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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데도 모자를 깊게 눌러쓴 늙은 노동자가 눈물을 보였다. 생일날 딸이 보내준 케이크 상자 속에 든 편지를 혼자 읽으면서도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30, 40대 젊은 노동자들 이야기를 꺼내자 눈물을 보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만난 김한철(54)씨 이야기다.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진중공업지회 대의원이다. 16일이 생일인 그는 하루 전날 딸이 보내온 케이크 상자를 그대로 두고 뜯지 않았다. 한 동료가 그 사실을 알고 생일파티를 열자고 했던 것.

 

 

장소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17호 타워크레인 아래. 금속노조 문철상 부산양산지부장과 채용길 한진중공업지회장이 지난 2월 14일부터 50m 높이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데, 그와 동료들은 사수조 대원으로 지키고 있다.

 

생산직 1/3(400명) 구조조정 방침을 밝혔던 한진중공업 사측은 170명에 대해 정리해고(230명 희망퇴직)를 단행했고, 직장폐쇄 조치를 내렸다. 그도 그 명단에 포함돼 있다. 정리해고자와 비해고자까지 조합원들은 지난해 12월 20일부터 총파업을 벌이고 있다.

 

김한철씨는 1994년 한진중공업에 입사해 용접을 해왔다. 그는 파업에다 사수조 활동 등으로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가족들은 한진중공업에서 집회가 열릴 때 참석하기도 한다. 대학생인 딸이 케이크 상자와 샴페인을 보냈는데, 동료들과 함께 풀어놓고 노래도 부르면서 잔치를 벌인 것이다.

 

김씨는 동료들과 케이크도 나눠먹고 샴페인도 나눠 마셨다. 그런 뒤 딸이 보낸 편지를 들고 옆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아 읽었다. 그냥 읽을 수 없었는지, 담배로 꺼내 물었다.

 

딸이 보낸 편지에는 "아빠 곁에 가족이 있는 거 아시죠? 저도 있고 언니도 있고 엄마도 있고, 형부도 있고! 그러니까 아빠! 힘내세요. 저희 걱정은 안하셔도 돼요. 저는 앞으로도 열심히 할 거예요"라고 써 있었다.

 

김한철씨는 "총파업 선언 뒤 전 조합원이 회사에서 거점 투쟁을 하고 생활하다시피 하고 있다"면서 "저는 아버지로서 점수가 없다. 워낙 무뚝뚝하고 가정적이지도 않다, 딸이 깜짝 이벤트를 한다고 케이크를 보낸 거 같다"고 말했다.

 

그는 "케이크 상자를 그대로 두고 있었는데, 아침에 딸이 휴대전화 문자를 보내 그 속에 편지가 있다고 해서 가져와 열어 보았다"면서 "편지를 읽어보니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아프다. 그동안 아이들한테 다정하게 해주지 못한 게 후회된다. 가정에서 부드럽게 해 주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지난해 파업 이후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가정적으로 어려울 텐데"라고 묻자 그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저는 그동안 모아 놓은 것도 있고 나이도 어느 정도 있어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을 걱정했다.

 

"젊은 친구들이 더 걱정이다. 그 친구들 생각하면 제가 더 부끄럽다. 30대, 40대면 아이들도 키워야 하고 얼마나 힘들겠나. 그런데 불평·불만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제 자신이 부끄럽다. 우리 가족은 '투쟁하는 가장' 때문에 좀 단련이 돼 있어 참을 만할 거 같다. 젊은 친구들은 파업 이후 월급을 가져가지 못했는데, 어떻게 버티는지 걱정이다."

 

다음은 김한철씨 딸이 보낸 편지 전문이다.

 

사랑하는 아빠. 아빠! 저 ◯◯이에요. 오늘은 아빠의 생신이에요. 이런 좋은 날에 우리 가족 모두 떨어져 있네요. 저번에 아빠 회사에 처음 가봤는데, 느낀 게 많았어요. 진작에 한번쯤 가봤더라면 지금보다는 철도 빨리 들고 어떤 점에선 조금 성숙되어 있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대학 와서 대학교가 안 좋아서 제 자신이 부끄러웠던 생각이 든 건 사실이에요. 지금도 느끼고 있긴 하지만요. 여기서 제가 노력하는 거 하나 없고 사람을 등수로 여기면 안 되지만 꼴등을 하는 경우에는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웠을 거예요. 다른 애들보다 조금 더 노력해서 이때까지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새로운 감정, 생각도 들어서 제 자신이 신기할 때도 많아요. 혹시라도 이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내려간단 두려움, 막막함도 느끼고 대학 와서 신기한 게 너무 많아요.

