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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빠랑 공장에 들어가서 놀았는데 어느 날 가보니 경찰들이 막고 있고, 경찰 헬리콥터가 와서 최루액 뿌리고, 모래 뿌리고. 애기들 충격이 엄청난 거예요. 경찰서에 갔는데 아빠가 창살에 갇혀 있고.

남자애들은 경찰을 우상처럼 생각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그 경찰들이 아빠를 못 만나게 하니까. 경찰이 아빠를 연행해간 걸 봤으니까. 엄마도 경찰한테 끌려갈까 봐 늘 불안해 했어요. 일 년 동안 한 시도 제 곁에서 안 떨어지려고 하고. 집에서 제가 화장실만 가도 찾고. 한 번은 파업 끝나고 이든이랑 길을 지나가는데 경찰차를 보고 그러더라고요. '어, 경찰차다. 근데 엄마는 안 잡아가?'." 

2009년 8월 4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농성중인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진압작전이 시작된 가운데 도장공장 옥상으로 경찰헬기가 저공비행을 하고 있다.
 2009년 8월 4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농성중인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진압작전이 시작된 가운데 도장공장 옥상으로 경찰헬기가 저공비행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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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그토록 좋아했던 아빠가 사라진 지 한 밤, 두 밤, 열 밤…. 당시 5살이었던 이든(7)이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도 사라져 버릴까 무서워 유치원도 가지 않았다. 당시 셋째 가온(3)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이정아(38·쌍용차 가족대책위원회 전 대표)씨는 뱃속에는 가온이를, 한 손에는 이든이를 데리고 매일 공장 앞을 찾았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악의 꼴들을 봤던 것 같은" 그 해 여름, 5살 이든이도 "볼 거 못 볼 거 다 보며" 파업 현장을 돌아다녔다.

77일간의 옥쇄파업이 끝나고 그 해 10월 동생 가온이가 태어났지만 이든이는 한참동안 아빠를 볼 수 없었다. 쌍용차노조 문화체육부장이었던 고동민(37·쌍용차노조 조직부장)씨는 8월 6일 도장 공장을 나오자마자 경찰에 연행되었다. 2010년 2월 집행유예로 나올 때까지 고씨는 수원구치소에 있었다. 그 기간 동안 홀로 막내 가온이를 낳은 정아씨는 남편이 없는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며 첫째 내린(9)이와 둘째 이든이를 돌봤다. 

뱃속에는 셋째, 한 손에는 둘째 데리고 남편 위해 '투쟁'

쌍용차 해고노동자 고동민씨의 아내 이정아씨와 세 아이들.
 쌍용차 해고노동자 고동민씨의 아내 이정아씨와 세 아이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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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스터다!"

기자가 평택시 서탄면 자택을 찾은 지난 5월 3일 오후 4시께. 유치원에서 돌아온 이든이가 어린이날 선물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부산에서 정미 이모가 보내 온 선물이다. 바가지 머리에 땡그란 큰 눈, 볼록 튀어나온 배. 두 볼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아빠는 틀렸어. 아빠는 어린이날에 온다고 그랬는데."

동네친구 은샘이와 함께 포장지를 뜯는 손이 바쁘다. 며칠 전 내린이와 이든이는 엄마와 함께 마트에 들러 어린이날 받고 싶은 선물을 이모에게 문자로 보냈다. 내린이는 '쥬쥬 스케치 일기'를, 이든이는 '포켓몬스터 배틀 스테이지'를 골랐다. 둘 다 3만 원 정도 하는 장난감이다.

그런데 "야, 이거 짱이다! 대박 짱이다!"라며 장난감을 꺼낸 이든이 표정이 이내 시무룩해졌다.   

"어, 근데 몬스터가 어딨지? 엄마, 몬스터가 없어!"

'포켓몬스터 배틀 스테이지'가 생겼는데 '배틀'을 벌일 몬스터 피규어가 없다. 피규어는 따로 사야 하는 모양이다. 정아씨가 "이든아, 그건 아빠한테 어린이날 선물로 사오라고 할게"라고 달래보지만 이든이는 "싫어, 지금 살 거야"라며 몇 번이고 "몬스터!"를 외친다.

