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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은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지난 1월 6일 새벽부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은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지난 1월 6일 새벽부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 김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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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씨가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라갔다. 2009년 연말부터 2010년 초까지 24일 동안 단식 투쟁하더니 올해는 또 고공농성이다. 한진중공업에 그리 사람이 없나? 이팔청춘도 아닌 쉰도 넘은 아줌마가 무슨 농성을 또 한다고 크레인에 올라가나?

괜스레 김진숙씨가 사랑한다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밉다. 아니, 김진숙씨는 그리 사랑할 사람이 없나? 대부분 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사는 아저씨들을 왜 사랑해? 별의별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쉰도 넘은 아줌마가 왜 크레인에 올라가나

나는 월간 <작은책>을 통해 김진숙이란 이름을 알게 됐다. 그리고 2009년 말에 도서관에서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 책을 빌려 읽었다.

책 <소금꽃나무>(김진숙 저) 겉 그림.
 책 <소금꽃나무>(김진숙 저) 겉 그림.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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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에 실린 '사회적교섭과 조카'라는 제목의 글이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았다. 큰 마트에서 일하는 김진숙씨 조카는 팔이 아파서 자기 남동생이 결혼해서 낳은 첫 조카도 안아주지 못한다. 그런데 그 어깨로 박스 들어 나르는 일을 한다. 자기가 용역인지 파견인지도 모르는 한심한 조카는 그래도 김진숙씨에게는 애틋한 조카다.

"이 아이(조카) 엄마인 우리 큰언니는 혼자서 벌어먹고 살았는데, 쌍둥이 둘을 매달고는 길에서 장사를 못 하니까, 둘 중 큰아이인 이 아이가 우리 집에서 컸다. 우리 엄마가 아픈 날이 많아서, 아예 일어나시지도 못하는 날은 내가 이 아이를 업고 학교 가는 날도 있었다.

중학교 때, 애기를 매는 띠도 없을 때라 기저귀로 이 아이를 업고 나면 왜 그렇게 흘러내리는지 '궁뎅이'에 아이를 치렁치렁 매달고 학교를 간 적이 몇 번 있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다른 애들이 다 등교한 학교에 맨 나중에 들어가서 정문 옆 철봉 틀에 업고 간 기저귀로 이 아이를 묶어 놓고 교실로 뛰어들어 갔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눈물이 나왔다. 세 아이의 엄마면서도 난 내 아이를 업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 폼이 안 나서다. 엄마인 나도 내 아이 업고 다니는 게 폼이 안 나 싫은데, 자기 자식도 아닌 조카를 업고 어린 여중생이 친구들이 바글거리는 학교에 갔으니 얼마나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그런 조카가 비정규직이 된 것이 다 김진숙씨 자신 때문이란다.

"1998년… 노사정위에서 파견법이 합의될 때 온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내지 못해서 이 아이가…."

소설이라도 마음이 아렸을 텐데, 김진숙씨 실제 삶이라서 더욱더 아렸다. 책 속에는 가난한 노동자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진솔한 글을 읽으며 마음이 아프고 또 고마웠다.

그런데, 그 책을 반납하기도 전에 책에서 받은 감동이 내 맘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김진숙씨가 2009년 연말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에 반대해서 단식투쟁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하루 이틀 단식기간이 길어질수록 안절부절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사람들이 <소금꽃나무>를 읽으면 김진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텐데….

그래, 사람들에게 <소금꽃나무>를 팔자. 출판사에 직접 주문해서 책을 팔았다. 사람들이 책을 사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지역 시민단체에서 모임이 있는 날이면 가방 가득 책을 들고 가서 팔았다.

김진숙씨의 몸이 안 좋아졌다는 소식이 들려 애가 탔다. 단식24일째 병원에 입원하면서도 농성장은 치우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단식을 풀었지만 마음이 여전히 놓이지 않았다. 며칠 뒤 한진중공업 노사가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웠다. 그렇게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은 마무리 될 줄 알았다.

