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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독도. 출처는 2011년도 문화재청 달력.
 하늘에서 본 독도. 출처는 2011년도 문화재청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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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방의 '원폭'이 연이어 일본에서 날아왔다. 하나는 방사능 유출을 동반한 대지진에 관한 뉴스, 하나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교과서에 관한 뉴스.

서쪽에서 불어올 중국발 황사에 뒤질세라 동쪽에서 갑작스레 불어온 일본발 방사성 물질까지는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대지진으로 유출된 방사선을 두고 일본을 욕할 한국인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지진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성 따위는 하찮다는 듯, 교과서 문제를 통해 외교적 마찰을 불사하는 일본을 보면서 '정말 이웃이 될 수 있나?' 하는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일본은 한국과만 사이가 좋지 않은 게 아니다. 일본은 과거사·조어도·야스쿠니참배·동지나해 등을 놓고 거의 매년 중국과도 마찰을 일으킨다. 북한은 워낙 예측불허의 존재라 마음대로 건드리지는 못하지만, 과거사·납치자문제 등을 놓고 북한과도 거의 매년 갈등을 빚는다. 가히 전방위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은 동아시아 이웃들을 주기적으로 자극하고 있다.

제93대 총리인 하토야마 유키오(재임 2009.9~2010.6) 시절, 일본이 '아시아 중시 외교'로 돌아설 것 같은 장밋빛 환상이 잠시 조성된 적이 있다. 하지만, 일본은 얼마 안 있어 '아시아 경시 외교'의 본색을 드러냈다.

하긴, 미국의 핵우산이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구도 속에서 돈을 벌고 지위를 챙기는 일본이 '서구 중시'를 버리고 '아시아 중시'로 금세 돌아서리라 기대했던 것 자체가 너무 성급했다. 일본이 아시아 중시로 돌아서지 않는 것은 비단 이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엔 보다 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아시아보다는 서구를 중시할 때 일본의 이익이 극대화되었다는, 일종의 경험법칙에 대한 신뢰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독도는 일본 땅’ 교과서의 문부성 검정 통과를 보도하고 있는 3월 31일자 'TV 아사히' 기사. 제목은 “중학교 교과서 전체에 ‘죽도’ 기술, 한국은 항의”다.
 ‘독도는 일본 땅’ 교과서의 문부성 검정 통과를 보도하고 있는 3월 31일자 'TV 아사히' 기사. 제목은 “중학교 교과서 전체에 ‘죽도’ 기술, 한국은 항의”다.
ⓒ TV 아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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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백제의 멸망으로 한반도와의 유대가 단절된 이래, 일본은 언제나 동아시아의 변방에 불과했다. 전통적으로 대륙국가들은 일본과의 정치관계·무역관계를 가급적 기피했다. 실익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대륙국가들은 이따금씩 일본의 성장을 막고자 일본과 대마도에 대해 견제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공이나 조선 초기의 대마도 침공 등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일본은 남보다 먼저 서양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이 일찍이 16세기부터 서유럽과 접촉하고 19세기에 남보다 빨리 서양화를 택한 것은, 서양과 손을 잡지 않고서는 활로를 모색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일본이 일찌감치 그 길을 택한 것은 한국·중국보다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서양이 전면 충돌한 19세기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아시아보다는 서양을 선택한 일본의 판단이 적어도 일본 입장에서는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일본에 부와 지위를 안겨주고 일본의 국격을 업그레이드시켜 주었다.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중국이 일대 수모를 당한 제1차 아편전쟁(1840)을 목격한 일본은, 청나라보다 뒤늦기는 했지만 서양열강과 근대적 외교관계를 맺는 데 적극성을 보였다. 1857년 현재, 청나라와 수교한 서양국가는 6개국인 데 비해 일본이 수교한 서양국가는 없었다. 하지만, 1858년에 일본이 미국·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 수교한 이래, 불과 10여 년 만에 상황은 역전됐다.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0년, 청나라의 수교국은 13개인 데 비해 일본의 수교국은 15개였다.

