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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이 고장이 난 뒤로는 좋아하던 등산을 접었다. 그렇다고 이제나 저제나 무릎이 낫기만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다. 다행이랄까 평지를 걷는 것에는 별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비록 산을 오를 수는 없어도 산이 둘러싼 사람살이 동네는 돌아볼 수가 있다. 해서 한 달에 한번 씩 등산을 하는 산악회 모임에는 여전히 참석을 한다. 왜냐면 가고 싶은 목적지에 편안하게 다다를 수 있는 교통편이 제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원들이 산행을 하는 동안 산 아래에 펼쳐져 있는 볼거리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혼자라면 또 못할 일이겠지만 "그렇게 하자"고, "함께 해 주겠다"고, 의견을 내놓은 사람이 남편이다. 덕분에 콧구멍에 곳곳의 바람을 쐬며, 다리에 힘을 붙이는 시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산을 좋아하는 남편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그러나 미안한 마음보다는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게 더 나을 듯싶어 남편의 의견에 따르고 있다. 

금오산 아래에서 바라다본 금오산 정상. 해발 976미터. 파란 하늘 아래 보란 듯 솟아 있는 봉우리는 이제 내게는 '그림의 떡'이 되었다.
 금오산 아래에서 바라다본 금오산 정상. 해발 976미터. 파란 하늘 아래 보란 듯 솟아 있는 봉우리는 이제 내게는 '그림의 떡'이 되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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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경북 구미시에 있는 '금오(金烏)산'을 가게 되었다. 구미는 처음 길이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꼬박 3시간 30분을 달려 금오산에 당도했다.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았는데도 꽤 시간이 걸리는 곳이었다. '그림의 떡'이 된 금오산의 정상을 바라보다 얼른 시선을 거두고 산 밑 자락을 살폈다.

등산은 한 곳만을 향하여 직진하는 행위다. 정상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가기 위해 자신의 몸과 타협하는 시간이다. 반면 산 아래를 살피는 일은 어떤 하나의 목표점이 뚜렷하지는 않을지라도 느릿하고 여유로우며 자유분방함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영조 때 건립한 채미정 일원.
 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영조 때 건립한 채미정 일원.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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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오르는 일행들과 헤어진 후 주변을 둘러보니, 금오산은 오지랖 넓은 아낙네처럼 자신의 산자락을 펼쳐 사람들의 살림을 돕고 있는 듯했다. 우선 산 주변이 잘 정리되어 있어 깨끗했다. 상가들의 밀집 지역도 난삽하지가 않고 포근해 보였다. 어느 곳 하나를 찾아들어가 그냥 이야기꽃을 피우며 시간을 보내도 아깝지 않을 만치 아늑해 보였다. 산길 입구에는 고려 말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영조 때 건립한 '채미정' 정자가 있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채미정 앞에는 그의 회고가(懷古歌)를 돌에 새겨 세워 놓았다. 주제가 어떻고 그 속에 담긴 뜻이 어떻고 하며 회고가의 가사를 외우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정말 그때 그 시절이 꿈결처럼 지났다. 이 시대는 뚝딱뚝딱 부수는 사람들 때문에 '산천도 의구'하지 않은 듯싶다. 산자락의 봄은 더뎌서 채미정 뒤편에 산수유 한 그루 만이 봄의 전령사로 노랗게 피어나 있다.

금오산 금오지 올레길. 등산 배낭을 메고 걷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다. 모두 마실 나온 동네 사람인지 가벼운 옷차림들이다.
 금오산 금오지 올레길. 등산 배낭을 메고 걷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다. 모두 마실 나온 동네 사람인지 가벼운 옷차림들이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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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지 물 가운데를 걸을 수 있게 부교도 설치되어 있다.
 금오지 물 가운데를 걸을 수 있게 부교도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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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산 아래로 조금 걸어 나오면 '수변올레길'이 나온다. 산은 물을 내고 있었고, 사람은 그 물길을 잡아 앉혀 둘레 길을 만들어 놓은 거다. 물 따라 둥근 길을 걸었다. 봄바람은 가끔 품속을 헤집어 써늘하게 했지만, 햇살은 길을 하얗게 빛나게 할 만치 쏟아져 내린다.

뒤통수를 따뜻하게 하는 햇살 때문에 수변올레길(금오지)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뎠다. 짊어진 짐도 없이 가벼운 차림으로 마실 나온 동네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배를 퉁퉁치며 운동을 하던 할머니도 걷고, 엄마손 잡고 나온 아이도 걷고, 연인도 손잡고 걷고, 삼대가 모여 나온 듯 보이는 사람들도 걷는다. 물 위에 놓여 있는 부교 위에서 산을 바라보며 걷는다. 그리고 그들의 말소리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억양을 듣는다.

금오지에는 유선장이 있어 '오리배'를 타고 돌 수도 있다. 금오산은 그렇게 넓은 자락을 펼쳐 사람들을 품어 안고 있는 형국이었다. 수변 길을 한 바퀴 도는 데 약 40분이 걸렸다. 그리고 다시 채미정 있는 산 입구로 와서 이번에는 산위로 나 있는 도로를 걸어 올랐다. 금오산 도립공원 내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다. 지도에는 케이블카가 당도하는 끝 지점이 해운사(대혜폭포)로 되어있다.

