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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먹먹하다. 카이스트(KAIST) 대학생 4명의 연이은 자살 소식 때문이다. 올해 들어 불과 100일 새 벌어진 일이다. 봄은 긴 겨울을 이겨내고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하지만, 카이스트의 청춘들은 미처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지고 말았다.

관련 기사들에 따르면,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자살은 '무한경쟁'으로 내몰린 압박감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학점에 따라 수업료를 차등 부과하는 징벌적 등록금 제도, 한 번의 실수도 인정하지 않는 재수강 불허 제도, 모든 수업을 영어로 강의하는 제도 등이 학생들의 목을 조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대학진학이라는 경쟁을 딛고 살아남아 국내 최고 수준의 이공계 대학인 카이스트에 기쁘게 입학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입시와는 사뭇 차원이 다른 무한경쟁 앞에 그들은 안타깝게 쓰러지고 말았다.

집 앞마당의 앵두나무. 오른쪽 가지에는 꽃망울이 많이 맺혔지만, 왼쪽 가지는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직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러나 앵두나무는 더디더라도 온 가지에 꽃을 피운다. 진정한 경쟁이란 느려도 함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 아닐까?
 집 앞마당의 앵두나무. 오른쪽 가지에는 꽃망울이 많이 맺혔지만, 왼쪽 가지는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직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러나 앵두나무는 더디더라도 온 가지에 꽃을 피운다. 진정한 경쟁이란 느려도 함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 아닐까?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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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봄, 숱하게 몸을 불사른 대학생들

오래 전, 죽음에 대한 기억은 끔찍한 파편처럼 머리가 아닌 내 가슴에 깊숙이 박혀 있다. 정확히 20년 전인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의 곤봉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입생이던 강경대 학생은 등록금 투쟁으로 대변되는 학원자주화투쟁과 총학생회장 연행에 대한 항의시위 도중 공권력의 폭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강경대 학생의 죽음은 전국의 대학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대학생들의 투쟁은 교내의 등록금 투쟁에서 벗어났다. 폭력살인을 저지른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는 교외의 투쟁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 분신, 5월 1일 안동대생 김영균 분신, 5월 3일 경원대생 천세용 분신, 5월 10일 전남대생 윤용하 분신, 5월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 강경진압으로 사망 등 많은 대학생들이 정권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며 쓰러졌다. 이른바 '분신정국'이라 불린 1991년 봄의 일이다.

2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다름이 아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자살과 20년 전 대학생들의 분신은 여러 면에서 '실천하는 지성, 대학생'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0년 전 대학생들은 대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외쳤다. 등록금을 동결하라고 싸웠다. 부정과 부패, 비리로 얼룩진 노태우 군사정권을 규탄했다. 그리고 그 외침과 싸움, 규탄은 학교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대학생들이 시민들과 연대해 함께 목소리를 높이며 사회적 담론으로 만들었다. 수십 만의 인파가 전국의 거리를 가득 메우기도 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을 옹호하던 보수 세력들은 대학생들의 연이은 분신에 대해 '죽음을 배후 조정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몰아세웠다. 김지하 시인은 심지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하며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당시 대학생들의 죽음에는 '실천하는 지성'에 대한 뼈아픈 각성이 담겨 있었다. 혼자 회피하거나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부당함에 맞서자는 '도덕적 순결함'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적어도 김귀정 열사와 1991년의 봄을 함께 했던 나의 경험으로는 그렇다. 어떤 이유로든 죽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지만.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김귀정 열사의 장례식 장면(왼쪽)과 장을병 성균관대 총장의 모습(오른쪽)을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 잔인했던 1991년의 봄이었지만 선배와 동료, 후배를 챙기는 대학생들과 제자를 걱정하는 총장이 있어 다행이었다.
 김귀정 열사의 장례식 장면(왼쪽)과 장을병 성균관대 총장의 모습(오른쪽)을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 잔인했던 1991년의 봄이었지만 선배와 동료, 후배를 챙기는 대학생들과 제자를 걱정하는 총장이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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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카이스트 대학생들은 홀로 조용히 자살했다. 카이스트의 학생들은 몇 년 전부터 학교 당국에 여러 차례 의견을 건넸다고 한다. 무한경쟁으로 요약되는 카이스트의 부당한 학사 정책에 대학생들이 함께 맞서 싸운 것이다. 그러나 서남표 총장으로 대표되는 대학 당국은 학생들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리고 연이어 자살이 일어난 것이다.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은 자살이 계속됐음에도 "이 세상 그 무엇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며 "경쟁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항상 이길 수는 없으며 나중에 이기기 위해 때로는 지금 질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서남표 총장의 이 발언을 들었을 때 나는 20년 전 성균관대 장을병 총장(2009년 7월 5일 작고 )을 떠올렸다. 김귀정 열사의 장례식을 진두지휘하던 총학생회장은 장을병 총장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총장님, 지금 나서시면 총장직 그만두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성대에는 40일 밖에 못한 총장도 있다. 지금 물러나도 꼴찌는 아니니까 괜찮다."

