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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불교에 반발하여 서민불교 운동을 벌였던 백련사. 속세와 산문이 경계가 없다는 뜻으로 일주문이 없고 토성이 있는 게 특징이다.
 귀족불교에 반발하여 서민불교 운동을 벌였던 백련사. 속세와 산문이 경계가 없다는 뜻으로 일주문이 없고 토성이 있는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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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23일).  남도 답사 1번지이며  청자골인 강진으로 답사여행을 떠났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학사상과 하멜일행이 7년 동안 지냈던 전라병영성지 및 청자유적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한반도 서남부에 자리한 강진군은 동·서·북면이 노령산맥의 힘찬 두 지맥이 내달려 오다 짙푸른 강진만의 해안과 접해 있다. 백제시대에는 도무군과 동음현이라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양무군과 탐진현으로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는 도강군과 탐진현으로 부르다가, 조선 태종 17년 전라병영이 설치되면서 도강군과 탐진현을 통합해 강진현으로 된 후 1895년 지방 관제 개편에 따라 강진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학생들이 쉬는 놀토라서일까? 백련사 입구에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이란 산 이름을 따서 만덕사라 하였으나 현재는 백련사로 부른다. 이 사찰은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1211년에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백련사의 5경 중 하나라는 '대웅보전' 글씨. 대웅전 현판에 걸려 있다. 지금 한창 보수 공사 중이다.
 백련사의 5경 중 하나라는 '대웅보전' 글씨. 대웅전 현판에 걸려 있다. 지금 한창 보수 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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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요세는 귀족불교에 대한 반발로 서민 불교 운동이 한창이던 1232년(고종19년)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1236년 '백련결사문'을 발표해 '백련결사운동'을 주창함으로써 백련사가 전국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백련사는 여느 절과 다른 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주문이 없고 둘째는 토성으로 둘러싸인 사찰이다.

백련사의 5경에는 만경루와 7천 그루의 동백나무가 피우는 천만송이 동백꽃, 아홉 단으로 쌓은 석축, 해월루에서 바라보는 일출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대웅전 현판에 쓰인 '대웅보전(大雄寶殿)'의 글씨이다.

대웅전 현판에 쓰인 '대웅보전' 글씨는 조선 중후기에 이 지역으로 유배 온 이광사가 쓴 것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으며 사람의 형태가 들어있다고 한다.

실학사상을 집대성 한 정약용의 다산초당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백련사의 명승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오가던 사색의 길이다. 길이는 800m이며, 도보로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길 주변은 동백나무와 차나무가 어우러져 있고 이제 막 새싹을 피운 나무가 주는 신록이 찾는 이들의 머리를 맑게 한다.

정약용이 10년간 머물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초당. 마당에 보이는 돌이 다산이 차를 끓이던 '다조'
 정약용이 10년간 머물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초당. 마당에 보이는 돌이 다산이 차를 끓이던 '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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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흑산도로 유배간 형 정약전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다는 천일각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간 형 정약전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다는 천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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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지 등의 벼슬을 지냈다. 1801년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 때 서학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 선생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정약용은 10여 년간(1808~1818) 다산 초당에 머무르면서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 탐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맑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민심서를 필두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집필하였으며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다산은 2263수의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조선의 사회와 서민들의 아픔을 그린 시로 "조선의 역사를 알려면 다산의 시를 공부하면 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조선시대 호남 최대 군사유적 전라병영성... 하멜이 7년이나 머물러

국가 사적 제397호인 전라병영성은 수인산, 성자산, 화방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로 강진군의 북단에 위치한 성이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초대 병마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축조하여 고종 32년(1895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조 500년간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

하멜은 조선시대 호남최대의 군사유적지인 전라병영성에서 7년간을 살았다. 하멜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보고서'의 저자이다. 하멜기념관은 2007년 12월 3일에 개관했다. 사진은 네델란드에서 보낸 하멜의 동상과 풍차모습
 하멜은 조선시대 호남최대의 군사유적지인 전라병영성에서 7년간을 살았다. 하멜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보고서'의 저자이다. 하멜기념관은 2007년 12월 3일에 개관했다. 사진은 네델란드에서 보낸 하멜의 동상과 풍차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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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 농민전쟁으로 불타고 곧 이은 갑오경장의 신제도로 폐영되었다. 병영성은 총 길이 1,060m, 높이 3.5m, 면적은 93,139㎡(28,175평)인데, 당시의 건물이나 유적은 소실되고 없으며, 성곽 일부만 남아 있어 현재 복원 작업 중이다.

