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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어 잡으려면 유료 낚시터 밖에 없다.
▲ 유료 낚시터 잉어 잡으려면 유료 낚시터 밖에 없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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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기야, 예전에 잉어 잡아다 주어 그걸로 약해 먹으니 참 좋더라. 또 한번 잡아주면 안 되나?"

2년 전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에 비정규직으로 다른 업체, 같은 작업 공간에서 일하며 알게 된 규병이라는 나이 어린 친구가 있습니다. 규병이는 어려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막내로 자라서 그런지 어머니에 대한 향수가 많은 친구였습니다. 서른넷 정도 되는 젊은이로 낚시를 꽤나 좋아했습니다. 같이 일하며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저는 규병이를 제 어머니에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규병이랑 찾아가면 언제나 밥을 차려 주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이 항상 그리웠던 규병이는 우리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차려준 밥처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 후 규병이는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여기며 대했습니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해주고 우리 어머니에게 힘든 일이 일어나면 자신의 어머니 일처럼 함께 달려가 일 처리를 돕기도 했습니다. 그런 규병이와 함께 2년 전 유료 낚시터에 가서 밤새워 가며 잡은 잉어 몇 마리와 향어를 어머니께 갖다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와, 이렇게 큰 잉어가 어디서 났노? 이거 내 약해 먹어야겠다."

어머니는 신기하고 놀라워 하시며 잉어를 중탕하는 데 가져다 주었습니다. 중탕하는 데 갖다주면 잉어와 한약재를 넣고 푹 고은 다음 먹기 좋게 팩에 담아 줍니다. 그간 힘들게 살아오신 어머니께서 그 때 그 잉어를 드시고 좋으셨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시작된 어머니의 결혼 생활

어머니는 20살 젊은 나이에 강원도 횡성 산골 화전민으로 살던 10살 위 아버지를 만나 멋모르고 결혼했습니다. 친척을 통해 소개 받은 후 부모 강요에 따라 반강제로 이끌려 서울서 간호보조를 하던 어머니가 낯설고 물설은 강원도 산골에서 1963년경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때 니 아버지 사진만 봤어도 난 니 아버지에게 시집 안 갔어."

맞선도 없이 또 사진 한 번 못 보고 가기 싫다는 거 억지로 이끌려 간 시집살이. 어머니에겐 두렵고 무섭고 힘겨운 여정이었습니다.

"니 아버지 얼굴을 슬쩍 봤어. 얼마나 무섭던지… 고릴라 같이 험상궂어 가지고 꼴도 보기 싫더라고."

몇날 며칠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집에 보내 달라고 떼를 썼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 때 횡성 어느 산골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던 아버지 가족 중 큰 아버지가 어머니를 찾아와 설득을 했다고 합니다. 시집을 왔으니 이제 아버지랑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에 갈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깊은 산속이라 집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찾아 갈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자포자기하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아버지를 따라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노름과 술로 살았다고 합니다. 두 분 다 문맹이시지만 어머니는 다부진 성격이고 아버진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가 일하면 며칠을 못하고 쫓겨났다고 합니다. 일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주인집에서 더 이상 못 쓰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아버지를 닮았는지 손재주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술주정과 폭력으로 어머니를 대했습니다. 우리도 어려서부터 경험하고 체득한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에 치를 떨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생들에게 주문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술, 담배 하지 말자."

저는 아버지가 그렇게 어머니를 폭력으로 대하는 게 술과 담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어머니를 힘들게 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시비를 걸고 말대꾸 한다고 두들겨 팼습니다. 어머니도 저항한다고 했지만 아버지 힘을 당해내진 못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행을 피해 집을 뛰쳐 나가기도 했습니다. 집을 나가 얼마간 다른 곳에 머물다 다시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다시는 안 그러겠다 미안하다 하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3일을 넘지 못하고 다시 술이 만취해 오면 전보다 더 폭력을 쓰면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습니다.