 

제가 유치원 선생님 할 수 있도록 제 의견도 받아주신 사랑하는 아빠에게 너무 고마워요. 항상 아빠가 그러셨잖아요. '니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봐라', '아빠가 다 지원해 줄게'. 이 말 진짜 감동이에요. 사실 대학 와서 들은 얘기지만 사실이잖아요. 대학 와서 열심히 하고 결과도 좋으니까 ….

 

예전에 생각하지도 못한 게 제 머리에 너무 많이 가득차 있는 거 같아요. 저도 그렇고 아빠도 그러시겠지만 우리가 표현을 못하는 건 느끼시죠? 막상 하려고 하면 부끄럽고 …. 사실 무뚝뚝한 아빠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어요. 안좋은 이야기만 듣게 되고 그랬는데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까 저도 아빠한테 그렇게 좋은 모습이나 표현도 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아빠 입장이 제 입장이라 생각이 드니까 아빠가 다르게 보이고 그랬던 거 같아요. 죄송해요. 그냥 모든 게 다 죄송해요. 항상 죄송한 마음도 들고 고마운 마음도 들고 ….

 

사랑해요 아빠. 지금 많이 힘드실텐데 어떠한 도움도 안 된다는 게 조금 슬프기도 해요. 그래도 생신이신데 그냥 이렇게 지나가면 안될 거 같아서 생각해 본 거예요. 수업 마치고 5시에 스쿨버스 타고 가야 되는데(그래야 계획에 차질이 안 생기니까) 교수님이 그 전에 마쳐 줄지 모르겠어요. 워낙 늦게 마쳐줘서, 시간이 없어서 아빠 초 끄는 모습 보고 가야될 거 같아요.

 

도너츠도 샀는데 아저씨들이랑 같이 나눠 드세요. 조금 밖에 없긴 한데 그래도 아빠 생각해서 산 거예요. 마음을 생각해 주세요. 아빠가 좋아하셨음 좋겠네요. 당연히 좋아하실 거죠? 아빠 밥은 어떻게 드세요? 꼬박꼬박 챙겨드시는 건 맞으세요? 저번에 문자 보냈듯이 건강이 최곤 거 아시죠?

 

역시 가족은 다 같이 있어야 좋은 거 같아요. 막상 같이 있을 땐 모르지만 떨어지면 바로 생각나는 게 가족이더라고요. 아빠도 우리 많이 생각나고 보고 싶죠? 언니랑 엄마도 아빠 생신 진심으로 축하드린대요. 아침에 전화 받으셨죠? 아빠 저한테만 전화 안 온다고 또 삐지시고 그러시는 건 아니겠죠? 나중에 아빠 깜짝 놀라실 거 같은데 제발 그런 반응이시길. 아빠 곁에 가족이 있는 거 아시죠? 저도 있고 언니도 있고 엄마도 있고, △△, □□이도 있고, 형부도 있고! 그러니까 아빠! 힘내세요. 저희 걱정은 안하셔도 돼요.

 

저는 앞으로도 열심히 할 거예요. 아 맞다. 어제 교수님이 그냥 교육에 대해 자기 생각을 말해 보래서 말했는데, 제가 말한 대답이 정답이라면서… ㅋㅋㅋ. 첫 강의부터 조금 눈에 띄었겠지요? 자랑은 아니고, 그냥 말해본 거예요. 사실 기분 좋아서(칭찬받아서) 그 다음 애들한테는 묻지도 않았어요. 제가 정답이라면서…. 그 다음부터 저랑 똑같이 애들이 대답할 거라면서…. 아빠! 저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빠도 힘내세요. 사랑해요.


태그:#한진중공업,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영도조선소, #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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