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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꿍이가 산청 외가 가는 날이다. 아이는 어떻게 목적지를 눈치 챘는지 운전석 뒷자리에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평소에는 1~2시간 정도 묶여 있으면 징징대는 게 보통이건만, 노래 소리에 장단 맞춰 발을 까닥이기까지 하는 녀석.

그래, 많은 이들에게 외가는 참으로 편하고 정겨운 곳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나를 반겨주시며 이모, 외삼촌이 기꺼이 나와 놀아주는 외가.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가까운 친척이 누구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이모, 외삼촌 순으로 대답했다고 한다. 언론은 이를 들어 우리 사회가 점점 부계사회에서 모계사회로 변화하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어쨌든 분명한 건 친가보다는 외가 쪽이 좀 더 편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까꿍이의 외가, 나의 처가, 아내의 친정
▲ 산청 외갓집 까꿍이의 외가, 나의 처가, 아내의 친정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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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 이유를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결국 아이 엄마의 컨디션 문제였다. 즉,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고는 하지만 엄마가 며느리로서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눈치를 봐야하는 친가와, 딸로서 당장 편히 눕고 시작하는 친정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아이의 입장에선 당장 엄마가 같은 소리를 하더라도 좀 더 부드럽게 나오는 외가가 친가보다 더 편할 수밖에.

그러고 보니 내가 어렸을 적 외가에 갔을 때에도 나를 데리고 영주 서천교에 데리고 가던 이는 항상 이모 아니면 외삼촌이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친정에 왔노라며 외할머니와 담소를 나누고 계셨고 나는 이모, 외삼촌을 앞세우고 다른 사촌들과 함께 영주 서천에 나가 물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든 게 마냥 재미있고, 웃기던 그 시절.

게다가 내가 외가를 마냥 정겹게 추억하는 건 외가가 바로 경북 영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시골 깡촌은 아니었지만, 친가가 자리한 서울에 비해서는 분명히 시골이었던 영주. 청량리역에서부터 약 4시간 기차를 타고 가야지만 등장하는 영주는 그 지루하고 길었던 시간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차가운 대도시와 달리 시골의 인정이 있었고, 훼손되지 않은 자연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나의 외가를 떠올려 본다면, 우리 까꿍이 역시 적지 않은 복을 타고 태어났음이 분명하다. 요즘 시절에 외가를 시골에 두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리산 밑 산청. 그 어떤 고장보다도 산이 높고 물이 맑은 청정의 지역 아니던가. 아마 까꿍이도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게 된다면 산청 외가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대도시에 태어난 아이에게 외가는 하나의 유토피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 드디어 산청. 까꿍아 잘 봐라. 너의 외가 산청에 도착했단다.

까꿍이의 외가

꽃봉산에서 바라본 이른 봄의 산청
▲ 산청읍내 꽃봉산에서 바라본 이른 봄의 산청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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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게이트를 나와 산청읍내로 들어섰다. 언제나 그렇듯이 한산한 읍내. 그러나 읍내에서 처갓집 내리로 향하는 경호강 강변길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름이야 경호강 래프팅 때문에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편이지만, 이 따스한 봄날, 저들은 무슨 인파람?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그들은 이번에 지정되었다는, 산청읍 경호강변이 포함된 지리산 둘레길 산청2구간을 걷는 이들이었다. 아내는 감회가 새로운 듯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 집에서부터 읍내 학교까지 걸어가야 했다던 그 길. 지금이야 도로가 닦여져 그리 멀지 않지만, 당시에는 공동묘지를 지나고, 비가 많이 오면 다리가 끊기기도 했었던 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길이 오히려 관광수단이 되었다니, 상전벽해의 현실.

경호강 내리교를 건너 언덕배기를 조금 올라 도착한 처가. 아내가 항상 이야기 하던 그 목련들이 대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항상 봄만 되면 고향집 목련 이야기를 하면서 어렸을 때를 그리워하던 아내. 마당의 탐스럽게 피어있는 목련을 보고 있자니 아내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도시 촌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감성이었다. 까꿍아, 너도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많이 봐서 심성이 착한 아이가 되면 참 좋겠구나.

까꿍이에게 아름답게 기억될 외갓집
▲ 외갓집 입구 까꿍이에게 아름답게 기억될 외갓집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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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느는 그녀의 애교
▲ 까꿍이의 배꼽인사 갈수록 느는 그녀의 애교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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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손주를 보신 장인, 장모님은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고된 농사일로 피곤하신 두 분께 까꿍이는 청량제 그 이상이었다. 나날이 크는 까꿍이도 저번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두 분 앞에서 두 눈을 찡긋찡긋 거리며,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어 하트를 만들며, 할 수 있는 만큼의 애교를 다 부렸다.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누가 자기 편인지, 누가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지 아는 까꿍이. 덕분에 녀석은 가끔 나와 아내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혼낸다 싶으면 쪼르르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로 도망가 버렸는데, 저러면 버릇이 나빠질까 걱정이 되다가도 그래 언제, 네가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나 싶어 놔둘 뿐이었다.

