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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장터의 이른 아침은 한낮에 손님들로 북적이던 때와는 달리 차분한 시골장터 분위기가 난다. 어디선가 목청 큰 닭이 소리높여 아침을 알려오고 상인들도 하나 둘씩 나와 가게를 열고 달그락 소리를 내며 손님을 맞이할 준비들을 하고 있다. 대장간 아저씨는 벌써 출근했는지 화덕을 벌겋게 달구어 놓고 작품을 구상하듯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계시다.   

화장실에 갔다가 어제 저녁 못난이 분장을 하고 구성진 뽕짝 메들리에 맞춰 품바춤을 추며 손님들을 끌던 노점상 아저씨와 마주쳤다. 장터에서와 달리 그의 까칠한 맨얼굴은 너무 표정이 없어 괜히 내가 어색해진다. 섬진강에 놀러 왔다가 인간에게 잡혀와 수족관에 갇혀있는 은어들의 비늘이 아침 햇살을 받아 정말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산두릅· 더덕· 산마· 고로쇠물 등 먹으면 불로장생할 것 같은 산초들이 장터에 지천이다.

 

벚꽃축제는 취소되었다지만...

 

이른 아침 차량들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십리 벚꽃길을 보기 위해 아침밥도 거르고 나섰다.

홀로 자전거를 타고 벚꽃 터널속을 유유히 걷듯이 달려가는 동네 아저씨의 뒷모습이 몹시 여유로워 보인다. 다양하기도한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벚꽃나무 어딘가에서 들려온다. 하늘도 가릴듯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과 아름다운 새소리에 취해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나도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구제역으로 말미암아 하동 십리 벚꽃 축제는 취소되었지만 그건 인간의 축제일 뿐, 벚꽃나무들은 치렁치렁한 가지마다 예쁜 벚꽃들로 치장하며 자연이 주최한 화려한 봄축제를 펼쳐 보이고 있다. 큰 트럭이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쳐 갈 때마다 벚꽃나무에서 떨어진 잎들이 하늘하늘 날리면서 꽃비가 되어 머리로, 손등 위로 착륙을 한다. 꽃비는 길 위를 예쁜 융단으로 꾸미기도 하고, 내가 쓴 헬맷 사이 머리카락에 들어와 숨어 있다가 나중에 헬맷을 벗었을 때 깜짝 놀라게 하는 기쁨을 주기도 한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어디에선가 나타나 벚꽃길에 동행한다. 알고 보니 십리 벚꽃길 가운데에 있는 화개(花開) 중학교에 등교하는 아이들. 일주일 남짓이지만 이런 멋진 풍경 사이로 등하교를 하니 너희들은 참 좋겠다. 이맘때의 십리 벚꽃길은 나중에 어른이 되서도 평생 마음을 풍성하게 해줄 고향의 잊지 못할 좋은 추억과 그림이 될 것이다.

 

교내 방송을 하는지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선생님의 사무적인 목소리마저 친근하게 들려온다. 눈에 익은 진한 녹색의 청소차가 천천히 자전거를 추월하더니 길가에 쌓아놓은 쓰레기 봉지를 부지런히 치우며 달려가고, 키만큼 길쭉한 삼각대 다리를 들고 다니는 사진가들이 오래된 벚꽃나무 아래에 서서 심각하게 카메라 렌즈를 들여다 보고 있다.

 

하동엔 녹차밭 외에 민들레 차밭도 있다

 

벚꽃은 그 화려한 외모에 비해 향기가 없는 특이한 꽃나무다.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 벚꽃을 볼 때마다 그런 자연의 섭리가 궁금하다. 쌍계사가는 십리 벚꽃길에선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벚꽃향이 났다면 이 벚꽃터널 속에서 향기에 취해 쓰러질 것 같기도 해서다. 화려하게 수놓은 벚꽃들을 구경하며 가다보니 십리의 거리가 십미터로 느껴질 정도로 어느새 쌍계사에 다왔다. 

 

구례읍 오일장에 가기 위해 다시 화개 장터로 돌아가는 길, 그 사이 관광객을 실은 버스들과 자가용들이 길 위에 가득하다. 다른 길 같았으면 정체로 인해 짜증이 났겠지만 오히려 천천히 가서 꽃구경하기 좋아서인지 다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기도 하며 즐거운 표정이다. 자전거 탄 내게도 뒤에서 빵빵거리며 비키라고 빨리가라고 채근하지 않는다.

 

녹차밭 하면 하동이 연상될 정도로 벚꽃나무 너머로 아직은 덜 익어 짙은 갈색을 띤 다원이라고 불리는 녹차밭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지금은 벚꽃이 주인공이나 한 달 후면 푸르디 푸른 녹차밭의 세상이 될 것이다. 오월의 짙푸른 절정을 기다리며 봄햇살 아래 익어가고 있다.
 
