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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희뿌옇다. 황사가 온다고 했지만 길을 나섰다. 어디를 갈까 하다 무작정 차를 몰았다. 발길이 멈춘 곳은 산청 남사마을. 예전에도 이곳을 더러 왔었지만 오늘은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기로 했다. 주차장은 한산했다. 주말이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남사마을은 사수천이 마을을 휘감아 도는 반달모양의 마을이다.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이 즐비한 이 마을에도 중심부는 집을 들이지 않고 농지로 남겨두었다. 집을 들이지 않고 비워둔 데는 마을 생김새가 반달 모양이여서 메우면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이 배 모양으로 생겨서 우물 파는 것도 금해왔다고 한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남사마을이 더욱 정겹게 여겨지는 것은 흙돌담길이 있어서다. 미로처럼 나있는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느낌이다. 흙돌담길을 따라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보기로 했다. 먼저 이씨 고가로 향했다.

이씨 고가의 흙돌담길과 회화나무
 이씨 고가의 흙돌담길과 회화나무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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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으로 깊숙이 자리한 이씨 고가에서 제일 먼저 길손을 맞이하는 건 회화나무 두 그루였다. X자 형태의 거대한 두 회화나무는 안쪽의 대문보다 더 위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담장 아래 깊이 뿌리를 내린 지 벌써 300년이나 된 고목들이다. 예로부터 선조들은 능소화를 선비화로, 회화나무를 선비수라 부르며 귀이 여겼다. 마을의 지형이 쌍용교구로 용의 불을 막기 위해서 두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어 불의 기운을 막았다고 한다.

이씨 고가는 막다른 길이다. 발길을 돌려 최씨 고가로 향했다. 담장은 높다. 어른 키를 훌쩍 넘어서는 담장 너머로 기와집들이 고개를 삐죽 내민다. 헐벗은 담쟁이 넝쿨이 봄을 기다리며 매달려 있다. ㄱ자로 꺾여 들어가는 최씨 고가의 담장은 묘한 긴장감을 준다. 길 모서리의 고목과 바위가 이정표 구실을 한다. 입구에 고목과 바위마저 없었더라면 가난한 여행자는 감히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최씨 고가의 흙돌담길
 최씨 고가의 흙돌담길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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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사진을 찍는 이들이 보인다. 오래된 기억을 차곡차곡 담는 이 일은 서두르면 안 된다. 높은 담장 아래에 숨어 있는 그 무언가를 진득하게 기다려야만 한다. 그래야 오랜 골목길이 꼭꼭 숨겨둔 풍경을 하나둘 끄집어내어줄 것이다.

돌담길의 봄, 사진에 담다
 돌담길의 봄, 사진에 담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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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에서 왔다는 중년의 여인은 매화를 찍으러 왔다고 했다. 그 먼 길을, 봄을 담기 위해 온 것이다. 골목에는 정적이 흘렀고 이따금 카메라 셔터소리만 들렸다.

골목길 바닥에는 사진에 서투른 이를 위한 배려가 있다. 포토 존을 설치하여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고 푯말을 박아 두었다. 여행자도 포토 존에 서서 찍어 보았다. 역시나 밋밋한 사진이다. 고정된 모든 것은 그 자체만을 말할 뿐이다.

포토 존, 그 자체 만으론 역시 밋밋하다
 포토 존, 그 자체 만으론 역시 밋밋하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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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로 향했다. 감나무 한 그루가 흙돌담 사이에 끼여 있었다. 아니 감나무를 위해 담을 에둘렀다. 한 그루의 감나무를 위해 담을 에둘렀다는 것도, 감나무를 집안으로 끌어 들이지 않고 담 밖으로 내어 지나는 이들과 함께했다는 것도 놀랍다. 인정이 넘친다. 정겨움이다.

돌담, 감나무를 배려하다
 돌담, 감나무를 배려하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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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오늘도 마실을 나간다. 오토바이 소리가 조용한 아침 골목길을 깬다. 미쳐 인사할 겨를도 없이 할아버지는 골목길 저쪽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할아버지, 오늘도 마실 나가다
 할아버지, 오늘도 마실 나가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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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효재에는 매화가 있었다. 매화에게 '가장 오래된, 가장 아름다운, 우리나라 유일의' 이런 수식어는 사치다. 골목길 담장 너머로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려는 매화에게 미사어구는 사치다. 그저 봄이 오니 꽃이 피는 것이고 꽃이 피니 봄이 오는 게다.

까치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가지 끝에 맵시 좋게 앉은 까치도 봄이 왔음을 진즉 알고 있었다. 다가가도 꿈쩍을 하지 않는다. 딱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무런 방해 없이 봄볕을 느긋하게 쬐고 싶었나 보다.

까치와 매화
 까치와 매화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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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을 건너 이사재와 이동서원을 둘러보고 마을로 다시 돌아와 사양정사에 들렀다. 마침 골목에서 할머니 한 분이 걸어오신다. '휴'하고 길게 숨을 내쉬더니 문간채 쪽마루에 걸터앉는다. 혹시 이 댁의 종부인가 싶어 말을 건넸더니 이웃마을에 사신다고 했다. 나중에 개울 건너 이동서원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몇 컷 찍었다. 고택에는 역시 오랜 연륜이 있는 할머니들이 있어야 그 멋이 산다.

사양정사의 흙돌담길
 사양정사의 흙돌담길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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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담과 돌담이 있는 남사마을의 옛 담은 마을 개천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강돌을 사용했다고 한다. 반가에서는 주로 흙돌담을, 민가에서는 돌담을 많이 볼 수 있다. 먼저 길이 50~60cm 정도의 큰 막돌로 2~3층을 쌓는 메쌓기를 한다. 그 위에 황토를 펴고 막돌을 올려 그 사이사이에 황토를 채워 다진 찰쌓기로 담을 쌓았다. 담 위에는 기와를 올려 담의 붕괴를 막았다.

돌담길로 사라지는 어느 부부
 돌담길로 사라지는 어느 부부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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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마을 돌담길은 등록문화재 제281호이다. 2006년부터 문화재청에서는 '묵은 동네 돌담길'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을 하고 있다. 옛 담장이 등록문화재인 곳은 경남에는 거창 황산마을, 산청 단계마을, 산청 남사마을, 경북에는 성주 한개마을, 대구에는 옻골마을, 전남에는 강진 병영마을,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완도군 청산도 상서마을, 흑산도 사리마을, 신안 비금도, 영암 죽정마을, 전북에는 무주 지전마을, 익산 함라마을, 충남에는 부여 반교마을 등이 있다.

남사마을(남사예담촌)에는 이씨 고가(경남문화재자료 제118호), 최씨 고가(경남문화재자료 제117호), 이사재(경남문화재자료 제328호), 이동서당(경남문화재자료 제196호), 사양정사(경남문화재자료 제453호), 이제 개국공신교서(보물 제1294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할머니의 휴식
 할머니의 휴식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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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바람흔적'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남사마을, #남사예담촌,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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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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