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머니는 아마 아들이 마침내 당신을 버리고 간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다시는 눈을 뜨지 않겠다는 듯이 질끈 감고, 고개를 가슴 쪽으로 한껏 끌어당겨 다시는 세상 속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겠다는 듯이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밟혀 병실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겨우 어떻게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서 있을 수도 없고, 온 몸이 풀처럼 풀어져서 잠을 자고 싶은데도 잠을 잘 수가 없어 소주를 세 병이나 퍼마신 뒤에야 겨우 잠이 들기는 했지만, 텔레비전의 마감뉴스도 끝나기 전에 도로 깨어나서 미친 듯이 찬물을 끼얹어야만 했다.

이것이 이별이구나. 이것이 이별의 아픔이란 것이로구나. 비도 안 오면서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이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캄캄한 마당을 몽달귀신처럼 왔다갔다 허둥거리며 그렇게 이별이라는 두 글자를 잘근잘근 씹어대기를 얼마나 했던가. 문득 야 이거 큰일났구나 싶어졌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어머니가 병원에서 잘못 되시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정확히 2년 하고도 3개월여 만이었다. 그 기간 동안 단 하루도 어머니와 함께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어디에 무슨 볼 일이 있어 나가야 할 때도 가능한 어머니와 동행을 하고자 했고, 사정이 정 안 되겠다 싶을 경우는 혼자서 나가되 3시간 이상은 머물지 않으려 노력해 왔었다. 밤이면 잠들었다가도 두세 시간마다 한 번꼴로 마치 자동인형처럼 저절로 깨어나서 이상 유무를 확인해야지만 다시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길이 들여져 갔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안 계시게 되어 버렸다. 아침 일찍 출근을 서두르는 직장인에게 "당신 오늘부터 나올 필요 없다"는 식의 해고통보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 이와 비슷할까. 아니다. 사실은 갑자기까지는 아니었다. 사흘 전부터 준비라도 하라는 듯이 예후가 있기는 했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한 손으로 춤도 곧잘 추곤 하시던 어머니가 만사 귀찮다는 투로 바닥에서 몸을 통 안 떼려고 하셨다. 밥을 먹자 해도 싫다 하시고, 달래고 달래서 겨우 입 안에 한 숟가락 떠 넣어 드리면 오물오물 하다가 어떻게 한두 번은 삼키지만 다음부터는 도로 꺼내 버리곤 하셨다. 그래도 우유라든가 찐달걀 노른자위 같은 것은 별 어려움 없이 처리해내고 있었기에 나로서는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다가 결국 사흘을 보내고 말았다. 나흘째 되던 날 아침에도 혹시, 혹시 하다가 11시가 넘어서야 집을 나섰다.

"지난 2년 동안 약을 전혀 안 드셨나보네요?"

컴퓨터 화면에 얼굴을 박고 병력을 살피던 의사가 힐문조로 말했다. 3년여 전 어머니에게 중증치매 선고를 내린 바로 그 의사였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안 드신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2년 하고도 5개월이었다. 온 몸이 퉁퉁 부어올라 눈을 뜨기조차 어려웠고, 그나마 동공이 풀어져서 마취라도 된 것처럼 하루 종일 잠만 자려고 하는 등 아무래도 약물중독이 의심되어 약을 끊었었다.

그 뒤로 중풍이 오기 전까지 2년 2개월여 동안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약을 드실 때는 문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싫어하던 어머니가 약을 끊은 뒤로는 마당에서 풀도 뽑고 쑥도 캐고 추석에는 모싯잎 송편도 빚는 등 정상인(?)과 별 차이가 없는 생활을 해 오신 거였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것이 사실이라는 점은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일기처럼 써온 글을 통해 증명도 가능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의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방치를……."

의사가 혼잣말처럼 짧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어서 입원 결정을 내렸다. 그때부터 나는 아마 소위 '패닉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머니를 '방치'한 못된 아들이 되어버린 내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중증치매 진단을 받으면 날마다 약을 먹여야 하고, 약이 떨어지면 다시 병원을 찾아 새로운 처방전을 받아들고 원무과에 수납을 한 다음 약국에 가서 다시 약을 사다가 열심히 먹여야 하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내가 임의로 중단해 버렸다. 고로 나는 어머니를 '방치'한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만약에 어머니가 집에서 돌아가시기라도 했다면, 사망진단서에 의사는 어쩌면 이렇게 적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약도 안 먹이는 등으로 방치한 것이 주된 사망원인이라고.

약물중독에 관해서는 <오마이뉴스>에 쓴 글의 댓글에서 현직 의사라는 분과 잠시 논쟁을 벌이기도 했었다. 약물이 아닌 자연치유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주된 논점이었다. 그러나 역시 의사는 의사고 나는 현대의학에 관한 지식이 없는 문외한이기에 뚜렷한 접점은 찾지 못한 채로 도덕과 상식의 선에서 대충 합의를 보고 말았다. 그때는 그렇게라도 삶의 문제에 관한 내 주장을 펼쳐볼 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밥을 못 넘기는 상황을 맞이한 오늘에 이르러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라는 대로 그저 묵묵히 따라가는 것밖에.

그렇게 완전히 주눅이 든 채로 입원에 관한 절차를 밟아 나갔다. 검사실에서 피를 뽑고, 방사선과에서 방사선을 가슴에 쐬는 내내 어머니는 "나 좀 살려주시오"를 반복하고 계셨다. 어디가 아파서 살려달라는 게 아니었다. 자꾸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번쩍번쩍 빛나는 기계들 사이를 들락거리니까 그만 겁이 나신 거였다. 실제로도 어머니는 병원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7년 전 심장관련 수술을 하고  난 뒤부터였다.

