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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가 꿈이었던 아버지는 다른 노래는 다 불러도 '흙에 살리라'는 노래는 절대 부르지 않았습니다. TV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오면 "니가 살아 보지 않아 그 노래를 한다"며 성토하기 바빴지요. 흙에 묻혀 사는 인생 고달프기 그지없다면서 자식만은 도회지에서 흙 안 묻히고 살기를 바랐습니다. 흙 파먹고 사는 사람은 되지 말라며 평생을 지게짐으로 공부시켰지요.

그런데 농부가 되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홍세민의 '흙에 살리라'를 들은 겁니다. 어렸을 때나 다 자랐을 때나 자식은 부모 말을 언제나 뒤집어 듣나 봅니다.

도시와 농촌, 겁 안나는 양다리 생활을 시작하다

오미자 밭이 있는 첩첩산중 산골동네
▲ 봄날 상주화북 오미자 밭이 있는 첩첩산중 산골동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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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에서 90㎞나 떨어진 시골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도시에서의 생활을 접고 귀농하는 줄 알고 말리기 바빴습니다. 이사는 가지 않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겠다 했을 땐 우리가 땅 투기를 하는 줄 알고 비난하거나 부러워했지요. 장거리를 오고가는 농사는, 거부권 행사를 당당히 할 만큼 자라버린 아이들의 전학도 쉽지 않고 도시에서 하는 일도 접을 수 없었기에 선택한 방법일 뿐입니다.

지금 당장 하는 일을 그만두고, 귀농해서 수입에 맞춰 모든 소비를 줄이며 도 닦듯이 살 수는 없었지요. 가끔은 백화점에서 근사한 옷을 사 입고 싶은 욕구를 지닌 채 벌이를 끊는다면 오래지 않아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을, 나도 알고 하늘도 아는 일이기에 도시와 농촌에 양다리를 걸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부부 모두 농사일이 처음이고 지금까지 머리와 입으로 먹고 살아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 서툽니다. 다행히 나는 시골에서 자라 농사일을 보고 자랐지만, 남편은 보리와 벼도 가르쳐줘야 알 정도입니다. 돈이 남아돌아 한 투기도 아니고 도시에서의 벌이는 먹고 살기 빠듯할 뿐인데 농사일을 설렁설렁 해서 무한정 손해를 볼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감안해서 가장 마땅하다 싶은 작물을 선택했는데 그게 오미자입니다. 다른 작물에 비해 그나마 손이 덜 가는 작물이고 특용작물이라 농사지어 내 노동력에 대한 값과 경비를 벌 수도 있겠다 싶었지요.

작년 5월 새순이 돋아난 오미자밭
▲ 오미자밭 작년 5월 새순이 돋아난 오미자밭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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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시골에 다녀올게. 밥 잘 해먹고 할 일 하면서 잘 지내."

농가를 마련하고 1000평 오미자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가족 구성원들은 변화된 상황에 알맞게 적응하며 나름 엄마의 농사일에 도움을 줄 방법들을 찾았습니다. 남편은 직장생활을 전과 다름없이 하고, 농사일은 내가 맡고, 아이들은 엄마가 없을 때도 불평하지 않고 집안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엄마라고 예외는 아니다라는 걸 받아들인 겁니다. 아이들도 엄마가 가끔 집을 떠나는 것에 대해 좋아합니다.

"엄마, 오미자 밭에 안 가? 아빠랑 꼭 같이 가세요."
"엄마랑 아빠 밭에 가면 안 불편해? 괜찮아?"
"우린 좋아. 가끔 아빠 엄마 없이 지내는 것이 자유롭고  좋아요."

어른이나 아이나 자유본능은 강합니다. 가끔 부모가 빠져주는 것이 아이들 정신 건강에 더 좋은 것 같습니다.부모의 다그침이 줄어 수능 등급이 일등급 정도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큰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비료의 막강한 유혹도 물리친 첫 농사, 결과는

보살펴 주는 손길 무심해도 저 혼자 이리 잘 익었습니다.
▲ 작년 가을 붉게 익은 오미자 보살펴 주는 손길 무심해도 저 혼자 이리 잘 익었습니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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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협동조합의 오랜 소비자였던 나는 생산자가 되어 먹을거리를 건강하게 길러보고 싶었습니다. 농작물은 매일 돌보지 못하는지라 더 자연스레 유기농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인들은 내가 오미자를 유기시켰다고 놀려대지만 나는 '우리집 오미자는 하늘이 준 본성대로 야생을 뽐내며 잘 자라고 있다'며 너스레를 떱니다.

작년 우리 오미자 밭은 작물 반 풀 반이었습니다. 풀은 제거하는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리 자랍니다. 제초막을 설치해도 소용도 없었지요. 가끔 아내의 농사일을 한량처럼 돌아보러 오는 남편도 막 자란 풀을 보고 혀를 차며 예취기를 돌려줄 정돕니다. 때로는 풀에 대한 전의를 불태우고, 때론 나도 살고 너도 살자며 손을 내밀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일 년 농사를 풀 속에서 지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초생재배의 선구자가 된 것입니다.

