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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과 주합루는 창덕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부용지에 자리하고 있다.
 규장각과 주합루는 창덕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부용지에 자리하고 있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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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하나이나 물의 부류는 만 가지이다. 물은 세상 사람이고 달은 태극이니, 태극이란 바로 나이다."

정조가 재위 22년째이던 1797년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를 지은 이유를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최종덕 글, 눌와 출판)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정조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왕으로서 자신감을 '백성을 직접 비추는 밝은 달'에 빗댔다.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翁 自序)' 글귀는 창덕궁 후원의 정자 '존덕정'에 걸려 있다.

구중궁궐. 서울 도심 번화가 한 켠에서 묵묵히 조선의 역사를 간직해 온 창덕궁은 구중궁궐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드넓은 후원을 비롯해 14만 5천여 평에 널찍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창덕궁에는 조선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특히 백성을 위한 정조의 개혁의지는 창덕궁 곳곳에 새겨져 있다.

인정전 앞, 임금과 신하가 국정을 논하는 '조정'을 뜻하는 마당에는 신하들의 자리를 정1품, 종1품 등 서열에 따라 가지런히 배치한 '품계석'이 놓여 있다. 이는 정조가 재위 1년 차이던 1777년 조정의 질서를 확립하고자 세운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숨을 가다듬어오던 정조는 1776년 3월 경희궁(경덕궁)에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고 신하들에게 선전포고와 다름 없는 즉위식을 한 뒤 창덕궁으로 법궁을 옮겼다.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를 대놓고 드러낸 뒤 품계석을 통해 왕과 신하의 위계질서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규장각 근무수칙 "손님이 오더라도 일어나지 말라"

부용지 연못에 새겨진 물고기와 왕의 문인 어수문
 부용지 연못에 새겨진 물고기와 왕의 문인 어수문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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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숨결은 창덕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후원의 '부용지' 주변에도 잘 스며있다. 연못 가장자리에는 물고기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부용지에서 규장각과 주합루로 오르는 왕의 문인 '어수문'이 있고 그 양 옆으로 신하들을 위한 문이 따로 있다. 물고기 양각과 어수문은 '임금과 신하는 물과 물고기 관계'라는 것을 강조해 보여주는 듯하다.

창덕궁에 얽힌 달(태극)과 물, 품계석, 물과 물고기 등은 임금과 신하의 상하관계가 얼마나 분명해야 하는지, 정조의 개혁의지를 잘 보여주는 상징물들이다. 정조의 개혁의지는 1776년 9월 건립한 궁중 학문의 중심지인 규장각과 주합루(1층 각, 2층 누)에 그대로 녹아 있다.

'주합루(宙合樓)'는 상하와 사방 즉 천지를 나타내는 '육합(六合)'의 의미를 담아 정조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 부용지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이라는 전통사상을 구현했다. 즉, 주합루의 천지는 부용지의 '네모와 원'의 천지로 다시 시각화되었다. 주합루와 부용지, 두 개의 천지 사이에 자리한 규장각의 역할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정조가 규장각 학자들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규장각 근무수칙'에 잘 드러난다.

손님이 오더라도 일어나지 말라. / 각신(규장각 직원)은 근무 중에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으라. / 비록 대관이나 대제학이라도 전임 각신이 아니면 당위(각실의 마루)에 오르지 말라. / 모든 각신은 근무 중에 공무가 아니면 청을 내려가지 말라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한영우 글·김대벽 사진, 열화당·효형출판)에 소개된 규장각 근무수칙에는 개혁을 추진할 신하들을 위한 정조의 세심하고 철저한 배려가 잘 담겨있다. 정조는 규장각 학자들과 부용지를 거닐며 개혁을 뒷받침할 내용을 점검하고 개혁을 펼칠 준비를 했을 것이다.

인정전 용마루에 있는 오얏꽃 문양은 대한제국 상징

인정전 용마루에 오얏꽃 문양 5개가 있고, 앞마당에 품계석이 놓여 있다.
 인정전 용마루에 오얏꽃 문양 5개가 있고, 앞마당에 품계석이 놓여 있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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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904년에 세키노 다다시가 찍은 <조선고적도보>에 나오는 인정전 사진에는 용마루에 오얏꽃 문양이 나오지 않는다. 이 문양이 조선 왕실이 자주적으로 도입한 것인지, 일본의 입김으로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의 저자인 최종덕 전 창덕궁관리소장의 지적이다. 창덕궁은 지난 1997년 조선의 궁궐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최종덕 전 소장이 창덕궁 앞에 '조선의 참 궁궐'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창덕궁이 경복궁과 창경궁, 경희궁(경덕궁), 경운궁(덕수궁)에 비해 조선의 법궁으로서 가장 많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창덕궁의 인정전에 붙어 있는 오얏꽃 문양은 다소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 왜 조선 왕조를 대표하는 궁궐에 조선 왕조를 상징하지 않는 오얏꽃 문양이 새겨진 것일까?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은 그의 블로그에서 오얏꽃 문양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오얏 문양은 대한제국 성립(1897. 10. 12)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필자가 확인한 것으로 가장 최초의 것은 건양 2년(1897년, 광무 원년) 4월 24일자 관립한성사범학교 졸업장 상단에 오얏 문양이 새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독립문에 새겨진 것을 비롯해 광화문 네거리 기념비각에서도 보았고, 덕수궁 석조전 꼭대기와 창덕궁 인정전 용마루에 새겨진 것도 보았습니다.

