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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보면 그저 흙덩이로만 보일 성상유적지
 모르고 보면 그저 흙덩이로만 보일 성상유적지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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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8일~3월 1일 3박 4일간의 중국여행. 중국에서의 둘째날이 밝았다.

설마설마했는데 역시나다. 조식을 먹으러 가자고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는데 식사를 마친 룸메이트 니키언니가 돌아와 다시 깨운다. 7시 50분까지 로비로 모여야하는데 지각이다. 간신히 눈을 뜬 시간은 7시 42분. 역시 전날 마신 보드카가 내 머릿속을 두드려댄다. 얼마 마시지 않았는데도 이러는 거 보면 난 분명 딱 소주 체질인 거다. 정신을 못차리고 비틀거리며 샤워실로 가 고양이 세수만 하고 방을 나왔다. 안그래도 어색한 사람들 앞에서 민낯이라니…. 아니나다를까 이 날 얼굴이 많이 초췌해보인다는 말 좀 들었다.

체크아웃을 끝내고 버스에 오르자 가이드가 상황을 설명해준다.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미끄러워 도로가 통제되고 있는 상황이라 원래 일정이었던 '초작'으로 이동은 조금 지켜봐야할 것 같다고 한다. 대신 정주 내에서 움직일 수 있는 마지막날 코스를 앞당겨 진행하기로 한다.

호텔에서 출발한 지 20여분이 지났을까? 버스가 하남성상성유적지 앞에 멈췄다. 이곳을 둘러보라고 주어진 시간은 단 5분. 그만큼 볼만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몰랐다면 "도심 속에 왠 흙더미?" 하고 지나쳤을 법한 상성유적지는 예전 은왕조의 유적이 발견된 흙으로 만든 성벽의 일부다. 이곳에서 유적이 발견되기 전에는 은왕조는 그저 전설속의 왕조로 치부되었다고 하니 볼 것은 없지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공간임에는 확실하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적들은 현재 하남성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하남성 박물관의 외관
 하남성 박물관의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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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성유적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하남성 박물관에 도착했다. 이 박물관은 중국 상고시대부터 근현대에 걸친 13만여점의 유물을 볼 수 있는 곳으로 8개의 전시관에 나눠져 보관되어 있다. 하절기에는 09:00~17:30, 동절기에는09:00~17:00 개방하며, 폐관 1시간전까지는 입장이 완료되어야 한다. 국경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

가이드가 나눠주는 티켓을 받아들고 박물관으로 들어가니 입구에 공항에서나 볼 수 있는 검색대가 보인다. 가방이나 소지품은 이곳을 거쳐야 하며 실내에서는 사진은 찍되 플래쉬를 터뜨릴 수 없을 정도로 보안이 엄격하다. 자칫하면 말도 안통하는 중국에서 공안에게 잡혀 갈 수 있으므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할 듯 하다.

제1전시관은 원시(석기)시대)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관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하남성 박물관의 전시관은 역사적 순서대로 전시가 되어있다고 한다. 선사시대에 발견된 화석 모형이나 물이나 술을 끓여먹었던 동이, 그리고 그 시대의 가옥형태들을 살펴볼 수 있다.

교과서에서만 접했던 갑골문자
 교과서에서만 접했던 갑골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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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전시관에서는 중국의 맨 처음 왕조인 하나라와 상나라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이드를 따라 다닌다고 다녔지만 사진 찍기에 급급해 모든 설명을 다 듣지는 못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릴 적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갑골문자에 대한 부분이다. 갑골문자는 중국 최초의 문자로서 그 당시에는 거북이 등껍질에 글자를 새겨 지리, 농업, 기후적 상황들을 표현했다고 한다. 어떤 물건의 모양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로 갑골문은 점을 치는데도 사용이 되었다. 선인들의 방식대로 기후를 점치거나 미래를 내다보는 하나의 방식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책으로만 어렴풋이 배웠던 기억속의 물건을 실제로 접하니 희미했던 상상이 조금은 뚜렷해진 느낌이랄까?