노랑 꽃잎들이 밭에 길게 심어져 있길래 눈여겨 보았더니 특이하게도 민들레 밭을 다 보게 되었다. 노랑 민들레가 심어져 있는 밭에서 아낙네 두 분이 민들레꽃을 따고 있다. 보기 드문 풍경에 다가가 물어보니 민들레 꽃을 삶고 잘 말려 민들레 차를 만든다고 한다니 이채롭기도 하다. 수북히 쌓아놓은 노랑 민들레꽃들이 참 예쁘기도 하고 향도 좋다.
 
벚꽃 길가의 어느 모텔에 차들이 들어차 있다. 다른 곳 같았으면 이 좋은 봄날 방구석에서 모하나 했을텐데, 꽃들의 절정인 이즈음 사람에게도 자연히 생겨나는 춘정과 춘심이 이해되기도 하는 곳이 십리 벚꽃길이다.
 
어제 달려왔던 섬진강변 861번 국도의 반대편인 19번 국도길을 달려 오일장이 열린다는 구례읍으로 향한다. 10여킬로미터에 걸쳐서 길 양옆으로 벚꽃 나무가 멋지게 도열한 861번 국도와 달리 이 차길은 섬진강의 푸근하고 수수한 강변의 정취를 보여주는 길이다. 강가의 수풀 사이에 하얀 백로가 먹잇감을 찾아 날아다니는 모습이 한갓지고 멋스럽다.    

 

푸릇푸릇한 게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들판과 논밭에 앉아 일하는 아낙네들, 울음소리 귀여운 까만 염소들과 눈을 맞추고 이름도 정겨운 마을 파도리를 지나니 귀여운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어놀고 있는 토지 초등학교가 반긴다. 괜히 친근하게 말붙였다가 호기심으로 벌떼처럼 달려드는 아이들을 피해 자전거 페달을 냅다 밟아 도망을 치기도 했다.

 

치과의사가 꿈이라고 말하는 부모님의 꿈임이 분명한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6학년 아이, 내 자전거를 여기저기 만지며 어디서 왔냐, 몇 살이냐, 뭐하는 사람이냐며 질문을 계속 하던 맹랑한 꼬마녀석, 학교 앞에 우리집에서 하는 ㅇㅇ식당이 있으니 거기 가라고 권하던 부모님 생각을 하는 착한 여자 아이와 그 앞에서 대답하기 바쁜 나를 보며 친근하게 웃어주던 선생님도 떠오른다.    

 

동네를 활기차게 해주는 오일장

 

구례 오일장은 지리산 일대에서 봄소식이 가장 빠른 곳으로 부근에서는 가장 큰 장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동사람, 순천사람들도 구례 오일장에 와서 장을 본단다. 동네에 있는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자란 특산물들이 넘실대는 곳이니 그럴 만하겠다. 다른 지역의 오일장처럼 버스터미널 가까이에서부터 차도와 인도를 걸쳐서 동네 한가운데까지 장터가 넓게 펼쳐져 있다. 영호남 물물교류의 장이었다는 오일장답게 생선, 건어물, 곡식, 과일, 옹기 그릇, 정육점, 대장간 등 없는 것이 없다. 

 

오일장날 (매 3일, 8일)이라서 그런지 동네 분위기가 활기차서 좋다. 쉴새없이 벨트가 돌아가며 먹거리를 만들어 내는 방앗간과 수수한 삼천리 자전거 가게가 반갑고, 시내 버스 정류장에 일렬로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들이 귀엽게 느껴진다. 장날에 만나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구성진 사투리를 옆에 서서 몰래 들어보는 것도 재미지다.

 

쉴새없이 쌀을 찧으며 떡을 만들고 있는 방앗간의 기계 소리도 정겹고, 뚝딱뚝딱 쇠를 녹이고 자르더니 금세 주문한 농기구를 만들어내는 철공소 아저씨의 작업은 멋진 퍼포먼스를 보는 듯하다. 일본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겐조가 작품의 영감을 얻어 갔을 것 같은 화려한 무늬의 자켓과 색색깔의 몸뻬 바지들이 쭉 늘어서 있는게 패션쇼 현장에 온 것 같다.  

소소하게 나물과 채소 몇 가지를 팔러 나오신 할머니들이 장터 길바닥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며 따가운 봄 햇살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기도 하다. 봄철에 맞게 이름을 일일이 물어보기도 미안한 수많은 나물들이 있는 가운데 평소 비빔밥에 넣어 먹어보고 싶었던 달래와 돌나물을 한봉지 집어 들고 장터에 오면 필수인 국밥집으로 향한다.

 

봄과 여인은 통하는게 있어서인지 지자체에서 하는 '지리산녀' 뽑기 대회가 다 있다. 오일장은 물론 거리의 플래카드에 써있는 지리산 남악제, 구례 군민 노래자랑도 보고 싶고, 가까운 화엄사의 봄은 어떨까 무척 궁금해지는 섬진강변 동네 구례의 봄날이다.   

 

 

덧붙이는 글 | 4월 13일 수요일에 다녀 왔습니다.
이번 주말에 이곳은 멋진 꽃비가 흩날리는 벚꽃길이 될 것 같네요.  


태그:#자전거여행, #화개, #하동, #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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