김진숙씨가 7년 동안 난방을 하지 않은 이유

2003년 10월22일 김진숙이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의 대형 영정 앞에서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다.
 2003년 10월22일 김진숙이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의 대형 영정 앞에서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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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올해 초 김진숙씨가 다시 크레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진숙씨가 오른 크레인은 8년 전 그의 20년 된 친구 김주익 지회장이 홀로 올라 129일을 버티다 목을 맨 곳이다. 그것을 알기에 더 걱정이 되었다. 김진숙씨를 크레인에 오르게 놔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다 원망스러웠다. 40일 뒤, 김진숙씨가 쓴 글이 <한겨레>에 실렸다.

2월 14일은 한진중공업이 최종 정리해고 대상자를 확정발표하겠다는 날이다. 그날, 크레인에 여학생이 보낸 초콜릿이 담은 봉지가 밧줄에 매달려 올라갔단다.

"하청 노동자의 6학년 딸내미도 정규직 노동자가 잘리면 비정규직인 자기 아빠가 일감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보따리 인생 물량조가 된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하청 노동자의 6학년짜리 딸내미가 보내온 초콜릿에는 '고기를 사드릴 테니 빨리 내려오시라'는 편지가 함께 부쳐져 있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본 적도 없는 아이가 써보낸 편지에도 이다지 목이 메는데 '아빠 내가 일자리 구해줄게. 그 일 그만하면 안 돼요?'라는 아홉 살짜리 딸내미의 편지를 받았던 김주익 지회장은 얼마나 울었을까요. 내려가면 휠리스 운동화를 사주마 약속했던 세 아이와의 약속을 끝내 지킬 수 없었던 그의 마지막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세상은 그에게 두 가지 약속 중 하나를 버릴 것을 강요했습니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그가 택한 건 조합원과의 약속이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아이가 보낸 편지에도 목이 메는데 정말로 아홉 살 딸아이가 보낸 편지를 받은 김주익 지회장은 얼마나 아이들이 눈에 밟혔을까? 아이가 셋이나 있는 아빠가 조합원과의 약속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지회장 자리가 뭐 그리 막중하다고 아이들과의 약속을 버리고 세상을 등졌는지 이해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가 짊어져야 할 삶의 고단함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 역시 세 아이의 엄마기 때문이다.

김주익 지회장과 그 죽음의 도반인 곽재규씨까지 목숨을 잃고서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2년이 넘은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두 명의 목숨으로 7년간의 불안한 평화가 이어졌다. 2명의 목숨의 유효기간은 딱 7년인가? 보통의 아내라면 사무치게 야속했을 한 남자의 선택을 7년이 지난 뒤 회사는 원점으로 돌리려 했다. 그 상황을 지켜보았을 김진숙씨의 고통과 고민이 또 얼마나 많았을까?

김진숙씨는 김주익 지회장을 잃고 7년간 난방을 하지 않는 방에서 살았단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김진숙씨만의 와신상담이 아니었을까? 친구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겨울밤마다 추위에 떨었을지도 모른다.

하루빨리 김진숙씨가 웃으며 크레인에서 내려오기를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35m 높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40여일 째 고공농성을 벌이는 속에, 지난 2월 14일 오전 조합원들이 크레인 아래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35m 높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40여일 째 고공농성을 벌이는 속에, 지난 2월 14일 오전 조합원들이 크레인 아래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 유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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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김진숙씨가 트위터에 고구마가 떨어졌다는 글을 올렸다. 나는 그 글을 보고 고구마를 한진중공업 크레인으로 보내고 배송이 잘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낯선 번호의 전화가 왔다. 구수한 부산 사투리 아저씨가 고구마 보내줘서 고맙다며 나중에 투쟁이 정리되면 다시 인사전화 하겠다고 한다. 아저씨는 내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만 나는 김진숙씨를 지켜주고 있는 아저씨들이 더 많이 고맙다.

나는 올해도 여전히 <소금꽃나무> 책을 판다. 김진숙씨가 웃으면서 크레인에서 내려오는 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라며.

- 김진숙씨가 크레인에 오른 지 78일째 되는 날에.


태그:#김진숙, #한진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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