제 3전시관에서 주목할만한 유물은 용기들이다. 술이나 음식을 담는 용기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정(鼎)'이라고 불리는 고기를 담는 용기다. 가이드의 말을 빌리자면 이 '정(鼎)'은 후에 왕이 지니고 다녔던 '옥쇄'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정(鼎)'은 그 크기가 다 다른데 이는 그것을 가진 주인의 권력을 상징한다. 고기를 많이 담을 수 있을 수록 거느리고 있는 식솔이 많다는 의미로 중국은 땅이 넓어 혼자서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친인척들에게 나눠주어 관리하게 하였고, 그 상징으로 '정(鼎)'을 사용했다고 한다. 총 9개의 급이 있으며 '정(鼎)'을 잃어버리면 땅을 잃어버렸다는 것으로 '옥쇄'의 기원이 된 것이다.

중국의 국보급 문화재인 '연학방호'는 춘추전국시대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중국의 국보급 문화재인 '연학방호'는 춘추전국시대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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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제4전시관에서는 국보급 보물을 만날 수 있다. 국보라고 불리는 것이 많지만 그 중 최고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연학방호(蓮鶴方壺)'는 술을 담는 용기로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노예 사회에서 봉건사회로 바뀌어 가던 춘추전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하단부는 요물들이 위로 올라가려는 모양새를 하고 있고, 가장 윗 부분에는 학이 날개를 펼치려고 하고 있다. 하단부의 요물들은 낡은 세력을 의미하며, 맨 위의 학은 신진세력을 의미한다.

나무로 만든 타악기는 그 길이와 크기가 틀려 각기 다른 음을 낸다고 한다. 나무라는 것이 그저 둔탁한 소리가 날 뿐이라고 상상이 돼 그 소리가 궁금해진다.

이 전시관에 진열된 '정(鼎)'은 앞 전시관에서 보았던 것과 그 생김새가 다르다. 앞선 것들이 뭉퉁한 형태였다면 춘추전국시대의 '정(鼎)'은 허리가 잘록한 형태이다. 이는 그 당시의 심미관을 보여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왕이 남녀노소를 떠나 여리여리하고 가냘픈 사람을 좋아해서 신하들조차 밥을 굶어 벽을 짚으며 간신히 내정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밥까지 굶어야 했던 신하들의 고충이 안타까워서라고나 할까?

중국의 다양한 화폐. 진시황에 의해 통일되었다
 중국의 다양한 화폐. 진시황에 의해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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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전국을 통일하면서 모든 문자와 화폐를 통일화시켰는데, 가이드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가 있었다. 칼, 부삽, 조개껍데기 등 다양한 모양의 화폐는 이후 '엽전'이라는 화폐로 통일이 되었다. 이 엽전은 우리나라에서도 사용되었던 것이라 눈에 익다. 중국인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형상화하여 화폐를 만들었고, 그리하여 둥근 형태에 네모난 구멍이 뚫린 엽전의 모양이 완성되었다.

칼모양의 화폐에 호기심을 가진 일행이 이런 모양으로 화폐를 만든 이유를 물었지만 그것까지는 모르는 가이드가 머쓱해하며 인터넷 검색을 권유한다. 그래서 찾아본 결과,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물물교환에서부터 거래가 시작되었고 점차 일괄된 결제수단이 필요해짐에 따라 구리를 칼모양이나 쟁기등 흔한 물건의 모양을 본 떠 작게 만들었고 이를 끈에 잘 꿰고 다니기 위해 끝 부분에 구멍을 뚫은 것이라고 한다.

(좌) 동을 문질러 거울로 사용했던 동경, (우) 죽은 자에게 입혔던 수의
 (좌) 동을 문질러 거울로 사용했던 동경, (우) 죽은 자에게 입혔던 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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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시기의 유물을 전시한 제5전시관부터는 2층으로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왼쪽으로 보이는 사진은 동경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당시에는 거울이 없었기 때문에 동을 반질반질하게 문질러서 거울로 사용했다고 한다. 얼굴을 비춰봤지만 실용성은 없는 것 같다.

