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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학기 초, 우리 집에는 두 가지 소망이 있었다. 하나는 어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두 아들이 제발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호랑이 선생님이라도 만나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라도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다행히 담임선생님은 잘 만났다).

또 하나는 제발 반장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6학년으로 올라간 큰아들은 불행히도(?)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래 5년 동안 반장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고, 둘째도 이제 3학년이 되어 반장 선거에 뛰어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두 아이에게 제발 반장 같은 것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 겸 엄포를 단단히 놓았지만 결과는 뻔했다.

한 학교의 가정실태조사서 일부분
 한 학교의 가정실태조사서 일부분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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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혀 예상치 않았던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둘째 아들의 '장래희망' 사건이었다.

새 학기, 두 아들은 해마다 담임선생님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제출하는 가정환경 실태조사서를 들고 왔다. 가정의 경제 상황부터 시작하여 아이들의 기본 자료 등을 조목조목 묻고 있는 이 조사서의 바로 마지막 항목이 화근이었다.

그나마 어느 정도 알 것 다 아는 6학년 큰아들은 알아서(?) 작성해 갔지만, 3학년인 둘째아들이 문제였다. 혹시나 해서 물었다.

"너는 장래희망을 뭐라고 쓸 거야?"

의사, 법조인, 교사 등 엄마가 은근히 기대하는 대답으로 이른바 '사'자 직업이었으면 좋으련만, 둘째 아들의 장래희망은 어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아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글쎄 '피자배달부'란다. 그것도 당당하게…. 

"멋지잖아! 오토바이 타고 거리를 슁슁 누비며, 또 먹고 싶으면 아무 때나 피자도 공짜로 먹을 수 있고……."

'뭐어? 피자? 피자배달부? 어디서 배달부를 찾고 있어! 아빠 때는 희망사항에 적을 수 있는 것은 판사 검사 의사 교사밖에 없었어!'라고 소리칠 뻔했다.

둘째 아들의 장래희망 변천사는 다음과 같다.

- 5세 때 무인단속 경찰
- 6세 때 택시기사
- 7세 때 피아노학원 차량기사
- 8세 때 노동조합 지도자
- 9세 때 축구선수
- 10세 때 피자배달부

원래 장래 희망은 경찰에 이어 택시기사였다. 아마 예닐곱 살 때였나 보다. 한때 장래희망이 무인단속 경찰이었던 녀석은 알고 보니 무인단속 과태료를 혼자서 다 챙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말았다. 이후 택시기사가 멋진 스포츠카를 몰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거의 매년 바뀌어 왔다.

이후 노란 차에 몸을 싣고 폼 나게 운전대를 잡으며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아서 피아노학원 차량기사도 등장했다. 한 번씩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하여 머리띠를 동여매고 가열한 투쟁가를 외치는 노동조합 지도자에 이어, 월드컵 열풍이 불 때는 어김없이 축구선수도 등장했다.

그나마 1년에 한 번씩이라도 바뀌며 신분상승(?)을 해서 다행이었는데, 올해는 진로를 확 바꿔버렸으니 정말 '울고 싶어라' 노래가 절로 나온다. 

꿈을 크게 가져도 될까 말까인데, 장래희망이 '피자배달부'라니... 아, 울고싶어라.
 꿈을 크게 가져도 될까 말까인데, 장래희망이 '피자배달부'라니... 아, 울고싶어라.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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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3학년이 되니 한술 더 떠 자랑스럽게 '피자배달부'라고 호언한다. 뭘 제대로 알아서라기보다 피자 배달하는 형들이 멋있게 보였던 것이 틀림없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아들의 장래희망이 피자배달부라고 하면 기분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인가.

어차피 장래희망은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현실적이고 더 이루기 힘든 것 아니겠는가.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다는데, 꼭 의사나 판사가 아니더라도 꿈을 크게 가지고 노력해도 될까 말까인데…. 결국은 아동실태조사서에 반강요로 '의사'로 적어서 보내기는 했지만,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장래희망=피자배달부'라며 위세를 부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나의 어릴 적 모습이 생각나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나도 한때는 책방 주인이 장래 희망일 때가 있었다. 멋진 책방에서 책도 마음대로 보고 돈도 벌고, 아마 요즘의 재벌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아마도 장래희망이 막막했던 거로 기억한다.

눈앞의 현실은 닥쳐오는데, 딱히 자신의 장기나 소질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나 역시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꿈이 무언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정립이 되지 않아 꽤 고민스러운 나날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아들아, 장래희망을 생각한다면 소질과 성격을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단다. 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진로를 정한다면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단다. 엄마 아빠는 우리 아들이 공부를 잘하길 원하지만 모든 아이가 다 우등생일 순 없지 않겠니. 넓디넓은 직업의 세계에는 학벌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직업도 많단다. 부디 장래희망의 목적을 지금처럼 돈에 의한 돈을 위한 선택은 하지 않기를 바란단다.

아니, 지금 초등학생들은 그런 꿈을 꿀 여유조차 부리기 어려운 상황일지도 모른다. 또, '피자 30분 배달제' '대학 청소노동자 처우개선' 등 일련의 사건을 보자면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그 노동 가치에 상응하는 적절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쩌면 적성도 소질도 다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롭다. 오늘 밤에도 아들의 희망사항이 뇌리를 스치운다. 어쨌건 둘째의 장래희망이 머릿속에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꿈은 이루어지리라.(고창 선운사 기념품판매소에 걸린 손수건)
 꿈은 이루어지리라.(고창 선운사 기념품판매소에 걸린 손수건)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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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희망사항,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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