일본은 단순히 서양과의 수교관계를 늘리는 데만 치중한 게 아니라, 그들과의 협조노선을 유지하고 그들의 동아시아 전략에 편승하여 국익을 챙기는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이 1870년대에 대만 침공(1874), 운양호 사건(1875), 오키나와 합병(1879) 합병 등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양과 협조하고 그들에게 적극 편승한 덕분이었다.

1862년 외교사절 자격으로 유럽을 순방하던 중에 독일에 들른 후쿠자와 유키치. 출처는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일본어판.
 1862년 외교사절 자격으로 유럽을 순방하던 중에 독일에 들른 후쿠자와 유키치. 출처는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일본어판.
ⓒ 저작권 보호기간 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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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일본의 대외관계에서 금과옥조 같은 역할을 한 기본지침이 있었다. 일본 근대화의 선각자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脫亞論)이 그것이다. 후쿠자와는 1885년 3월 16일자 일본 <시사신보>에 실린 논설에서 "문명개화에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아시아로부터 이탈하여 서양의 문명국들과 진퇴를 함께하자"고 역설했다.

이 논설의 결론 부분에서 그는 조선·중국 등을 악우(惡友) 즉 나쁜 친구로 규정한 뒤, '아시아의 나쁜 친구들을 사절하자'고 강조했다. 아시아(亞)에서 벗어나(脫) 서구(歐)로 들어가자(入)는 탈아입구(脫亞入歐)가 그 주장의 핵심이었다.

일본은 탈아론을 철저히 지켜나갔다. 그들이 1894년 청일전쟁에서 아시아의 나쁜 친구 '청나라'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은 '서양의 좋은 친구들'인 영국·러시아·미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암묵적 지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청나라를 꺾고 동아시아의 맹주가 된 일본. 이제 일본은 단순히 서양과 협조하고 그들에게 편승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양과 대등한 제휴를 이룩하는 단계로 올라섰다. 청일전쟁에서 챙긴 '로또'그 밑천이 되었다. 청나라로부터 받은 대만·팽호열도뿐만 아니라 4년 반치 국가재정에 해당하는 전쟁배상금은 일본이 '좋은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영국·미국 등과의 제휴를 통해 동아시아 전략을 펼쳐나갔다.

청나라를 조선에서 몰아낸 뒤인 1896년부터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세력균형을 이룬 일본은, 1898년에 러시아와 로젠-니시 협정을 체결해서 '한반도는 일본이, 만주는 러시아가 차지한다'는 약정을 맺고 러시아마저 조선에서 내보냄으로써 조선 강점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1902년, 당대 최강 영국과 제1차 영일동맹을 체결한 일본. 영국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두게 된 일본은 러일전쟁(1904)을 벌여 '만주는 러시아가 차지한다'는 약정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었다. 장차 만주를 침공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서양(러시아)과의 약속을 깨기 전에 또 다른 서양(영국)을 지원군으로 만들어놓는 일본의 치밀함이 낳은 결과였다. 이제 일본은 서양의 한쪽을 등에 업고 서양의 다른 쪽을 갖고 노는 단계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 지배를 확실히 하고자 서양과의 제휴관계를 한층 더 공고히 했다.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은 일본이 갖고, 필리핀은 미국이 갖는다'란 합의를 도출한 일본은, 같은 해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영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지지한다'는 상호보증을 체결했다.

일본은 서양열강 상호간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도 놓치지 않았다. 프랑스·영국·러시아·이탈리아 편에 가세한 일본은, 이들의 힘을 빌려 이들의 적인 독일이 중국에 대해 갖고 있던 권리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이것을 이른바 '21개 조항 요구 사건'이라 한다.

제1차 대전이 종결되면서 전승국 일본의 위상은 세계 정상급의 반열에 올랐다. 일본은 1920년 출범한 국제연맹에서 상임이사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21년 출범한 워싱턴체제에서 영국·미국·프랑스와 더불어 4대 주역이 되었다. 워싱턴체제는 요즘 말로 하면 세계를 지배하는 G4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서양에 편승하고 서양과 제휴한 일본은 이렇게 세계 최정상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는 일본. 출처는 고등학교 <세계사>.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는 일본. 출처는 고등학교 <세계사>.
ⓒ 금성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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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후 경제공황이 발생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는 데다 미국·중국에 대한 무역흑자가 격감되자, 서양에 대한 일본의 시선이 급격히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서양을 믿으면 잘될 줄 알았는데, 이건 또 뭔가?' 라는 식의 태도였다.

