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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명랑 소녀>(김혜정 저, 문학과 지성사 펴냄)는 현직 고등학교 교사로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달의 門> 등을 쓴 김혜정의 청소년 소설이다.

2010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 청소년 저작상 수상작으로, 보호자는커녕 초등학생 동생까지 책임져야만 하는 불우한 환경에 처한 소녀가 험한 세파를 헤쳐 나가는 과정과 그로 인한 내면의 성장을 담담한 필체로 그려낸 장편 성장소설이다.

엄마의 장례를 치른 후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스스로 시시해지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다. 동네에서도 이 집만 뚝 떨어져 있다. 지대가 높아 전망은 좋은데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통과해야 하는 곳이라 낮에도 인적이 드물다.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방에 얼마 전까지는 할머니와 우리 집 말고도 여러 가구가 살았다.… 그나마 보증금도 없이 월세로 살다가 얼굴을 익힐 즈음이면 대부분 이사를 가버렸다. 최근에는 이사를 나가도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결국 할머니와 우리만 남았다. 우리 방은 이 집에서도 가장 후미진 데에 있다. 북쪽으로 난 창 때문에 하루 종일 햇볕 한줌 구경하기도 어렵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문틈으로 황소바람까지 들어온다. 추위를 온통 바가지 쓴 느낌이다. 컴컴한 굴 속 같은 방에 있으면 겨울잠을 자는 곰이나 다름없다. 학교를 그만두고부터는 더욱 할 일이 없다.
-<독립 명랑 소녀> 중에서

소설의 주인공인 열일곱 살 율미는 이처럼 후미진 동네의 가장 후미진 집, 그 집의 가장 구석에 있는 단칸방에서 초등학생 동생 솔미와 함께 대책 없이 살아간다.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엄마가 뇌종양으로 죽은 직후인 3년 전.

엄마가 죽은 후 날마다 방에 처박혀 술병만 끼고 살던 아버지는 "지방의 건설 현장에 일하러 간다"며 떠난 지 몇 달 째. 아무런 소식이 없다. 수입이라고는 감자탕집 알바가 고작인데, 그나마 소설 중간쯤에 한 달 동안 일하고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위기에 처하고 만다.

<독립 명랑 소녀> 겉그림
 <독립 명랑 소녀> 겉그림
ⓒ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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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율미의 유일한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다. 이런 꿈이 있어 헤쳐 나가야 하는 거대한 산과 같은 삶이 그래도 덜 버겁다. 율미는 기타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타를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온다. 동네 공터에서도 공연을 한 적이 있어서 친구 산아와 공연을 보러가기도 했던, 저글링 묘기를 부리던 서커스단 원숭이가 탈출을 했는데, 어디에 있는지 제보하는 사람에게 100만 원의 현상금을 주겠다는 것이다.

율미는 원숭이가 숨어 있을만한 집근처 숲 등을 뒤지며 원숭이를 찾는 데 몰두한다. 며칠 후 기적처럼 새끼를 밴 채 사람들에게 쫓기던 원숭이가 외딴 율미네 집으로 기어든다. 하지만 솔미의 방해와 폐지를 줍고 사는 옆방 할머니 때문에 율미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원숭이는 며칠째 율미네 집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 치매에 걸린 옆방 할머니가 여자에게 배신당해 우울증을 앓다가 가출한 아들이 돌아왔다며 좋아라 하며 애지중지,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꼭 끌어안고 있지만 원숭이는 사람들에 의해 점점 못된 동물이 되고 반드시 잡아 사살해야만 하는 그런 공포의 대상이 된다. '동네 슈퍼의 물건을 훔쳤다느니, 먹을 것 때문에 집에 침입해 사람을 물고 도망갔다느니…', 마침 공교롭게 발생한 절도사건 등을 원숭이 짓으로 지레짐작 단정하여 덮어 씌워버렸던 것이다.

나이가 많은 데다가 새끼까지 뱄기 때문에 저글링 묘기를 부릴 수 없어 이젠 서커스단에서 쓸모가 없어진 암컷 원숭이는 수컷이 사살 당하자 새끼를 지키려는 본능 때문에 탈출을 한 것인데…. 율미는 이런 원숭이에게 점점 연민을 갖게 된다.

