다.

결과는 꼭 됐으면 좋겠다던 친구는 떨어지고 선혜가 붙었다. 선혜는 붙어도 가기 싫으면 가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학교 선생님들은 안 가면 다음에 학교로 취업 의뢰가 잘 안 들어와서 가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요즘 어디 그만한 월급 주는 데가 흔하냐는 주변의 말에 흔들렸다. 사실 엄마는 100만원도 못 받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가. 또, 동생만큼은 자신이 뒷바라지 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저는 그게 제일 큰 한이었어요. 공부하고 싶다는데도 아무도 나한테 뭘 해주지 않은 거요. 많이 서러웠거든요. 그래서 만약 동생이 공부하겠다고 하면 저는 무조건 해주고 싶어요. 동생이 교사가 되겠대요. 저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재미있는 줄 알고 해보고 싶은 직업 중에 하나였는데, 이제 수능 준비해서 언제 하느냐고 포기한 거죠. 동생은 이제 시작이니까 동생이 하고 싶다면 돕고 싶어요."

그렇다고 선혜가 꿈을 버린 건 아니다. 3년 후로 미뤘다. 직장생활 3년을 하면 산업체 특별전형으로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가 아빠랑 결혼한 게 원망스러워

'백화점에서 정해진 유니폼 입고 정해진 신발 신고 일하는 거 싫은데...' 그러나 선혜는 취업이 꿈으로 가는 우회도로를 택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자신은 꿈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백화점에서 어색한 유니폼을 입고 속옷을 팔더라도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한 백화점 매장
 '백화점에서 정해진 유니폼 입고 정해진 신발 신고 일하는 거 싫은데...' 그러나 선혜는 취업이 꿈으로 가는 우회도로를 택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자신은 꿈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백화점에서 어색한 유니폼을 입고 속옷을 팔더라도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한 백화점 매장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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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한참 됐지만 선혜는 아직 엄마에겐 말하지 않았다. 지금도 떨어졌다고 말할까 갈등 중이다. 면접시험 응시 당시 연봉을 전해들은 엄마는 선혜가 합격하면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먼지 많은 봉제공장에서 일하다 보니 선혜 엄마는 천식에 걸렸다. 기침이 끊이지 않을 때도 있고 평소에도 숨 쉴 때 무슨 바람 새는 소리가 난다. 몸이 아파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라는 걸 알지만 선혜는 가장의 짐을 지게 될까봐 두렵다. 엄마랑 둘이 벌면 동생 뒷바라지도 하면서 돈도 좀 모을 수 있겠지만 혼자서 벌면 단칸방에서 벗어나기 힘든 암울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또 지금은 많이 다스린 마음 속 화가 엄마랑 함께 있다 보면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다. 지난 어버이날 전날도 그랬다. 카네이션을 샀다. 글을 잘 못 읽는 엄마에게 편지를 써주는 건 잔인한 짓이다, 생각해서 오글거리지만 딱 세 글자, '고마워'만 쓰려고 편지지까지 준비했다. 그런데 엄마가 아침부터 선혜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침에 옷을 입는데 엄마가 "옷 좀 여자답게 입어라"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 소리가 거슬려서 짜증을 내니까 엄마는 또 화해하려고 몇 마디를 건네는데 그것 자체도 짜증나서 신경질을 냈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 동생이 엄마에게 카네이션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베개에 꽂아 놨다. 엄마가 그걸 갖다가 가슴에 다니까 동생은 "어, 엄마 줄 거 아닌데…"라고 농담을 했고 엄마는 "왜 나 안 줘? 너 낳아준 거 고맙지 않아?"라고 반문했다. 그 말에 선혜는 순간적으로 "오히려 엄마가 낳아준 거 원망해"라는 말이 나왔다. 엄마는 "나가. 이 년아"라고 응대했다. 선혜는 그날 저녁에 밥도 안 먹고 잤다. 다음날, 엄마는 아침부터 선혜가 좋아하는 고기를 구워댔다. "밥 먹고 자든지 해"라면서 누워 있던 선혜를 툭툭 쳤지만 선혜는 "안 먹어"라고 답하고 그냥 잤다. 마음보다 행동이 앞서간다.

"엄마가 낳아준 거 원망해요?"라는 질문에 선혜는 "조금"이라고 답했다.

"만약에 엄마는 그대로이고 아빠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죠. 아빠가 다른 사람이면 완전 다른 삶을 살았을 거 아니에요. 무엇보다 엄마가 아빠랑 결혼한 게 제일 원망스러운 거죠."

예전엔 원망스럽기만 했지만 힘든 시절을 보내고 나니 그런 거 없었으면 이렇게 못 지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깨우친 것도 많다. 엄마도 나름 고생한 것 같아 오글거리지만 '고마워'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엄마랑 있다 보면 자꾸 저절로 성질을 부리게 된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탓이다.

꿈을 향한 우회도로를 선택하다

그 마음 속 상처를 끌어안은 채 선혜는 다가오는 9월 사회로 나간다. 스무 살도 안 된 자신을 보호할 건 자신뿐이라는 걸 너무 일찍 알았다. 분명 내년에 사람들은 선혜에게 "어느 대학교에 다니냐?"고 물을 거다. 그가 "대학에 안 다니고 취업했다"고 대답하면 "가정이 어려웠구나"라는 반응이 올 거라는 것도 예상한다. 물론 그런 반응에 기죽을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어린 나이에 많은 일을 겪으면서 는 건 깡밖에 없다. 그 깡을 세련되게 가꾸기 위해 요즘은 공부방 선생님들과 인문학 공부도 시작했다.

선혜는 꿈으로 가는 우회도로를 택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자신은 꿈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백화점에서 어색한 유니폼을 입고 속옷을 팔더라도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회로 나갈 9월이 오는 게 두려우면서도 설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노동세상> 6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여성, #실업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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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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