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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4일 오후 4시 45분]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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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누더기' 협정문이 됐다.

최근 번역 오류 등 논란을 빚은 한국과 유럽연합(EU) 사이의 자유무역협정(FTA)의 협정문 한글본에서 모두 207곳의 오류가 최종 발견됐다. 지난 22일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지적한 한EU FTA 한글본 번역 오류 160개보다 더 많은 숫자다.

외교통상부는 4일 이같은 한EU FTA 협정문 재검독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는 협정문에서 무더기 오류가 최종 확인된 만큼, 국회에 이미 제출됐던 비준동의안을 철회하기로 했다. 이어 새 협정문을 다시 국무회의에 상정한 후, 국회에 다시 제출할 예정이다.

작년 10월 국회에 제출됐던 한EU FTA 협정문은 지난 2월 번역 오류문제가 제기된 후, 같은 달 28일 다시 제출했었다.

하지만 또 다시 무더기 오류가 나오면서, 비준동의안을 다시 철회하게 됐고, 결국 '누더기 비준 동의안'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또 다시 고개숙인 김종훈, 침울한 표정으로 '송구'만 3번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회견장에 나선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40여 분 동안 진행된 회견 내내 그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이어 김 본부장은 이번 번역 오류 문제에 대해 "송구하다", "죄송하다",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고개를 숙였다.

김 본부장이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세 차례에 걸쳐 사과를 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동안 업무와 관련해 유감 표명도 잘하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진 그였다. 그 스스로 이날 회견에 앞서 이번 문제를 엄중히 인식하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이유는 한EU FTA 협정문 재검독 결과가 당초 예상보다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지난달 10일부터 30일까지 한EU FTA 한글본 전체에 대해 4번에 걸쳐 재검토 작업을 벌였다.

외교부의 발표 내용을 보면, 한글본 서비스 양허표에서 무려 111건이 나왔다. 품목별 원산지 규정에서 64건의 오류가 발견됐다. 특히 협정문 본문에서도 32건의 오류가 나왔다. 이를 모두 합하면 207건을 고쳐야 할 오류라는 것이다.

외교부는 그동안 번역 오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일부 조항의 지엽적인 문제 등으로 일관하면서 본문에선 오류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이날 검사 결과는 이같은 예상을 빗나갔다.

이날 회견에서 본문 오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묻자, 외교부 관계자는 "본문 내용 가운데서도 각 문장마다 조그만 부속서가 있는데, 그쪽에서 오류가 나왔다"면서 "협정문 본문 자체에선 (오류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역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한EU FTA 독소조항 꼽혀왔던 조항, 통째로 빼먹었다가 '정정' 수모

게다가 유형별로 내놓은 오류 사례를 보면, 한 나라의 국민 생활과 기업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제조약에 대한 정부의 허술한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예를 들어, 자회사인 'subsidiary'를 '현지법인'으로, '이식'이란 뜻인 'transplant'를 '수혈'로 번역해 놓은 경우도 있었다. 이같은 잘못된 번역만 128건에 달했다.

또 '공작기계'를 '공자기계'로, '광택재'를 '과아택재' 등 맞춤법 자체가 틀린 경우도 16건이나 됐다. 번역을 누락시킨 경우도 47건이었고, 있지도 않은 용어를 첨가시킨 경우도 12건이었다.

또 한EU FTA의 독소조항으로 꼽혀왔던 '래칫(역진방지) 조항'을 통째로 빼먹었던 내용도 새롭게 고쳤다. '래칫(ratchet)'이란 톱니바퀴에서 유래된 말로, 한쪽 방향으로만 회전하도록 돼 있으며 반대쪽으로 돌지 못하게 하는 장치다. 자유무역협정에선 협정 상대방에게 새로운 규제를 할 수 없도록 강제하는 조항이다.

이같은 조항은 사실상 국가의 공적기능을 약화시킬 우려가 크기 때문에 통상전문가들 사이에선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라고 비판해왔다. 그럼에도 김종훈 본부장은 "협정문 어디에도 그런 조항은 없다"고 변명해왔다.

하지만 지난달 22일 민변이 한글본 번역 오류를 발표하면서, 최혜국 대우 면제 목록(부속서 7-다)에서 래칫 조항의 핵심 문구인 '그 개정 직전에 존재하였던 바로서'(as it existed immediately before the amendment)를 통째로 빼먹었다고 주장했다.

외교부는 이날 재검독 결과를 발표하면서, 민변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해야 했다. 김 본부장은 통상 최고 책임자로서 사과했지만, 정부의 신뢰는 크게 떨어졌다.

누더기 협정문 불구, 4월 국회 처리 강행 입장 고수 논란

문제는 이처럼 한EU FTA 협정문이 누더기로 변질됐지만, 정부는 국회 비준 처리를 예정대로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김 본부장은 "전면적인 재검독을 실시한 결과, 민변 등에서 지적한 사항 이외 다수의 오류가 발견됐다"면서도 "EU쪽과 외교 공한 교환을 통해서 오류에 대한 정정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번 정정조치는 협정문의 실질적 내용을 개정하는 것이 아니라 착오를 바로 잡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류 사항을 바로잡은 새 협정문을 5일 국무회의에 상정할 예정"이라며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고 난후, 곧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김 본부장은 밝혔다.

김 본부장은 또 최근 일본 대지진과 중동 불안 사태 등을 거론하면서, "올 2분기 이후 우리의 대외무역 여건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며 "우리 업계 등에서 기대하는 올 7월1일 협정 발효를 위해 국내 내부 절차를 6월 중에 마무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본부장이 누더기 협정문에도, 한EU FTA 협정을 서두르는 이유는 자신이 EU 쪽과 구두로 잠정 합의한 발효날짜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날은 7월 1일이다. 하지만 이같은 구두 합의에 따른 발효날짜는 이미 법적 구속력이 없다. 민변도 이같은 합의 과정에 대해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해 놓은 상태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김 본부장은 "7월 1일 날짜는 EU 국가들이 정한 것"이라며 "우리 국회가 굳이 구속을 받을 필요는 없다, 주권국가로서 국익에 맞게 판단하면 된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통상전문인 송기호 변호사는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정부가 이미 많은 오류가 있는 한EU FTA를 강행처리하려는 이유는 한미FTA와의 비준을 염두에 둔 것"이라며 "국회에서 번역 문제뿐 아니라 한EU FTA 협정문 내용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 변호사는 또 "내일(5일) 오후에 민변 차원에서 이번 번역 오류뿐 아니라, 한EU FTA 협정문의 본질적인 내용에 대해서 입장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이미 타결된 한미FTA 등에 대해서도, 검독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김 본부장은 "(오류가) EU 협정문처럼 많지는 않을 것"이라며 "현재 세심히 보고 있으며, 결과를 보고 오류가 많을 경우 그때 가서 판단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정부는 또 향후 통상협정의 번역과 검독, 법률 검토 등을 맡는 전담조직을 신설하고, 이를 위한 예산도 확보할 예정이다. 또 이번 번역 오류 문제와 관련해, 강도 높은 내부 감사를 진행해 관련자에 대해서도 엄중히 책임을 물을 방침이다.


태그:#한EU?FTA, #김종훈, #번역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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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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