하멜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보고서'의 저자 헨드릭 하멜을 기리는 전시공간으로 2007년 12월 3일에 개관했다. 하멜은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제주도에 표류해 조선에서 13년간 억류생활을 하였는데, 그 중 7년간(1656~1663년)을 강진 병영에서 살았다.

병영성 인근의 골목길은 '골목이 크고 길다'하여 '한골목'이라 부른다. 이 골목 담장은 여느 담장과 달리 높아 집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 병마절도사나 군관들이 말을 타고 수인산성을 순시할 때 순찰 군관에게 집안을 훤히 보이지 않으려고 집집마다 담을 높게 쌓았기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담장은 옛 담장이되 길바닥은 아스팔트로 포장한 것이다.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상감청자의 산실 - 고려청자도요지

강진군 대구면 일대는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고려청자를 제작하였던 지역으로, 우리나라 청자의 변화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청자의 보고(寶庫)'이다. 이 지역에서 지표 조사된 청자가마터는 총 188기로, 이는 전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400여 기의 옛 가마터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량이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 있는 청자박물관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 있는 청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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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소더비 경매에 부쳐진 것을 한국인이 샀던 '꽃무늬 참외모양 주자'. 10억원이라는 고가로 구매하였다 하여 국정감사(2009.10)에서 문제가 됐다.
 세계적인 소더비 경매에 부쳐진 것을 한국인이 샀던 '꽃무늬 참외모양 주자'. 10억원이라는 고가로 구매하였다 하여 국정감사(2009.10)에서 문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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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은 해상교통이 발달하여 다른 지방에 비해 흙, 연료, 기후 등 청자 제작 여건이 적합하여 청자문화가 찬란하게 꽃 피울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당리는 청자 제작 기술이 최절정을 이룬 시기에 청자를 생산하였던 곳으로 우리나라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된 청자의 80% 이상이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구수한 전라도사투리와 민속생활용품 전시장... '와보랑께 박물관'

"오매 징한거 호랭이나 안 물어가고(그 사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부러 뽈아붕께(일부러 빨아 버리니까). 참 애기가 수말스럽소 이(아이가 참 착하요). 울 엄니가 지슴 다매고 가까났는디(우리 어머니가 김 다매고 가꾸어 놨는디). 지스락 물로 발싯냐?(지붕에서 떨어지는 물로 발 씻느냐?)"

어릴 적 시절을 회상하고 한참을 들여다봐야 이해가 되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들. 어떤 것은 아예 들어보지 못한 말도 있다. 일행은 병영면 도룡리에 있는 와보랑께 박물관을 방문했다. 와보랑께 박물관은 김성우(65세)씨가 잊혀져가는 전라도 사투리와 생필품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이다.

와보랑께 박물관
 와보랑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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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보랑께 박물관을 세운 김성우(65세)씨가 전라도 사투리를 설명하고 있다
 와보랑께 박물관을 세운 김성우(65세)씨가 전라도 사투리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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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일하던 직원이 전라도 사투리를 오지게 쓰더라고라. 그때는 참말로 듣기 싫었제. 그래서 사투리 자그만치 쓰라고 닦달도 했지라. 근디 사투리를 듣다봉께 거기에가 우리 선조들의 살아온 모습이랑 그 시대가 들어있더랑께라. 그때부터 사투리에 관심을 가졌지라."

2층으로 된 전시실에는 흑백 텔레비전 외에도 옛 생활용품이 즐비하다. 추억 속 풍금, 홍두깨, 수세미, 수동식 전화기와 계산기, 사진기, 타자기, 녹음기 등 60~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동행한 30~40대 아주머니는 생전 처음 봤다는 닭장과 풍로를 보고 신기해한다.

대로 엮어진 저게 뭘까? 한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세대는 신기해 하는 게 당연하다. 튀밥 튀기는 기계와 닭장의 모습
 대로 엮어진 저게 뭘까? 한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세대는 신기해 하는 게 당연하다. 튀밥 튀기는 기계와 닭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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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기술의 칼라이미지 시대가 주는 편리함에 젖어 있던 우리에게 와보랑께 박물관은 흑백텔레비전 시대로 필름을 거꾸로 돌린다. 잊었던 옛 생각을 하며 향수에 젖어 있는데 뒷자리에 앉은 65세의 할머니의 말이 내 무릎을 치게 한다.

"살다살다 별시런 구경도 다해봤네. 근디 참 좋네. 옛날 생각도 나고. 허허 참!"

남도 답사 1번지 강진에 가면 별 것 다 구경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전남교육' 및 '문화촌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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