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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름 쌍용차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치며 정권과 자본의 포위망 속에서 절박한 싸움을 벌였다. 77일 간의 공장점거 투쟁 후 더 많은 노동자들이 사회적 살인에 내몰려 죽어가고 있다.
 2009년 여름 쌍용차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치며 정권과 자본의 포위망 속에서 절박한 싸움을 벌였다. 77일 간의 공장점거 투쟁 후 더 많은 노동자들이 사회적 살인에 내몰려 죽어가고 있다.
ⓒ 노동과세계 이명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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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긴장감이 없다'는 것을 아는가. 높은 곳에서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가슴이 내려앉는 것이 사람이다. 조금이라도 더 잘 살고 싶은 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본능이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죽음은 항상 너무 가까이에 있다. 2009년 4월 쌍용차 구조조정에 이은 파업 사태 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돌연사한 노동자와 가족이 14명에 이른다. 사망자가 더 늘어난다 해도 무덤덤해질 만큼 아주 많은 사람이 떠났다. 죽음은 일상이 됐다.

쓰러지는 사람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평택으로 달려간 이는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48) 마인드프리즘 대표. 지난 3월 26일부터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시작한 그는 "너무 늦게 와 미안하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논현동의 마인드프리즘 사무실에서 정혜신씨를 만나 4주차에 접어든 치유 프로그램과 그로 인해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들어봤다. 

'쌍용'이라는 고통, 마음 깊숙이에서 꺼내기 힘들어

매주 토요일마다 8주간 진행되는 치유 프로그램의 첫 날. 40명 가량의 해고 노동자와 가족이 모였다. 이례적으로 많이 모였다는 인원이 그 정도다. 그동안은 아프니까 서로 건드리지 않았다. 어쩌다 만나면 "힘들지?"라는 말 대신 "잘 지내지?"라는 말로 에둘렀다. 쌍용 사태를 떠올리기조차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어느 노동자의 부인이 자기도 모르게 남편 넥타이로 자기 목을 조르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또 한 사람은 자살하는 꿈을 꾸고 나서 남편과 부둥켜안고 울었답니다. 사람들의 사연을 묵묵히 듣던 한 부인은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고 말하더군요. 사태 이후 2년 가까이 매일 보면서도 서로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거죠."

정혜신씨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느낌이 집단적으로 농후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나도 모르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굉장히 심각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치료가 시급함을 사람들에게 알렸고 노동자와 부인들 각 6명씩 12명의 지원자가 모였다. 정혜신씨는 두 그룹을 대상으로 2시간 반씩 집단상담을 실시했다. 외과 의사가 상처 부위를 째고 고통의 원인을 끄집어내고 다시 봉하듯이 마음의 치료를 시작한 것이다.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다"... 가해자가 존재하는 병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차지부 창원지회는 지난 12월 1일부터 쌍용자동차 창원공장 앞에 천막을 치고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차지부 창원지회는 지난 12월 1일부터 쌍용자동차 창원공장 앞에 천막을 치고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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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무급휴직, 희망퇴직의 형태로 회사에서 떠나게 된 2646명의 쌍용차 노동자들은 생계가 어려워졌고, 빚더미에 올라앉았으며, 가족과의 갈등을 겪었다. 생존을 위해 회사와 싸워야 했지만 공권력으로부터 진압을 당했고 범죄자가 됐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로 내몰리는 현실, 게다가 치료까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충분히 비참했다.

정혜신씨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당신들이 겪고 있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알리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이 겪고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일반 우울증과는 달라요. 전쟁터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강간을 당하는 등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아무리 정신적으로 굳건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망가질 수밖에 없는 병이죠. 당신들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명백히 가해자가 있는 병이라는 개념부터 설명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원인은 2차 외상 후 스트레스. 1차 스트레스에서 얻은 상처를 힘들게 꺼내보였을 때 주위에서 보이는 부정적인 반응은 결정적으로 사람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증상은 상황이 종결돼도 점점 퍼져나간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경우 "해고됐다고 죽느냐"는 냉소적인 시선과 '폭력적인 파업'의 낙인이 계속해서 상처 위에 상처를 내고 있는 셈이다. 

아프지만 상처와 직면하는 것이 치유의 길

지금까지 노동자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회사 정문, 보신각, 국회 앞에서 계속 시위하고 있지만 바로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정혜신씨는 노동자들에게 일 주일 중 하루는 가족과 시간을 보낼 것을 권유했다. 가족과의 하루는 자신들의 삶에 시간을 할애해 현실을 오롯이 인식하게 만드는 치료 방법이다.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사과를 받는 과정에서 치유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투쟁이라는 정체성은 존중해 줘야 해요. 다만 투쟁하는 날 중 하루라도 자신의 삶을 입체적으로 보라는 것이죠. 나와 내 가족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은 수 년이 지나도 고통 받았던 시점에 머물러 있어요. 레코드판이 튀듯이 그 부분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는 거죠."