해운사(대혜폭포)까지 오르는 산길은 이렇게 평지처럼 넓고 편했다. 간혹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도 있는데 높지 않았다. 계단은 길이 험해서 놓은 것이 아니라 자연의 길을 사람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만들어 놓은 듯 했다.
 해운사(대혜폭포)까지 오르는 산길은 이렇게 평지처럼 넓고 편했다. 간혹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도 있는데 높지 않았다. 계단은 길이 험해서 놓은 것이 아니라 자연의 길을 사람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만들어 놓은 듯 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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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 이용료는 편도는 4500원, 왕복은 6000이었다. 산을 오르는 데 케이블카를 이용하게 될 줄이야...... 사람의 늙어가는 몸 앞에는 장사가 없구나 하는 자괴감을 안고, 왕복으로 표를 끊었다. 케이블카는 15분 간격으로 운행되었다.

케이블카의 차창 밖으로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산길이 바로 옆에 놓여 있는 듯, 아주 가까우면서도 넓은 평지처럼 펼쳐져 있다. 사람도 개미처럼 보이지 않고 그들의 움직이는 동선을 눈으로 쫓을 만치 가깝게 느껴진다. 이런 괜히 탔구나 싶은 생각을 가질 사이도 없이 케이블카는 산 중턱 종점에 도착했다.

금오산 중턱까지  생강나무 꽃만이 노랗게 피어 봄맞이를 하고 있었다.
 금오산 중턱까지 생강나무 꽃만이 노랗게 피어 봄맞이를 하고 있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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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도로 타고 내려가서 걸어 올라와 보자고 한다. 돈이 아까웠지만, 케이블카 차창 밖으로 보이던 노란 생강나무 꽃들과 금오산성, 그리고 하얗게 펼쳐져 있던 흙길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겠다. 해서 돌이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처음부터 다시 걸어 올랐다.

길은 절대로 가파르지 않은 평평한 흙길과 짧은 계단 길로 되어 있었다. 주인 따라 나선 강아지도 쫄랑거리며 오르는 산길이었다. 그렇게 생강나무 꽃을 벗 삼으며 금오산성 중의 외성인 대혜문을 지났다. 조금 오르니 영흥정이라는 샘이 나온다. 바로 케이블카 종점 밑이다. 암반에서 나오는 물맛이 시원하고 맛나다. 걸으면서 배나온 땀이 쏙 들어간다. 걷지 않았으면 느낄 수 없었던 맛이다. 해운사를 지나 대혜폭포에 다다랐다. 영흥정과 해운사와 대혜폭포는 거의 붙어 있는 곳이다. 떨어지는 폭포의 물은 옆으로 튀면서 고드름을 만들고 있었다.

금오산성의 대혜문. 금오산에는 내성과 외성이 있는데 산 입구에 있는 곳은 외성이다.
 금오산성의 대혜문. 금오산에는 내성과 외성이 있는데 산 입구에 있는 곳은 외성이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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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까지만 오른 후에 나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고 남편은 걸어 내려왔다. 내리는 걸음에 무릎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남편이 극구 말렸기 때문이다.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15분 동안에 남편이 먼저 산 아래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한다. 우리와 함께 올랐던 어떤 강아지도 벌써 내려와 있다고 남편이 전한다. 그만큼 대혜폭포까지는 평탄하면서도 짧은 거리였다.

대혜폭포. 아직 바람이 차서 떨어지는 물길 옆은 고드름으로 변해 있다.
 대혜폭포. 아직 바람이 차서 떨어지는 물길 옆은 고드름으로 변해 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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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해 보았다. <케이블카가 도착되는 지점인 대혜폭포까지는 강아지도 오를 만한 평탄한 산길이니 몸이 아주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그냥 걸어서 오르십시오>라는 문구가 안내 되어 있는 금오산 케이블카를. 자본주의 사회에 맞지 않는 억지소리가 되려나.

물론 높은 곳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나쁘지는 않지만, 너무 낮은 생뚱맞은 위치에 놓여있는 케이블카 때문에 별생각을 다 해 본다. 어찌 되었든 이중으로 돈은 없앴지만, 아름다운 산길을 걸은 덕분에 아까움이 덜했다.

금오산과 연결 되어 있는 모든 길들이 깨끗하고 정갈해 보였다.
 금오산과 연결 되어 있는 모든 길들이 깨끗하고 정갈해 보였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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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입구에 있는 도로 맞은편은 야영장이다. 금오산은 평지 돌출형이라 정상부근은 암석등으로 가파르다고 하지만 산 아래는 이렇게 사람들이 누울 자리가 넓게 펼쳐져 있는 형세였다. 야영장에는 캠핑 나온 대학생들이 고기를 굽거나, 공차기를 하거나, 중년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판을 벌이거나 했다.

그곳을 한 바퀴 돌고 법성사 쪽으로 방향을 틀려고 하는데 산행을 했던 사람들이 벌써 내려오고 있다. 아쉽지만 일행들과 합류했다. 한 곳을 향했던 사람들은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내려오며 뿌듯한 느낌으로 정상에서 보았던 것을 말하고, 우리는 자잘했지만 곳곳에서 만난 섬세했던 시간을 말하며 금오산의 전체를 꿰맞추었다.


태그:#금오산, #경북 구미시, #금오지 올레길, #채미정, #금오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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