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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전생의 빚쟁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부모들만큼 이같은 비유가 가장 잘 맞는 민족이 또 없음이다. 자식의 일이라면 눈먼 사람처럼 그야말로 물불을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부모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일 터다.

 

다 알겠지만 '빚쟁이'는 남에게 돈을 빌려 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임과 동시에 빚을 진 사람을 역시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한데 빚쟁이는 본디 걱정이 많아 밤이 되어도 정작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원초적 숙명의 노예가 되기 일쑤다.

 

오죽했으면 '빚쟁이는 발을 뻗고 잠을 못 잔다'는 속담까지 있을까! 서두부터 다소 장황하게 '빚'에 대한 화두를 꺼낸 건 다 이유가 있는 까닭이다. 눈치 챘겠지만 나는 여전히 빚쟁이다. 그럼 어찌하여 나이가 오십도 넘은 중년의 남자가 지금도 빚에 휘둘려 오금을 못 펴고 있는가를 가감 없이 피력하고자 한다.

 

신김치에 도시락... 컵라면은 진수성찬

 

장사를 하다가 그야말로 쫄딱 망한 건 IMF의 도래 이후 수년 뒤였다. 말로는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각종의 구절양장과 간난신고 끝에 어찌어찌 빚을 청산하긴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대학을 진학할 무렵이 되자 빈곤과 빚쟁이의 음습한 요괴들은 다시금 발호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들이 대학을 들어갔는데 등록금이 없어 지인에게서 빚을 내야 했다.

 

국립대학이었지만 당시 비정규직 워킹푸어인 나로선 결코 적지 않은 부담이었기에 하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어 3년 뒤엔 딸이 또 대학생이 되었다. 집에서 학교에 다니며 알바를 했던 아들과 달리 딸은 서울로 유학을 갔는데 이게 더욱 많은 지출의 단초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딸 역시 국립대였고 1년의 휴학기간을 뺀 4년 동안의 재학 내내 장학금을 받긴 하였다. 그렇긴 하더라도 매달, 그리고 줄곧 생활비 조로 송금해줘야 했기에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은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서두에서 꺼낸 바 있듯 자식은 전생의 빚쟁이인 것을.

 

매달의 벌이는 시원찮은데 그처럼 지출은 고정적이다 보니 나의 자린고비 행각은 당연지사 기본옵션이었다. 승용차야 빈곤의 쓰나미에 휩쓸려 진즉에 팔아먹었기에 대중교통으로 하는 출퇴근은 그렇다 쳐도, 매일 먹어야 하는 점심 값이라도 아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까지 나의 처지는 더욱 곤두박질쳤다.

 

하는 수 없었다. 무려 5년 가까이를 만날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출근했다. 반찬은 늘 그렇게 신김치 하나뿐이었고 그에 더하여 이따금 뜨거운 국물까지 있는 컵라면이라도 같이 먹을 수 있는 날은 솔직히 그게 바로 진수성찬이었고 행복이었다.

 

인척에게, 사장님에게 아쉬운 소리만...

 

그럴 즈음 군복무를 마치고 나온 아들이 대학 복학을 앞두고 영어 등을 두루 배워서 이른바 '스펙'을 쌓는다며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건 필요 없고 다만 친구랑 방 하나 얻을 데 필요하다며 500만 원을 부탁했다. 한데 그 또한 나로선 연목구어의 어림없는 거액이었다.

 

전전긍긍하다가 인척에게서 그 돈을 빌렸는데 그러나 이자만 월 10만 원씩 줘야 했다. 다소 많은 이자긴 했으되 그리 주지 않으면 돈을 빌릴 수 없는 내 처지가 새삼 한심하고 초라했으며 또한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정규직처럼 기본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건강보험료조차도 지원이 안 되는 참으로 삭막한 내 직업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오로지 내가 판매한 출판물의 액수에 상응하는 일정 수당만이 수입의 전부인 구조에선 더더욱 눈에 불을 켜고 발바닥엔 땀이 나도록 뛰는 수밖에는 딱히 해법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일로로 꼬이기만 했다.

 

인터넷 문화의 가파른 착근은 독서문화를 하루가 다르게 감소시켰으며 이는 덩달아 나의 수입을 앗아가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참 뒤 서울서 내려온 아들이 이듬해 대학에 복학을 했다. 그때도 구질구질하기는 매일반이었기에 아들의 등록금은 다시금 회사의 사장님으로부터 빌려야 했다. 이른바 가불(假拂)이었다.

 

인척에게서 빌린 500만 원은 매달 이자를 꼬박꼬박 줘야 했으나 사장님으로부터 융통한 돈은 이자가 없어 그나마 다행이고 고마웠다! 그처럼 빙퉁그러지던 세월은 어쨌든 여류처럼 흘러 작년 2월, 마침내 아들과 딸은 이틀 간격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아~ 이젠 아이들에게 학비 나갈 일 없겠구나!' 나는 감격했다.

 

빚쟁이의 고행은 끝나지 않았다

 

아들은 참 고맙고 다행스럽게 원했던 직장에 미리 취업하여 졸업식이 더욱 빛났다. 딸은 1년을 쉬었다가 올 3월부터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렇지만 올해부터는 딸에게 학비와 관련된 건 일체의 도움을 주지 않기로 약조했다. 그건 나는 여전히 빚쟁이의 '신분'인 때문이다.

 

"이젠 아빠도 힘들어 죽겠어! 그러니 대학원부턴 학자금 대출을 받든지 하여 네 스스로 해결해."

 

딸은 지난 2월, 학자금을 대출받아 등록금을 냈다고 했다. 작년에 취업한 아들은 작년 말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대학 시절에 받았던 학자금 대출금을 모두 변제했다.

 

그래서 말인데 아들이 만약에 여태껏 취업이 안 되어 본의 아닌 백수의 처지였더라면 눈덩이처럼 더욱 불어났을 게 뻔한 학자금 대출금의 부담은 과연 그 얼마나 커다랬을까! 또한 어찌나 무섭고 가공할 육중한 무게로써 날 겁박했을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작년 말에 2011년 달력을 받아 사무실의 벽에 걸면서 다짐하고 작심한 게 있다. 그건 바로 '올해는 반드시 빚쟁이의 암울한 터널에서 탈출하여 나도 광명을 찾자!'는 것이었다. 그랬음에도 나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빚쟁이다. 결론적으로 빚쟁이의 고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태그:#등록금이 가계에 미치는 영향 , #등록금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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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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