별도 잘 보이는 하늘
▲ 산청의 가을 별도 잘 보이는 하늘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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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도시화, 산업화, 핵가족화 되어 있는 이 시대에 가장 모자란 것은 조부모의 사랑일 것이다. 내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배제된 채, 마냥 예뻐하기만 하면 되는 조건 없는 사랑. 그런 관계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아가야, 이렇게 외가에 내려와 있을 때 좀 더 느껴보렴.

따뜻한 봄볕이 툇마루를 비추고 아이는 창밖의 잔디밭을 멍하니 쳐다봤다. 역시나 밖에 나가 상쾌한 바람을 쐬고 싶어 하는 아이. 문제는 방사능이었다. 이곳은 산청. 어쨌든 서울보다는 일본과 가까운 곳인데 방사능의 영향이 없을까. 보도를 보아하니 요즘 방사능 물질이 섞인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하던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녀석을 실내에만 두겠는가. 아이를 데리고 축사에 갔다. 전에는 소와 그 앞을 지키는 개를 봐도 그냥 무덤덤하던 까꿍이는 이제는 뭔가 알게 되었는지 짖어대는 개와 울어대는 소를 보더니 기겁하며 내 품에 안겨 떨어지지 않았다. 녀석아 이 역시 네가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풍경이니 실컷 본 다음, 무의식 속에라도 저장해 놓아라. 네 인성이 만들어지면서 언젠가는 큰 도움을 받을 장면일 게다. 네가 먹는 쇠고기는 그냥 생산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농부에 의해 정성껏 길러지는 것이란다.

처가의 봄

따뜻한 봄볕의 평화로운 처가. 그러나 사위된 입장으로 장모님이 차려주시는 밥상만 받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우리 처가는 농가였고, 작년에 교직을 놓으신 장모님도 장인어른을 도와 농사일을 하시는데, 사위라는 이가 마냥 한가하게 봄꽃을 즐길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밥을 먹었으면 밥값을 하는 게 도리일 터.

따라서 나는 장인, 장모님을 따라 농사일을 돕겠다며 소매를 걷고 나섰다. 소 사료 주는 것 외에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

태양광에 직접 말리는 표고버섯
▲ 건표고 만드는 중 태양광에 직접 말리는 표고버섯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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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처가는 요즘 버섯농사 일이 한창이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표고버섯을 재배하고 계셨는데, 4~5년에 한 번씩 가는 참나무를 교체하시는 중이었다. 6000그루나 되는 참나무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하나하나씩 종균을 박아 넣는, 그야말로 단순하되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일.

문제는 하루 종일 서서 꼼지락꼼지락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터, 일을 하던 인부들도 자주 그 자리를 비운다는 점이었다. 특히 주말 같은 경우는 결석률이 높다 하니 사위가 가서 그 일을 도우면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나도 처가에서 버섯을 매번 얻어먹고, 연말에는 직접 지인들에게 버섯을 팔고 있으니 이번에 버섯농사를 도우면 비로소 면도 서고, 판매할 때 할 말도 생기지 않겠는가. 나도 직접 도운 바 있는, 절대 안심할 수 있는 국내산 표고버섯!

결코 쉽지 않은 버섯농사
▲ 처갓집의 버섯농장 결코 쉽지 않은 버섯농사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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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 안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버섯 종균을 박아 넣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탓에 허리도 아팠지만, 그보다 종균을 작은 구멍 안에 쑤셔 넣은 뒤 손가락으로 꾹 눌러 고정시키는 탓에 일이 끝나고 나면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보통 하루에 한 사람이 2만 개 정도 종균을 박는다 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겨우 이틀 도와드렸을 뿐이지만 세삼 농업의 고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하더라도 공판장에 내다파는 것과 직판매하는 것이 3배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하니, 도대체 중간 유통과정에서 업자들이 얼마나 남겨먹는 것인가. 요즘 서울의 작은 마트에 가서 표고버섯을 살라고 하면 그렇게 비싸다는데.

결국 귀농하여 농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직판매를 어떻게 뚫을 것이냐, 유통과정을 얼마나 단축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 될 것이다. 나 역시도 아버님, 어머님의 버섯 판매를 직접적으로 도와야 한다면 직판매 경로를 한 번 알아봐야 할 테지.

신성한 육체노동
▲ 버섯사 일 신성한 육체노동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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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버섯사에서 일을 하고 있자니 머리를 써서 사는 인텔리는 육체적 생산기술을 취미로라도 가져야만 한다던 리영희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균형 있게 발달시키기 위해서, 육체노동에 대한 괜한 우월감이나 육체노동자를 멸시하는 나쁜 심리와 사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육체적 생산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그분의 말씀은 책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며 자본을 논하는 우리 시대가 꼭 상기해야 할 구절일 것이다.

이틀 밖에 되지 않았던 산청 처가에서의 봄. 까꿍아, 다다음주 진주에서의 결혼식 때문에 우리는 또 산청에 들를 터이니 그때가지 더 많은 애교를 연습해 보자꾸나.


태그:#외갓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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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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