첫 농사에서 남들의 반의 반 정도 수확했습니다. 전정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화학비료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소출이 적었지요. 비료의 유혹은 아주 막강합니다. 통실통실한 옆집의 굵은 송이와 우리 밭의 오미자 크기를 비교해 보면서 농부들이 유기농업을 선택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출에서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가격에서 두 배를 받지는 못합니다. 병충해가 왔을 때 땅을 보호하기 위해 한 해 농사를 포기해야 하는데 생활방편이 농사라면 참으로 못할 짓이지요.

우리집도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했다면 부담감이 아주 컸을 겁니다. 실제로 유기농업의 꿈을 가지고 귀농한 사람들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부부간 불화를 겪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리를 잡는 3년 정도는 돈 걱정 없이 농사일을 익힐 수 있어야 정착할 수 있을 듯합니다.

비가 오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내가 달라졌어요

울도 없는 집에서 와글와글 거리면 지나가던 동네 어르신들도 들어오십니다.
▲ 북적이는 집 울도 없는 집에서 와글와글 거리면 지나가던 동네 어르신들도 들어오십니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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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농사를 짓고부터 계절의 바뀜과 기후에 관심이 많이 늘었습니다. 비가 오든지 말든지 눈이 오든지 말든지의 생활에서 이제는 날씨예보를 주의 깊게 듣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자연인이 되었지요. 농사를 짓고부터 도시에서의 생활도 즐겁습니다. 내 자리 아닌 곳에 앉은 것 마냥 심드렁했고 갑갑했던 일들도 신이 납니다.

"오미자 농사꾼입니다"라고 내 소개를 할 때도 그렇게 신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일만하고 살 수는 없으니 주중에 도시에서 일하고 주말에 농촌에서 죽어라 일한다면 일신도 아니고 즐겁지 않을 겁니다. 둘 중 하나는 놀이가 되어야 나도 즐겁겠기에 지금은 농사일을 놀이처럼 하고 있습니다.

시골인심도 많이 변해 전에는 나같은 반푼이 농사꾼을 좋아라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내가 농사짓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좋아해 줍니다. 우리 집에 일손을 도우러 오는 많은 사람들도 번잡스럽게 여기지 않고 마을에 활력이 넘쳐 좋다시니 제가 이만저만 인복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농사일은 해본 지 오래되어 좌충우돌합니다. 늘 시골 어르신들게 물어가며 하고 있지만 실수도 많이 합니다. 정말 어려운 일은 놉(일꾼)을 사서하고 그 나머지는 돕는자를 많이 만들어 함께합니다. 친구들이 소풍오듯 와서 많이 도와줍니다. 도농교류도 열심히 합니다. 농촌체험을 하려고 하는 도시 사람들에게 주저하지 않고 우리 밭을 내 줍니다. 공생하는 거지요. 사람들이 오면 나도 흥이 납니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 신바람이 나야 일할 맛도 나지요.

공생하며 짓는 오마자농사, 놀멍쉬멍 하렵니다

반나절 일손 돕고 내친김에 개울에 가서 물고기도 잡고.
▲ 일손보태러 온 생활협동조합원들 반나절 일손 돕고 내친김에 개울에 가서 물고기도 잡고.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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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시골어르신들 도움 반, 도시 사람 도움 반으로 오미자 농사를 지었습니다. 일의 방식을 바꾸어 주말농사의 문제점을 보완한 겁니다. 오미자를 따는 것과 풀을 제초하는 것은 손이 많이 가면서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도시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판매도 자연스레 그들을 통해 다 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기르는 것에 참여했기에 농약이나 화약비료 걱정없이 안심하고 구매한 것입니다. 한 해 그렇게 농사짓고 나니 올해에는 오미자 꽃도 피기 전에 직접 따서 사 가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열리기도 전에 다 판 듯합니다.

나는 어느 새 오지랖이 넓은 아지매가 되었습니다. 눈 밝고 글 알고 걸음 잰 젊은이(늙도 젊도 아니한 나이지만 시골에서는 젊은이입니다)로 여기 마을 어르신들이 농사지은 이것 저것의 판매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힘 닿는 대로 팔아 드리려고 애를 씁니다.

올해는 순수익 500만 원을 목표로 하지만 작년엔 남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왔다갔다하는 경비가 많이 들었고 농사장비를 구입하는 비용도 솔찬히 들었습니다. 경제적인 손익계산으로는 못할 짓이지만 다른 즐거운 일도 많았습니다. 힘이 세졌고 정신이 강건해졌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갈 곳이 생겨 좋아라 합니다. 도시에서의 일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차 줄어들 것이고 여유시간이 느는 만큼 시골에서의 체류시간이 점점 길어질 겁니다.

기르는 것은 사람을 건강하게 합니다. 더군다나 시골에서 자라 농사본능이 뼛속에 각인되어있는 우리같은 사람에게는 농작물을 기르고자 하는 욕구도 아주 강렬해 채우지지 않음 행복지수가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잊을 만하면 "김서방은 직장 잘 다니고 있나?" 하고 묻습니다. 우리가 하던 일을 접고 귀농한다 할까봐 겁을 내는 거지요. 당분간은 완전 귀농보다 왔다리 갔다리 하며 농사를 지을 겁니다. 뭐든 형편껏 하면 큰 무리가 따르지 않으니 좋습니다.


태그:#농사짓기,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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