어느 땐 칼을 휘둘러 어머닌 허벅지 쪽에 심한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주먹에 맞아 기절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3일에 한 번씩 그런 일이 반복된 것 같았습니다. 술에 안 취하면 호인인 아버지가 왜 술만 취하면 그런 폭군으로 변하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비싼 돈 들여 굿도 해보고 아버지가 술 안 먹게 하려고 별짓을 다 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파트 청소 다니시는 70세 노모에게 드린 잉어 바구니

잉어로 보약 해 드시려는 어머니.
▲ 잡은 잉어와 향어 잉어로 보약 해 드시려는 어머니.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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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언제부터 그랬느냐고 물어보니 시집살이한 지 며칠 후부터 그랬다고 합니다. 우린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그런 폭력 섞인 술주정을 너무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술자리에 참석하는 게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모두 혼인하여 분가한 후에도 아버지의 그런 술주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며느리가 생기고 손자, 손녀가 생기면 덜 하려니 싶었지만 술만 들어가면 다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분가한 후 몇 년을 같이 지내던 어머니도 더는 아버지 폭력을 못참겠다며 집을 나가셨고 2년 넘게 혼자 지내시던 아버지는 지난 2000년 추석 일주일 후 댓병술을 마시고 차가운 물에 목욕한다고 하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날 어머니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며 서럽게 서럽게 우셨습니다.

"아이고 이 영감아 그렇게 허무하게 갈 거면서… 나를 왜 그렇게 평생 못살게 굴었노."

우리는 상의해서 아버지를 화장장으로 치르기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화장장으로 떠나 보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울고 울어서 눈마저 퉁퉁 부었습니다. 10년 넘게 어머니는 혼자 지내셨습니다. 자식들 모두 빠듯한 형편으로 살고 있기에 자식들에게 손 벌리며 살기 싫다고 혼자 셋방 얻어 그동안 살아오셨습니다. 평생을 아버지에게 시달림 받으면서 늙어간 어머니의 몸은 여기저기가 고장나고 있었습니다. 무릎 관절도 안 좋아 자주 넘어지곤 했습니다. 팔도 부러지고 다리도 부러졌습니다. 위험한 작업을 하다가 손을 다치기도 하고 피멍도 들었습니다. 지금은 70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다 된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잉어 보약 드시고 몸이 많이 회복되었다고 하는데 어쩌겠습니까. 저도 비정규직으로 저임금으로 가족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터라 보약 한 첩 해드릴 여유가 없으니…. 어머니는 요즘 파견업에 종사하고 계십니다. 이곳 저곳 아파트를 다니며 청소를 합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에게 염치 불구하고 돈을 요구했습니다.

"엄마, 유료 낚시터 가면 1인당 2만 5000원이에요. 규병이 승용차 기름값하고 떡밥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해요."

어머니는 잉어 많이 잡아 오라며 9만 원을 주었습니다. 유료 낚시터 자리세 5만 원 내고 떡밥사고 밥먹는 데 사용하고 나니 돈이 바닥 났습니다.

2010년에 저는 다니던 비정규직 일자리에서 정리해고 당했고, 규병인 운좋게 지금도 다니고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 5시에 출근해서 일요일 오전 8시에 퇴근해 잠든 규병이를 일요일 오후 1시에 깨우러 갔습니다. 자고 있던 규병이를 깨웠더니 미리 약속한대로 어머니 부탁으로 낚시 하러 가는 것이라 그런지 벌떡 일어났습니다. 처음에 갔던 유료 낚시터에선 낚시 대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울산 천상이란 곳에서 다시 언양 쪽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그곳엔 빈자리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오후 8시 30분 정도까지 낚시를 했습니다.

10여 마리의 잉어와 향어를 낚았습니다. 오후 9시경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리니 기뻐하십니다. 그러고서 우린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받았습니다. 규병인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을 받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규병이와 저는 밤 늦은 저녁을 먹고는 내일 아침 다시 작업장으로 출근하기 위해 집으로 갔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니 졸립다던 규병이는 우리집까지 저를 태워다 주고, 자고 내일 아침 일 나가야 한다면서 다시 10분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갔습니다. 어머니 일이라면 자기의 어머니 일처럼 나서서 해주는 규병이가 참 고맙게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고단하실 어머니도 잡아드린 잉어를 드시고 기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규병이는 낚시를 잘 합니다.
▲ 낚시 할 준비하는 규병이 규병이는 낚시를 잘 합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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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어머니, #잉어, #울산, #유료낚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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