형들 옆에 쪼르르 달려가 새 장난감 좀 만져보려던 가온이는 이든이 형에게 괜히 한 대 맞았다. 숨이 넘어 갈 듯 꺼이꺼이 울더니 금세 그치고는 엄마에게 가서 생글생글 거린다. 정아씨는 "애가 정말 순하다. 파업 때 태교도 못하고 안 좋은 걸 많이 봐서 애가 별날 줄 알았는데"라며 가온이를 안았다.

정아씨는 "요즘 애들 좋아하는 파워레인저 같은 건 10만 원 정도 한다"며 "한 종류만 있는 게 아니라 나오고 또 나오니까 남자애들 장난감은 감당 못한다. 총이며 로봇이며 7~8만 원씩 한다"며 고개를 젓는다.

"파업 때 이든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정도로 '까불이'인 둘째와는 달리 첫째 내린이는 나이답지 않게 속이 깊다. '쥬쥬 스케치 일기'에 종이를 대고 그림을 그려 나가던 내린이는 "이든이 해볼래?"라며 동생에게 펜을 쥐어준다. 몬스터가 없어서 상심했던 이든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그리지? 나 예쁘지?"라며 너스레를 떤다.

가온이는 어느새 또 형 옆에 달려가 누나가 받은 선물을 만지작거린다. 정아씨는 "아이가 하나 있으면 하루 종일 온전히 걔랑 놀아줘야 하는데 둘, 셋 있으면 지들끼리 노니까. 정신없고 시끄럽긴 하지만 북적북적하고 좋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너무너무' 분노하는 아들, '이유를 모르겠다'며 눈물 흘리는 딸

가온(3)이와 이든(7)이.
 가온(3)이와 이든(7)이.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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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린이가 태어나던 2003년, 남편이 쌍용차에 입사할 때만 해도 정아씨는 꿈이 많았다. 쌍용차가 평생직장일 줄 알았고, 애들이 크면 학자금도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쌍용차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아이 셋'이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정리해고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내 남편이 '짤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하지만 남편이 노조 간부가 되면서부터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막상 해고통보를 받아도 놀라지 않았다. 파업분위기가 일기 시작한 2009년 봄, 선전물이나 책자들을 읽어보면서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한 정아씨는 가족대책위원회 대표를 맡을 정도로 남편이 하는 일을 적극 지지했다.

파업 기간 동안 공장 앞에 가 있는 건 그야말로 지옥 같았다. "너무 힘드니까 하루하루가, 버티기가 너무 힘드니까" 차라리 도장 공장에 누가 불을 확 질러서 다 불타 버렸으면, 그렇게라도 이 지옥이 하루라도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가장 미안한 건 아이들이었다. 친인척이 모두 부산에 있다 보니 아이를 맡길 데가 없었다. 파업현장 다니느라 아이들 밥 한 끼 집에서 먹일 수 없었다.

2009년 6월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쌍용차 노동자들의 공권력 침탈 대비 훈련을 한 노동자의 아들이 지켜보고 있다.
 2009년 6월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쌍용차 노동자들의 공권력 침탈 대비 훈련을 한 노동자의 아들이 지켜보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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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정아씨는 세 아이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하루하루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살았다. 아침에 눈 뜬다 싶으면 저녁이다 됐다. 남편은 복직투쟁으로 바빠서 대화는커녕 얼굴 볼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정아씨는 파업 당시 생각에 눈물이 난다. 억울하고 분하다. 정아씨는 "담담했다고 생각했는데, 담담했다고 착각을 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정혜신 박사가 말한 "죽음에 대한 긴장감이 없다"는 말의 뜻도 알 것 같다. 

