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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개와 함께 한 어머니.
 지난 여름 개와 함께 한 어머니.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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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시안을 받아놓고 보름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보름째나 마음 정리를 못하고 있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얼마 뒤에 송금된 계약금을 게 눈 감추듯 써버리고 난 뒤에도 딱히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러려니, 일상의 한 부분처럼 심상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 즈음에 어머니의 상태가 급변하고 있었던 까닭으로 그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할 틈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방송 섭외는 거절하고 책은 받아들인 이유

지상파 방송에서 섭외가 들어왔을 때는 간단히 마음 정리를 할 수 있었다. 내가 남자이고, 아내가 없고, 어머니는 여자인데 아들이 속옷을 갈아입히고 목욕을 시킨다고 하는, 영상물 제작자의 관심을 끈 것은 아마도 그런 그림일 터이었다. 그것은 여러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상업적이라 여겨졌다. 몇 걸음 물러서서 상업적이 아니라 해도, 자극적인 소재로 비쳐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내게는 일상인 생활이 타인에게는 특이하고 자극적일 수 있다면, 완성된 영상물은 대체로 봐서 선정성을 띠게 될 가능이 많다고 여겨졌다. 보는 사람은 선정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해도, 그 주인공 중에 하나인 내가 볼 때 어머니와 나의 살아가는 모습은 썩 그리 깔끔해 보일 것 같지가 않았다.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나를 개방한다는 차원에서 보자면 그리 나쁠 것도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어머니를 팔아먹는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책은 어떨까. 책은 영상물에 비해 순수하다는 인식이 내게 아마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마이뉴스> 편집부로부터 전화번호 가르쳐줘도 괜찮으냐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을 때나, <오마이뉴스> 편집부를 거친 출판사 관계자의 전화를 받았을 때나 별 거부감이 없었다.

사흘 뒤에 집에까지 찾아온 출판사 관계자들과 국화차를 마시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난 뒤에는 차라리 신뢰가 쌓여 있었다. 기왕에 내가 알고 있었던 출판사 편집자들과는 다른 이미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지하고, 겸손하고, 소박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눈매와 말투 같은 것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 뒤로 6개월여, 6개월 동안 간간이 전화 통화를 하고, 메일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원고 정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다른 의구심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글이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다 버리고 다시 쓰는 게 옳지 않겠는가 하는 갈등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런 글을 책으로 묶어도 되는가 하는 의구심까지는 아직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 책이 쓰레기더미에 묻혀 있다가 폐지공장으로 직행하는 그림 또한 상상해보지 않았다.

나도 환경파괴범 대열에 동참하는 건가

책 표지 시안. 둘 중 어느 걸로 책이 나왔을까.
 책 표지 시안. 둘 중 어느 걸로 책이 나왔을까.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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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날이 왔다. 표지 시안이 나왔다고, 두 가지 시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좀 더 손을 본 다음 제작에 들어간다는 내용의 메일이 왔다. 그리고 그 두 가지 표지 시안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때까지도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표지 그림은 괜찮은데 책 제목이 '쪼께' 낯간지럽다는 느낌이 살짝 있었을 뿐.

그런데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부터 별별 오만 생각들이 머릿속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책이 필요한가? 이 글을 책으로 묶었을 때 그 안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거지? 하는 의문에서부터 "아 나도 이렇게 해서 자연훼손의 주범 가운데 하나로 등록이 되는구나"하는 자의식까지, 그야말로 온갖 잡동사니 생각들이 들락거리는 바람에 꿈자리마저 사나웠다.

내가 만일 출판에 대해 완전 무지했다면 이런 자의식까지 끌어안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행이랄까, 불행이랄까. 선배며 후배며 책 만드는 일로 직업을 삼고 있는 이들이 주변에 제법 있었다. 그들로부터 오며가며 얻어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하루에도 몇 트럭분의 책들이 사람의 손길 한 번 타보지 못한 채 폐지공장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거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입에서 절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면 환경파괴의 최고 주범이 책 쓰고 책 만드는 사람들이구마안? 숲과 나무는 환경의 알파요 오메가라 할 수 있겠는데 말이지. 읽히지도 않는 책 만든다고 속절없이 베어져 가는 나무들에게 감사의 인사는 제대로 하고 그 짓 하는지 몰러어?"

한 치 앞을 못 보고 사는 게 사람이라고 했던가. 그토록 큰소리 탕탕 쳤던 내가 오늘날에 이르러 의미도 불분명한 책의 저자가 되었다니. 게다가 출판사는 또 어쩔 것인가. 공연히 건강한 출판사 재정이나 악화시켜놓는 것은 아닌지. 이래저래 착잡한 나날들이었다. 그 바람에 날짜 가는 줄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날짜가 그대로 붙박혀 있기를 바라는 심사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이 나왔다, 어머니가 좋아하실까

하여튼 출판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책이 나왔다고.

"오메 먼 소리다냐, 벌써? 그새보?" 소리가 내 입에서 만들어지고는 있었지만, 완성품이 되어 입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가슴에 납덩이라도 얹어놓은 듯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 그게, 그래요 잉?" 소리가 겨우 나오고 있었을 뿐이었다.

전화 통화가 십 분도 넘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거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귀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고속도로가 뚫린 것 같았다. 말은 공기를 타고 들어왔다가 뇌에 전달될 틈도 없이 곧장 빠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내 입에서 나오는 말 또한 거의 요령부득이한 소리들 뿐이었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기억나는 것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저자에게 20부를 보낸다고 했다. 혹시 더 필요하면 "말씀하시라"고도 했다.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아닙니다"였다. 책이 나온 것으로도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판인데 그 책을 누구에게 읽어보라고 20권도 넘게 내민단 말인가.

다른 하나는 "혹시 매체에 서평을 써줄 만한 분 계시면 말씀해 달라"고 했다. 이름과 주소를 말해주면 그쪽으로 책을 보낸다는 거였다. 그에 대한 나의 답변 역시 두 번 생각해볼 것도 없이 "아이고 아닙니다"였다. 서평을 부탁한다는 것은 결국 칭찬해 달라는 얘기밖에 안 되는데 내 입으로 나를 칭찬해 달라는 말을 누구에게 한단 말인가.

그런데 전화를 끊고 한참 뒤에 생각해보니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짧아도 너무 짧았다. 출판사 재정까지 걱정하는 내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서는 안 되었을 것 같다. 설령 그런 소리를 한다 해도 그렇게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투로 대뜸 "아닙니다"하고 말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누구에게 이 책을 봐 달라고 보낸다거나 서평을 써 달라고 부탁할 용기는 없다. 혹시 모르겠다. 지역신문 편집국으로 두어 권 들고 가볼 수는 있을지.

그나저나 궁금하다. 책이 어떻게 나왔을지. 표지는 두 개의 시안 가운데 어떤 것을 얼마나 수정해서 썼는지, 본문 내용은 에디터가 몇 줄 손보겠다고 했는데 어디를 얼마나 손보았는지 겁나게 궁금하다. 책이 하필 토요일에 나올 건 또 뭐람, 하는 꿍시렁 소리가 입에 주렁주렁 열려 있을 정도로 궁금하다. 그리고 또 궁금하다. 어머니가 이 책을 좋아하실까?


태그:#책, #출판, #어머니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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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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