버려지는 아이들, 독거노인, 편견... 사회의 여러 면 담은 소설

탈출한 원숭이가 보이면 즉시 신고하라는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이 소설은, 이런 줄거리를 기본으로 나이 어린 율미가 세파를 헤쳐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동시에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단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엄마의 죽음과 아빠의 불안전한 삶 때문에 버려지는 아이들, 독거노인인 옆방 할머니의 쓸쓸한 죽음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밀려난 할머니 아들의 비애, 남 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아들이지만 부모와의 단절로 자살까지 하게 되는 산아, 선생님과 산아 엄마의 가난한 집 아이에 대한 불신과 편견, 겉에 드러나는 것만으로 조금 전까지의 친구였던 이를 질시의 눈빛과 무언의 폭행으로 외면하는 아이들, 엄연하게 살아있는 생명인데 쓸모가 없어졌다고 고장 난 물건취급하며 버리는 풍조 등을.

"어느 날 서커스단을 탈출한 원숭이가 던져준 이 이야기는 끊임없이 위협당하며 고통받는 삶과 불안한 날들의 방황에 대한 기록이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마침표를 찍기까지 많은 사연들이 펼쳐졌다가 더러 접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언제나 봄날의 서커스처럼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곡예 같은 청춘이, 그 쓸쓸한 그림자가 서성이고 있었다.…시공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삶은 견뎌야 하는 것이며 또 살아내야 하는 것이리라. 그러기에 누구든 순정한 세계를 향한 열망과 좌절, 뜨거운 성찰의 어느 즈음에서 이 이야기를 만나게 되기 바란다. 아직은 영글지 않은 율미의 노래, 그 애틋한 그리움과 열망에 기대어 고마움을 전한다."-<독립 명랑 소녀> 작가의 말 중에서

<독립 명랑 소녀>란 제목만으로는 재기발랄한 한 소녀의 유쾌한 에피소드 같은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쌉싸래한 소설이었다. 어미를 잃은 새끼가 야생에 홀로 던져져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전전긍긍, 발버둥치는 그런 눈물겨운 정경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차례 연상되면서 내 안의 모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어디인지 저만 알고 있는 장소에 새끼를 낳은 어미 원숭이가 사람들에게 나타나 결국 사살되고, 어서 방을 빼라는 주인 여자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이사 나가는 족족 다시는 이사를 오는 사람이 없어 텅 비어가고 있는 집에서 그나마 함께 있어 든든하기도 했던 옆방 할머니는 하필 율미가 오디션을 보러가려는데 쓸쓸하게 죽는다.

"널 힘들게 만드는 모든 것이 너에게만 있다고 생각지 마. 누구에게나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그런 고통과 아픔이 가까이 있는 거야. 예에~ 포기하려 도망가려 하지 마. 너에게도 기회는 있는 거야.…바로 너야 껍데기가 아니야. 그래 이제 살아 숨 쉬는 거야…."
-<독립 명랑 소녀>-율미의 노래 중에서

율미는 이처럼 노래 부른다. 줄거리 틈틈 율미의 심정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듯한 노랫말들을 섞어 놨다. 작가인 동시에 청소년들을 매일 접할 수밖에 없는 현직 고등학교 선생님이어서인지 율미 또래의 청소년들의 마음을 그 어떤 청소년 소설보다 잘 헤아린 것 같고, 그리고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따뜻하게 격려하고 있는 것 같다.

주인공인 율미가 마치 내 가까이 사는 누군가의 이야기인 것만 같아 한없이 안쓰럽고,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봐야 할 것 같고, 풀이 죽어 있거나 힘들어하면 등이라도 토닥거려주며 격려해줘야 할 것 같은 그런 심정으로 읽었다면 이 책에 너무 빠져 들은 건가.

양극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그로 인해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단다. 불우한 청소년들이 이겨내고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은 자연 더 냉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명랑하고 즐거울 근거와 요소가 전혀 없음에도 현실을 탓하기보다는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 씩씩하게 세파를 헤쳐 나가는 율미의 삶을 향한 열망의 노래가 불우한 청소년들의 가슴에 많이 파고들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독립 명랑 소녀>|김혜정|문학과지성사|2011.2.28|값:9000원



태그:#청소년 소설, #성장소설, #청소년(1318), #김혜정(작가),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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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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