대한제국 당시 오얏 문양은 조선 황실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궁궐 가운데 고종과 순종이 머물렀던 덕수궁과 창덕궁에만 존재합니다. 궁궐은 물론 황실에서 사용하던 의복이나 식기, 훈장, 고관들의 관복에도 새겨져 있는데, 어떤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의 강요로 사용하게 됐다고는 합니다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대한제국이 독자적으로 제정해 사용했다고 저는 봅니다.(* 참조 : 박현정, "대한제국기 오얏꽃 문양 연구"(서울대 미대 석사논문, 2002)"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은 연결된 역사가 맞지만, 오얏꽃 문양은 조선 왕조를 상징하지는 않는다. 만약 외국인들이 인정전의 오얏꽃 문양에 대해 물어온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려 놓은 <동궐도>는 2가지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려 놓은 <동궐도>.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려 놓은 <동궐도>.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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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 불린다. 태조 이성계가 건립한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궁궐이라는 의미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도>를 통해 1820년대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동궐도>에는 1824년 화재로 소실된 '경복전'이 터만 그려져 있고 1830년 불에 타서 사라진 '환경전, 경춘전, 양화당'은 그림에 등장한다. 그래서 <동궐도>의 제작 시기는 1824년에서 1830년 사이로 추정된다.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의 저자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동궐도>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제작 시기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할 때라는 것이다. 효명세자는 1830년 22세 젊은 나이로 창덕궁 희정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동궐도>는 효명세자가 남겨 놓은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현재 <동궐도>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국보 <동궐도>가 2가지로 서울 고려대박물관과 부산 동아대박물관에 각각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동아대의 <동궐도>는 병풍으로 만들어져 있고 고려대의 <동궐도>는 화첩 16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동궐도>를 놓고 동아대와 고려대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경쟁했다. 동아대의 <동궐도>는 1975년 보물 596호로 먼저 지정되었다. 그러자 고려대의 <동궐도>가 1989년 국보 249호로 지정되며 동아대를 앞섰다. 결국 동아대의 <동궐도>가 1995년 국보 249호로 지정되며 둘 사이 선의의 경쟁은 동등하게 끝났다.

옥류천 절벽에 새겨진 숙종의 시 "골짜기마다 우레 소리 가득하네"

옥류천 바위에 숙종의 시와, 인조가 새겼다는 옥류천 글자가 보인다.
 옥류천 바위에 숙종의 시와, 인조가 새겼다는 옥류천 글자가 보인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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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의 제일 깊숙한 곳에는 옥류천이 있다. 작은 바위를 다듬어 만든 절벽에는 숙종의 시와 인조가 새겼다는 옥류천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에 소개된 숙종의 오언절구를 보자.

흩날리는 물 삼백 척 높이(飛流三百尺)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遙落九天來)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看是白虹起)
골짜기마다 우레 소리 가득하네(飜成萬壑雷)

바위 앞에는 물이 돌아흐르도록 만든 물길이 나 있다. 경주의 포석정 곡수처럼 잔을 띄워가며 임금과 신하들이 술을 한 잔 했을 법하다. 숙종도 잔을 기울였을 테지만, 옥류천의 바위는 삼백 척 높이도, 하늘(구천)에서 내리지도 않는다. 과장도 이런 과장이 없다. 혹시 장희빈에 대한 애증을 우레 소리로 표현한 것은 아닐는지 모를 일이다.

"자연을 위압하기보다는 그 속에 포근히 안겨 있는 동궐의 후원, 그 아름다운 공간에는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함을 숭상한 조선 임금의 정결한 마음이 들어 있다."

한영우 교수는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에서 창덕궁의 후원을 이처럼 평가한다. 그는 책을 통해 창덕궁이 지닌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창경궁과 종묘 사이 길(율곡로) 복원, 창덕궁과 창경궁 격리 담장 철거, 창경궁의 식물원 이전, <동궐도>에 보이는 전당 절반 가량이 남아 있지 않은 점, 측간, 우물, 장독대, 부엌 등이 보이지 않는 점 등.

백성을 사랑한 유교정치철학을 바탕으로 사치를 멀리한 조선 임금의 정결한 마음을 헤아리며 창덕궁을 거닐어 보자. 위정자들이 반드시 새겨듣고 실천할 수 있도록 말이다.

<조선의 집 동굴에 들다>와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책 표지
 <조선의 집 동굴에 들다>와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책 표지
ⓒ 열우당/효형출판, 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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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창덕궁,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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