아픈 현실에 직면해야 하는 것은 웬만큼 심장이 단단해진 어른들만의 몫이 아니다. 고인이 된 한 조합원의 중학생 딸(15)과 고등학생 아들(18)은 아버지를 잃기 전 어머니까지 떠나보냈다.

이들에게 손을 내민 것은 가수 박혜경씨(37). 그는 지난 3월 초부터 아이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상처를 지닌 아이들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무슨 말은 하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정혜신씨는 남매가 장례식장에서 씩 웃더라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이 같은 행동은 "현실을 알면서도 부정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인드프리즘 대표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 박사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집단 상담을 맡고 있다.
 마인드프리즘 대표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 박사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집단 상담을 맡고 있다.
ⓒ 마인드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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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에게는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보다는 친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언니나 누나가 더 필요해요. 그런 점에서 남매에게는 저보다 혜경씨가 더 적절하죠. 하지만 가깝게 지내는 사람에게까지 자신이 가장 힘든 이야기를 하지 못하면 세상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게 되요.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힘든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박혜경씨는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돕기 위한 '레몬트리 공작단'을 결성해 토요일마다 쌍용차 노동자의 자녀들을 돌봐주고 있다. 그저 즐겁게 노는 것뿐이지만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이야기를 하면서 상처를 치유한다. 덕분에 부모들도 마음 편히 집단 상담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정혜신씨는 아이들을 돕는 박혜경씨를 도와주기로 했다.

"남을 돕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필요해요. 에너자이저라서 누굴 도와주는 게 아니거든요. 이 사람들을 다독여야 도움도 지속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혜경씨와 레몬트리 공작단에게 정말 많이 고마워요. 내가 그랬어요. 밥을 먹어서 사람이지, 저건 천사라고."

가장 큰 희망 "다시 일하고 싶습니다"

곪았던 부위가 꾸덕꾸덕해지고 딱지가 앉아 새살이 돋는 과정이 보이면 좋으련만, 마음속의 상처는 눈에 띄게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변화는 있다. 정혜신씨에 의하면, 치유 프로그램 4주차에 이르러 노동자들은 조금씩 안정을 찾고 있다고 한다. 주말에는 집단 상담이나 레몬트리 공작단과의 놀이 외에도 농장에서 흙을 만지며 치유의 느낌을 만끽한다.

지난 3월 10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열린 쌍용차 사태 해결을 위한 인권·법률단체 기자회견에서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실장이 눈물을 흘리며 발언하고 있다.
 지난 3월 10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열린 쌍용차 사태 해결을 위한 인권·법률단체 기자회견에서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실장이 눈물을 흘리며 발언하고 있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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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노동자 중 거의 유일하게 트위터를 사용하는 이창근 쌍용차지부 기획실장은 15일 '모처럼 즐거운 동영상'을 올렸다. 고 임무창씨의 49재를 준비하며 조합원들과 모여 자장면을 먹는 장면이다. 49재를 알리는 트윗의 문구는 "죽음아 굿바이'. 정혜신씨는 이 같은 변화가 상담을 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쌍용차 사태가 희망적으로 정상화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09년 노사정이 합의한 무급휴직자의 복직과 노조원들에 대한 손배가압류 철회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12일에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이 쌍용차 사태 등 노사문제 해결을 위한 진상조사단 구성과 노사 청문회 개최를 촉구했지만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무엇을 향해 걸어 나가야 할까. 이들의 가장 큰 희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혜신씨는 "재취업이겠죠"라는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목이 멨다.

"어떤 부인이 '아이가 학교에 제출하기 위해 아빠 직업을 쓰면서 머뭇거려서 아빠 회사 다시 들어가실 거라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이들은 현재 복직 외에 다른 대안을 가질 수 없어요. 하지만 심리적으로 안정되면 현실적으로, 합리적으로 상황을 봐야 해요. 혹여 지금 희망하는 것들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살아가야 하는 것을."

8주간의 치유 프로그램이 끝나면 보고서가 한 권 나올 예정이다. 정신건강 실태조사 보고서가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의 우울증 수치를 계량적으로 보여줬다면, 정혜신씨의 보고서는 그들의 숨결을 담은 보고서가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쌍용차 노동자들을 위한 후원계좌와 레몬트리 공작단의 후원계좌가 따로 있습니다. 문의사항이 있으신 분은 정혜신씨 트위터(@mindjj)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태그:#쌍용차, #정혜신, #박혜경, #레몬트리 공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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