오른쪽에 보이는 사진은 투구나 갑옷이 아닌 죽은 자에게 입히는 수의다. 옥으로 만들고 황금실로 꿰맨것으로 하나를 만들려면 5천가호가 1년 먹고 살 돈이 들 정도로 고가라고 한다. 당연히 왕족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만 입을 수 있는 것. 옷을 꿰매는 실은 그 신분에 따라 황금실, 은실, 동실로 나눠진다. 옷의 표면에는 죽은 자의 프로필이 적혀 있어 도둑이 이것을 훔쳐간다 해도 실만 팔 수가 있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재미있다.

제6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것들이 가옥들의 형태이다. 이는 실제로 사람이 살았던 가옥이 아닌 죽은 자와 함께 묻어주기 위해 만든 모형이다. 층수가 높을수록 천당과 가깝다 하여 높은 층수의 가옥을 선호했다.

출구쪽으로는 내일 방문할 용문석굴과 비슷한 석굴의 모양을 본 뜬 모형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내일 만날 석굴에 대한 기대감도 잠시 6관쯤 보고 났더니 슬슬 지치기 시작한다. 중국의 역사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숙취에 아무것도 못 먹어 속이 쓰려온다. 그래도 이제 2개 관만 남았으니 힘을 내보자며 스스로를 다독다독.

제 7전시관은 실크로드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당삼채가 만들어 지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이드가 내 맘을 꿰뚫어봤나보다. 삼채가 세가지 색깔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여러가지 색깔이라고 설명한다. 가만히 있었으니 망정이지, 물어봤으면 바보될 뻔 했네. 역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이 맞는 거였어. 갑골문도 그렇고 당삼채도 그렇고 교과서에서만 접했던 것들을 눈으로 확인하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 '천측무후'의 문자가 새겨진 유물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 '천측무후'의 문자가 새겨진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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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앞서 보았던 '연학방호(蓮鶴方壺)'에 버금가는 국보급 유물로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의 물건이다. 젊을 적 황태자등 반대세력들을 과감히 제거하며 스스로 황제가 되어 공포정치를 펼쳤던 그녀가 나이가 들자 자신의 죄를 반성하며 숭산 꼭대기에 올라 글을 적어 날린 것이라고 한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종이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문자때문에 가치가 더 높은 물건이다.

송나라 도성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모형
 송나라 도성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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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제 8전시관. 입구에는 송나라 도성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왕궁, 포청천이 사무를 보던 개봉부의 모습을 찾아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전시관 왼편으로는 중국 유명 화가인 '장택단'의 그림인 '청명상하도'를 모형으로 옮겨놓은 것이 전시되어 있다. '청명상하도'는 북송의 도성인 변경의 청명절을 그린 것으로 사람만 2천여 명, 가축이 500여 마리가 나오며 장터의 주판알까지 세세하게 그렸을 정도로 섬세한 그림이라고 한다.  모형 아래쪽으로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는 그림은 원본이 아닌 복사본이다. 원본은 북경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겠다고 가까이 다가가다가 유리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옆에서 보던 일행이 깔깔대며 뉴스에 나올 뻔 했다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한 한국인 방문객, 허난성 박물관에서 머리로 유리를 깨다'정도의 헤드라인이 되지 않았을까?

청나라, 원나라때의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시기에 따라 도자기의 색이나 형태가 다르다. 청나라때는 옥색, 원나라때는 백색의 도자기가 유행했다고 한다.

마지막 전시관을 나오며 가이드는 중국의 4대 발명품으로 나침반, 화약, 종이, 인쇄술을 이야기한다. 그 중 인쇄술을 보여주는 벽면이 전시관의 출구쪽을 도배하고 있다. 금빛으로 도배된 전시관을 나오며 하남성 박물관의 관람을 끝낸다.

길이 어느 정도 녹아 원래 예정되었던 코스인 '초작 운대산'으로의 이동이 가능하다고 한다. 버스에 올라 가장 기대를 갖게 했던 그 자연 비경을 만나러 출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블로그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dandyjihye.blog.me/140125378827



태그:#중국, #정주, #하남성박물관, #국보, #패키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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