자신의 출세비결을 망각한 일본은 급기야 서양과의 제휴를 파기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독자노선을 선택했다. 일본이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은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자국을 지지해주던 서양열강이 비난을 퍼붓는데도 일본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으며, 국제연맹 탈퇴까지 불사하면서 이 노선을 고집했다.

일본의 독주노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37년에는 중국을 재차 공격했고(중일전쟁), 1940년에는 동남아를 상대로도 전쟁을 개시했으며, 1941년에는 급기야 미국까지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1945년 8월 히로시마·나카사키에 떨어진 2방의 원폭이 잘 설명해준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말을 듣지 않고 '좋은 친구'마저 건드린 일본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한 번 뜨끔한 경험을 한 뒤로, 일본은 지금까지도 서양(미국)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미국의 유럽 '대리점'인 영국, 중동 대리점인 이스라엘과 더불어, 일본은 동아시아 대리점으로서 미국과의 끈을 단단히 붙잡은 덕택에, 독일처럼 패전의 대가를 치르지도 않고 오히려 승승장구하면서 부와 지위를 챙겨왔다.

1945년 이후의 일본은 그 어느 때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충고를 잘 따르고 있다. 일본이 그간 나쁜 친구들(남북한·중국) 틈 속에 살면서도 이들의 감정 따위는 아랑곳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최고의 '좋은 친구'와 동맹을 맺었다는 자부심과 안도감 때문이었다.

1945년 9월 27일 맥아더 장군과 히로히토 일왕의 회견. 맥아더의 큰 키와 히로히토의 작은 키, 맥아더의 편한 복장과 히로히토의 정장 차림은 미·일 간 주종관계를 상징한다. 미국측의 의도적인 작품이었다. 출처는 <현대 일본의 역사>.
 1945년 9월 27일 맥아더 장군과 히로히토 일왕의 회견. 맥아더의 큰 키와 히로히토의 작은 키, 맥아더의 편한 복장과 히로히토의 정장 차림은 미·일 간 주종관계를 상징한다. 미국측의 의도적인 작품이었다. 출처는 <현대 일본의 역사>.
ⓒ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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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인들의 DNA에 입력되어 있는 '외교의 기억' 속에는 크게 3가지 정보가 내장되어 있다. 첫째, 가야·백제 멸망 이래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항상 고립되었다는 것. 둘째, 19세기 후반부터 서양에 편승하고 서양과 제휴한 덕에 일본이 한때는 세계 G4 반열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것. 셋째, 1931~1945년에 잠시 서양을 등졌더니, 일본이 얻은 것이라곤 원폭 2방뿐이었다는 것.

이처럼 지난날의 역사 속에서 동아시아 국가들과 일본 사이에는 좋은 추억이 별로 없다. 일본은 서양과의 관계에서만 좋은 추억을 쌓았을 뿐이다. 일본이 아시아 경시 외교를 견지하는 것은 이 같은 경험법칙에 근거한 것이다. 동아시아를 떠난 일본이 여태껏 돌아오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일본이 각종 이슈를 만들어 이웃나라들을 자극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를 한없이 방치할 수는 없다. '좋은 친구' 미국이 일본을 보호해줄 수 있는 날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없는 동아시아에서 남북한·중국과 일본만 '달랑' 남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동아시아 국가들과 일본은 서로를 인정하면서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웃나라들도 일본을 적극 포용해야 하고, 일본 역시 더 이상 이웃들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 없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따돌리지 않고 끌어안는 연습을 해야 하고, 일본은 미국 없는 동아시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동아시아 친구들과 친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난날의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동아시아와 일본의 공존의 역사를 이제부터 새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태그:#일본 교과서, #독도, #탈아론,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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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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