"계속 사람이 죽었다, 죽었다 하니까 이제는 '남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내 주위 이야기구나. 내 남편은 어떻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남편이 하루 종일 연락이 없으면 걱정되고. 그런데 이번에 상담치료하면서 보니까 제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더라고요. 너무 놀랐어요. 죽음이라는 게, 자살이라는 게 남의 문제가 아닌 거예요.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해보고 살아왔었는데, 지금은 '죽음이라는 게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거구나. 죽는 게 이렇게 한 순간인 거구나'. 죽음이 인식되고 주변에 널려 있고. 죽음에 대한 긴장감이 없다는 게 그 말이었구나."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씨는 쌍용차 해고자들과 가족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진단했다. 어른들에게만 '파업 후유증'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얘네들이 원래 성격 문제인지, 애들이 표현을 잘 안 하니까. 이든이 같은 경우에는 한 번씩 화가 나면 막 분노를 해요. 그냥 화를 내는 게 아니고 막 '헉헉' 너무너무 분노해요. 그게 그 때 그 영향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막 경찰들이랑 몸싸움하고 최루액 쏘는 거 보고. 가끔씩 큰애 내린이 같은 경우에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러면서 울거든요. 그 때 상처들인 거 같기도 하고."

정아씨는 나이에 비해 철이 빨리 든 내린이를 보면서도 마음이 아프다.

"이야기를 하고 표현을 하면 좋은데, 얘기를 안 해요. 파업 당시 영향이 컸을 거라고 생각해요. 혼자 속상해하고 많이 울고, 속에 많이 담아둔 거 같아요. 그 때 부산에 한 달 정도 가 있었거든요. 태어나서 한 번도 엄마 아빠랑 떨어진 적 없었고, 낯도 많이 가리는데 부산에서 고모가 왔는데 따라가겠다고 하더라고요. 평택에 있는 게 힘들었던 거예요. 고모는 저만 바라보고 저만 챙겨주니까. 그걸 딴 사람들은 모르는 거죠. 그런데 엄마랑 아빠는 아는 거예요. 쟤가 어떤 마음으로 갔을지….그 때도 계속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엄마 얘기만 하면 울고. 그래서 남편도 그 때 이야기만 하면 글썽글썽해요. 내린이가 겪었을 상처를 아니까."

가압류 때문에 떠난 아파트에 9살이 써놓은 '아빠 힘내세요' 낙서 

쌍용차 옥쇄파업 당시 엄마 뱃속에 있었던 막내 가온(3)이.
 쌍용차 옥쇄파업 당시 엄마 뱃속에 있었던 막내 가온(3)이.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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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내린이와 이든이에게 조심스럽게 파업 당시 기억을 물었다. "너무 지루했어요"(내린), "재미없었어요. 시시했어요"(이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빠가 왜 거기에 계셨는지 알아?"라는 질문에 내린이는 "엄마가 말해줬는데 이해가 안 갔어요"라고 답했다. 이든이는 "다 생각 안 나요. 옛날 거니까"라며 어서 카드놀이 하자고 성화다.

"평일에 아빠 잘 못 보지? 요즘엔 주말에 봐서 좋아?"라고 물을 때 쯤 이든이는 또 다른 놀 거리를 찾느라 분주해졌다. 내린이는 "그냥. 아빠가 있을 때랑 없을 때랑 그냥 그런데"라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가온이에게 우유를 먹이던 정아씨가 말했다.

"저번에 살던 집에서는 내린이가 아빠 파업할 때 벽에다가 많이 썼었어요. '아빠, 우리가 있으니까 힘내세요, 파이팅'. 저 집 가면 사람들이 지저분하다고 하는데, 저는 그 마음이 담긴 게 너무 예뻐서 그대로 놔뒀어요. 얘기는 안 해도 속으로는 다 알고 있었던 거 같아요."

정아씨 가족은 한 달 전, 가압류 때문에 8년 동안 살던 집에서 이곳 집으로 이사했다. 쌍용차 사측과 정부 그리고 보험사가 쌍용차 조합원을 대상으로 청구한 손해배상·가압류 청구액은 200억원이 넘는다. 