김귀정 열사는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범국민대회'에서 공권력에 의해 숨졌다. 그런데 정권을 규탄하며 거리에서 장례식을 진행하는 현장에 총장이 직접 나선 것이다. 장을병 총장은 경찰과 대화를 통해 학생들이 노제를 평화롭게 치르도록 도왔다. 장을병 총장은 1991년 5월 30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 최근 시국과 관련, 자연과학대 등에서 수업 거부를 결의하는데….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학사 일정은 정상적으로 진행될 것이며 자칫 시위 일정과 기말 시험이 겹쳐 많은 결시가 예상되는데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고민이다."

총장직에서 물러날 각오를 하면서 제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돌보고, 또 장례식과 시위 때문에 기말 시험을 거를지도 모를 제자들까지 생각하는 장을병 총장의 모습은 총장의 교육 철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한다. 제자들의 죽음 앞에서 무한경쟁 운운하는 서남표 총장과 비교하면 더더욱.

카이스트 "세상을 움직이는 최고의 과학기술대학"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설립 이념과 설립 배경, 건학 정신 등을 각각 지니고 있다. 이것들은 대학의 교육철학으로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몇몇 대학들이 홈페이지에서 내세우는 이념과 배경이다.

연세대 : "기독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진리와 자유의 정신에 따라 사회에 이바지할 지도자를 기르는 배움터이다. 연세인은 겨레와 인류의 문화유산을 이어받고 창의력과 비판력을 길러 학문의 발전을 이끌어간다. 또한 정의감과 기백을 드높이고 열린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인류의 번영에 이바지한다."

서울대 : ('상징' 설명) "월계관은 경기의 승리나 학문 등의 업적에서 명예와 영광을 상징하며, 으뜸가는 학문적 명예의 전당으로서의 서울대를 의미한다. 그리고 펜과 횃불은 지식의 탐구를 통하여 겨레의 길을 밝히는 데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펼쳐진 책에는 라틴어 'VERITAS LUX MEA'가 적혀 있는데, 이는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의미이다."

성균관대 : "인간의 존엄성을 토대로 자기 완성과 인류평화의 달성을 목표로 하는 수기치인의 유교정신을 건학 이념으로 하고 있다. 인격도야와 학문연마를 통하여 인륜대도를 밝히고 인류공동의 이념구현에 공헌할 수 있는 국가동량의 인재를 길러내는데 교육의 목표를 두고 있다."

이들 대학뿐 아니라 대부분의 대학들이 지향하는 바는 대체로 '참된 인간과 인류, 진리를 위한 학문 탐구'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번에는 "세계의 중심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최고의 과학기술대학"이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있는 카이스트의 건학 이념을 살펴보자.

카이스트의 설립 이념.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의 설립 이념이라고 하기에는 교육 철학의 빈곤이 느껴졌다.
 카이스트의 설립 이념.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의 설립 이념이라고 하기에는 교육 철학의 빈곤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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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고급 과학기술인력을 양성하고, 연구중심 대학의 모델을 제공키 위해 1971년에 설립되었다. 현재 카이스트는 성공적으로 세계 과학계의 존경 받는 일원이 되었다. 미래는 한국만이 아닌 세계과학계가 선망하는 대학 최초의 발명, 최상의 교육, 최고의 리더를 찾기 위해 세계가 눈을 돌리는 최고 수준의 대학이 되어야 한다."

앞서 살펴본 대학들의 건학 이념과는 달라도 매우 다르다. 어쩌면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불행은 교육의 목표를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고급 인력 양성'이라고 못 박은 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입학과 동시에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무한한 속도 경쟁에서 살아남는 고급 인력이 되도록 강요받았을 테니까.

법정스님 "모든 존재는 상호 간에 서로 의존하여 이루어진다"

지난해 입적하신 법정스님은 책 <일기일회(一期一會)>(모든 것은 한 번의 기회, 한 번의 만남이다)에서 경쟁 심리를 이렇게 비판했다.

"무엇을 위해 빠르게, 더 빠르게, 좀 더 빠르게 해야만 합니까?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 앞선다고 해서 더 행복합니까? 경쟁 심리에는 매우 비인간적이고 냉혹한 이기심이 작용합니다. 기업들은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전혀 옳지 않은 소리입니다. 이류, 삼류도 필요하며 또 얼마든지 살아남습니다. 일류란 불행한 것입니다. 더 올라갈 자리가 없습니다. 최고라는 것, 일류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은 '고급 인력 양성소'가 아니라 '실천하는 지성의 전당'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자살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대학생들이 함께 고민하고 서로를 보듬어야 하는 문제다. 바라건대 대학생들이 더 이상 죽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서로 어깨를 걸고 머리를 맞대며 사회와 대학의 부당함과 싸워서 이기길 응원한다.

"전체와 개체의 상관관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석가모니가 깨달은 가르침의 근본도 전체와 개체의 상관관계입니다. '연기법(緣起法)'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 이것은 불교의 기본 사상입니다. 어떤 것도 그 자체만으로 홀로 존재하지는 않으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상호 간에 서로 의존하여 이루어집니다." - 법정 스님 <일기일회>


태그:#카이스트, #서남표, #대학, #대학생, #장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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