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백야 김좌진 장군이 세웠다는 해림(海林)의 조선족 '실험소학교'를 둘러보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60년대 독립군 영화에서 본 듯한 오래된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거리가 정겨웠다. 도시 분위기는 하얼빈 변두리를 옮겨놓은 듯 했다.

  

해림에도 자전거와 삼륜차가 많았다. 택시는 5위안, 삼륜차 요금은 3위안, 자전거 인력거는 2위안, 버스는 1위안(180원)이라고 했다. 인구는 25만으로 용정(龍井)과 비슷했다. 조선족 거리도 있다는데 시간에 쫓겨 들르지 못했다.

 

제설기가 지나간 거리에는 하얀 눈이 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데도 가는 곳마다 눈이었다. 초겨울에 내린 눈이 이듬해 3~4월까지 녹지 않고 쌓여 있다고 했다. 워낙 추운 지역이다 보니 햇살도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부모를 12년 만에 만난 조선족 여학생

 

식당도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래도 내부는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도 무척 사글사글했다. 조선족이라고 했다. 불고기 전문식당인데 냉면이 맛있다고 해서 주문했다. 영하 20℃가 넘는 추위에서 먹는 냉면은 별미일 것 같아서였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에 박영희 시인이 조선족 실험소학고 5학년 강미애 학생을 소개했다. 귀엽고 착하게 생긴 강미애 학생은 수줍어하며 인사만 하고 돌아갔다. 박 시인은 만주에 올 때마다 보는 친구라며 봄에 오니까 그때 또 보자고 했다.

 

강미애 학생은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간 아버지가 불법체류자가 되는 바람에 열두 살이 되도록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고 한다. 안타깝게 생각하던 선생님 주선으로 작년에 초청공연을 위해 귀국하는 전통 민속 풍물반을 따라와 공항에서 아버지와 상봉했다고 한다.

 

박 시인은 요즘 만주에는 강미애 학생처럼 부모와 이산가족이 되어 생활하는 아이들이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며 씁쓸해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면서 혀를 끌끌 차는 소리도 들렸다. 국내에서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잠시 토론이 오갔다.   

 

영하 20℃ 추위에서 먹는 냉면은 별미

 

음식이 정갈하게 차려 나왔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가 고프니까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추위를 이겨내면서 먹는 냉면은 어떨까 싶어 비빔냉면이 아닌 물냉면을 주문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돌돌 감아 입에 넣으니 졸깃한 면발이 구미를 당기면서 오감이 살아났다. 겨자의 매운맛을 감해주는 계란, 시원하고 단맛을 제공하는 배, 기름기를 뺀 양지 고기, 향긋한 오이 등 국내에서 먹던 단골집 냉면과 다를 게 없었다.

 

졸깃한 면을 씹는 재미도 쏠쏠했다. 양짓살의 고소함도 맛을 한몫 더했다. 옆에 앉았던 일행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조 선생님 국물은 왜 색깔이 틀립니꺼?"라고 물었다. 계란을 모두 풀었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풀 걸 그랬네요"한다.

 

빙수처럼 으깬 바삭바삭한 얼음과 매콤한 겨자가 들어간 육수는 입안을 얼얼하게 했고, 가슴 깊이까지 차갑게 했다. 그러나 얼굴은 화끈거렸고, 몸에 온기가 돌았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겨울에 냉면을 즐겨 먹던 선인들의 지혜를 생각하며 먹는 즐거움을 만끽하려고 오래오래 씹었다. 그래도 다 먹고 나니 서운했다. 한 그릇 더 먹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영하 20℃가 넘는 추위 속에서 먹는 냉면은 그야말로 별미였다.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관에서

 

점심식사가 거의 끝나 가는데 (사)'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김종하 총경리(總經理)가 오더니 백야 장군이 최후를 맞이했던 '산시진(山市鎭)'까지 안내하겠다고 해서 박수로 화답했다. 점심을 먹고 곧바로 출발했다.

 

해림의 김좌진 장군 기념관에는 연수원 및 숙박시설과 사무실, 전시실, 시청각실, 식당, 예식장 등이 들어서 있었다. 김 총경리가 학생들에게 "학생 여러분, 훗날 만주에서 거하게 결혼식을 치르고 싶으면 오세요. 예식장을 무료로 제공하겠습니다"라고 하니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김 총경리는 기념관이 들어선 '한·중우의공원'은 백야 장군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해림과 산시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활발하게 했고,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이회영 선생의 아나키즘과 김좌진 장군의 민족주의가 융합되어 한인 자치총회를 만들고 마지막 꿈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장소라고 설명했다.

 

해림은 역사적으로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다. 가장 강력한 국력과 광활한 영토를 영유했던 고구려 기상이 엿보이는 도시이다. 그래서 김좌진 기념관도 넘치는 기상을 상기시키고자 많은 사람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고 한다. 

 

백야 장군이 항일 투쟁사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꼽히는데 '청산리전투' 승리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석 지기 부농에서 태어나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도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야가 최후를 맞이했던 '산시진' 가는 길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관에서는 항일무장투쟁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와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시청각실 등을 꼼꼼히 돌아보려면 몇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해서 김 총경리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실을 대충 둘러보고 산시진으로 향했다. 

 

산시진 가는 길은 좁고 험했다. 인적도 드물었다. 대학생들이 매년 여름에 '청산리 역사 대장정'을 다녀갈 뿐 한국 관광객 발길도 뜸하다고 했다. 시간이 없어 백야 장군의 첫 무덤이 있던 칠가툰(신흥촌)도 들르지 못했다. 짧은 해가 발걸음을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만주의 겨울 해는 무척 짧았다. 오후 3시 30분이 지나니까 해가 서산으로 넘어지듯 기울었고, 4시부터는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만주의 겨울은 길고 해는 짧다'는 말을 실감나게 했다. 종일 잿빛 하늘이어서 햇살 보기가 어려우니까 더 짧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설경이 펼쳐졌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온통 눈밭이었다. 하얀 눈밭은 붉게 물드는 하늘과 조화를 이루면서 한 폭의 풍경화처럼 다가왔다. 서산으로 기우는 태양은 설원을 더욱 아름답게 비춰주는 조명등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차!' 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버스에서 촬영한 흔들린 노을 사진 한 컷 지우려다 실수로 40여 장이 날아갔다. 조선족 해림소학교에서 김좌진 장군 기념관까지 두 시간여에 촬영한 사진인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마을을 지나는데 저녁을 짓는지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훈훈하고 푸근함을 상징하는 굴뚝연기가 사진을 잘못 지우고 허탈해진 마음을 잡아주었다. 고향에서도 사라진 풍경을 만주에 와서 보다니,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문득 골목에서 놀다가 굴뚝에서 연기 나는 걸 보고 집으로 달려가던 시절이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야단맞으면서도 설거지를 할 때도, 밥을 할 때도 부지깽이로 장단을 맞추며 '대전블루스'를 간드러지게 부르던 셋째 누님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중국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붉게 물드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연기와 고즈넉한 마을 풍경이 어렸을 때 고향동네와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부뚜막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사람이 어린 딸인지, 엄마인지, 할머니인지 궁금했다. 당장 달려 들어가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드러눕고 싶었다.

 

만주의 설원과 노을을 감상하다 보니까 버스는 산시진에 도착했고, 백야 장군이 최후를 맞이했던 옛집을 복원해놓은 장소를 알리는 안내판도 보였다. 시계는 오후 4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여행은 1월 10일~17일에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냉면, #김좌진장군, #해림, 산시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