요즘 정아씨 가족은 매주 토요일을 기다린다. 남편 고동민씨와 정아씨는 지난 3월 26일부터 다른 쌍용차 해고자 가족과 함께 정혜신씨에게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 아빠 엄마가 심리 상담을 하는 동안 박혜경씨와 레몬트리 공작단이 아이들과 놀아준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속에 담긴 이야기를 누구 비판받을 필요 없이 내뱉을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치유가 된다.

이번 어린이날에는 심리치료 함께 하는 해고노동자 가족들끼리 쌍용차 옆 공원으로 소풍을 간다. "따로 놀기에는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마음도 그래서 같이 모여 점심도 먹고 놀 계획"이다.   

"저금통 깨서 엄마 낙지볶음 사줄 거에요"

이든(7)이가 저금통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든(7)이가 저금통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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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든이가 TV 받침대 위에 올라가서 책장에 있는 저금통을 꺼낸다.

"나 저금통 세 개나 있다요! 토끼에는 저금이 하나 있고요. 분홍에는 저금이 세 개 있고요. 파랑에는 가~득 찼어요. 만원도 들어있고."
"그 돈으로 뭐 할 거야?"
"장난감만 살 거예요."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이든이가 새침한 포즈를 취하며 "이 거랑도 찍어주세요", "토끼랑도 찍어주세요"라며 저금통을 얼굴 옆에 든다. 내린이도 책장에 있는 자신의 저금통을 가리킨다.

"저기 안에 가득 찼어요. 6만 원 넘어요. 생일 때 쌍용차 삼촌들이 준 거랑, 세뱃돈 받은 거 모았어요."
"내린이는 저 돈으로 뭐할 거야?"
"엄마 밥 사줄 거예요. 엄마 낙지볶음 사줄 거예요. 엄마가 먹고 싶은 거 말해 달라니까 낙지볶음 먹고 싶다 그랬어요. 그리고 남은 돈은 또 다른 저금통에 할 거에요"
"네가 사고 싶은 건 없어?"
"내가 사고 싶은 건…. 음... 공책. 그냥 공책 말고. 그림 그리고 그런 공책. 그런데 그건 비싸요. 우리 문구점에서 파는 건데 비싸요."
"얼만데?"
"3000원."

내린(9)이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내린(9)이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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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인 내린이는 학원에 안 다닌다. 1시쯤 마치면 곧장 집에 와서 동생들과 논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한 친구는 학교 마치고 공부방에 가서 일요일에만 놀 수 있다. 토요일에는 레몬트리 공작단과 평택시청에서 논다. 그래도 "반에서 2등정도" 할 정도로 공부는 잘 한다. "내린이 공부 잘해?"라고 묻자, 바로 "네"라고 자신 있게 답한다.

정아씨는 "애들이 어린 게 고맙기도 하다. 크게 돈 드는 일이 없다"며 "유치원도 시립유치원이라 전액 지원되고 큰 애도 급식비가 지원되기 때문에 막내 기저귀나 분유값 정도 말고는 돈 들어가는 게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옛날처럼 애들 간식 사달라는 대로 사줄 수는 없으니까 기본적으로 먹을 것만 사먹는다"고 덧붙였다. 이럴 땐 새로 이사온 집이 외진 곳이라 근처에 슈퍼가 없는 게 다행이다.

구치소에서 나온 후 민주노총 평택지부에서 상근으로 일하던 남편은 찜질방, 우유배달 아르바이트 등을 하다 지금은 복직투쟁에만 전념하고 있다. 다행히 이번에 시에서 지원하는 '위기가정 돌봄사업' 대상에 선정돼 몇 달은 버틸 수 있게 됐다. 

남편의 '투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 "살면서 가장 바라는 소원이 남편의 복직이지만, 되면 너무 좋겠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정아씨는 "그런데 이런 말을 남편한테 할 수는 없죠. 힘 빠지는 일이니까"라며 "계속 싸울 수 있게 힘이 되어줘야 해요"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돕고 싶으시면 이창근 쌍용차 노조 기획실장(@nomadchang)에게 문의하시면 됩니다.



태그:#쌍용자동차, #쌍용차, #고동민, #이정아, #쌍용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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