당신의 아랫도리를 죄다 벗겨놓고 의사들이 여기저기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자식들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있을 때, 그때 어머니는 전신마취가 아닌 국소마취만 되어 있었고, 때문에 당신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의식은 아주 또렷했었다. 그때의 그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던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러한데 어머니인들 오죽할까. 그날의 그 감정은 아마도 어머니의 뼛속에까지 각인되어 있을 터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어머니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당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한 결정이기에 어머니는 아마 짜증도 나고 겁도 나고 해서 아주 혼란스러울 터이었다. 휠체어에서 몸을 한 번 안아 올릴 때마다 어머니는 "으째 이러셔요, 나는 죄도 안 지었는디, 아이고 살려주시오"를 반복하고 있었고, 그때마다 오줌이 나오는 것 같았다. 오줌은 기저귀를 다 적시고 내 옷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검사실에서는 당직자인 여성과 내가 서로를 보며 웃는 훈훈한(?) 풍경이 잠시 연출되기도 했다. 어머니가 여자이고, 보호자인 내가 남자이니까, 그녀는 일단 "보호자는 나가 계세요"하고 관행적으로 말했다. 윗옷을 풀어헤쳐 놓고 가슴에 기계를 대는 검사를 해야 하는데 남자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가라는 말에 얼결에 나오기는 했지만, 글쎄? 하는 의문표가 붙는 순간 그녀는 금방 다시 "보호자분, 들어오셔야겠네요"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어머니의 체중이 50킬로그램을 넘고 당신 자력으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자기 혼자 뭘 어떻게 하겠다고.

입원 병실은 효병동이라고 했다. 효도효자가 붙는 바로 그 효병동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마치 대단한 효자라도 된 것 같아서 잠시 머쓱하기도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아무래도 명칭이 효병동이니까 일반 병동에 비해 시설이나 분위기나 효도에 버금가는 뭔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던 거였다. 그런데 웬걸, 이게 뭐냐. 막상 도착해서 보니 내가 마치 무슨 감옥 같은 데라도 뚜벅뚜벅 스스로 걸어 들어와 버린 느낌이었다.

복도를 따라서 좌로 우로 병실이 몇 개나 되는지 알 수도 없는데 병실마다 여덟 개 내지 아홉 개 혹은 열한 개씩의 침상이 놓여 있고 침상마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들이 누워 계시는데 하나같이 기저귀 받침이 깔려 있을 뿐 보호자가 잠시라도 앉아서 눈을 붙일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가 않았다. 침상과 침상 사이의 간격이 좁아서 한쪽 편의 보호자가 그 사이로 들어오면 다른 쪽 침상에 거의 엉덩이를 걸쳐야만 하는 그런 공간.

한 마디로 말해서 가족은 이제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공간이었다. 간병인께서 가족들이 할 일을 대신해주는 그런 구조였다. 물론 무료는 아니었다. 기저귀며 물수건이며 필요한 모든 것을 구비해놓고 있었다. 물론 무료는 아니었다. 어머니의 옆에서 잠을 자며 가끔은 책도 보고 그렇게 새로운 공부를 하겠다고, 그런 생각을 막연히 만지작거리며 병실에 도착한 나로서는 망연자실,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기나 할 뿐인데 간병인께서 한 말씀 하신다.

5년만에 처음으로 빼낸 어머니의 반지와 팔찌
 5년만에 처음으로 빼낸 어머니의 반지와 팔찌
ⓒ 김수복

관련사진보기


"어머니 손가락에 반지가 있네요. 빼주셔야 해요."
 "왜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니까요. 그리고 약을 드시다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부작용도 생각해야 하구요. 어머, 팔찌도 있네. 이것도 빼세요."

반지나 팔찌나 어머니에게는 특별한 물건들이었다. 이혼을 했다기보다 당한 뒤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마저 끊어버렸던 당신의 '딸년'이 수삼 년 만에 얼굴을 내밀고 찾아와서 해준 것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빼야 한단다. 지난 사오 년 동안 한 번도 빼본 적이 없는 그것을 빼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내게는 자꾸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무슨 선고처럼 들려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옷을 죄다 벗기고 환자복으로 갈아입힌 간병인께서 이번에는 푸른색의 비닐봉투 하나를 내민다. 방금 전까지 어머니가 입고 계셨던 어머니의 옷을 담은 푸른색의 비닐봉투, 병원에서는 사복이 필요 없으니까 일단 집으로 가져가라는 뜻이겠지만 그 또한 내게는 예사롭지가 않다.

어머니의 옷을 담은 비닐봉투. 간병인께서는 일상적인 일의 하나로 무심히 건넨 것이겠지만, 받는 사람은 결코 일상일 수가 없는...
 어머니의 옷을 담은 비닐봉투. 간병인께서는 일상적인 일의 하나로 무심히 건넨 것이겠지만, 받는 사람은 결코 일상일 수가 없는...
ⓒ 김수복

관련사진보기


아, 이게 뭐냐. 도무지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모르는 채로 한참을 허둥거리다가 어머니를 보는데 어머니는 눈을 꾹 감고 계신다. 고개도 가슴 쪽으로 한껏 붙였다. 입도 앙다물었다고나 할까. 어찌나 힘을 주고 다물었는지 금방이라도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네가 이놈아, 에미가 이젠 귀찮아서 이렇게 버리고 간다 이거지?"

내 귀에 어느 순간 들린 그 소리는 필시 환청이었겠지만, 실제로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는 눈도 안 뜨고 입도 안 벌리고 죽는 날까지 그대로 있겠다는 듯이, 손을 만지고 쓰다듬어도 미동조차 없이 꾹 다문 입술만 씰룩거리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오니 어버이날이 코앞이라고 꽃 파는 사람들이 바쁘게 오간다.


태그:#어머니, #입원, #효병동, #치매, #어버이날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