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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참화로 파괴된 한강철교
▲ 한강철교 전쟁참화로 파괴된 한강철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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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에 1년 2개월 동안 연재되던 '남기고 싶은 이야기-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백선엽)이라는 연재물이 최근 277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노병(老兵)의 회고록이다. 91세 노인이 60년 전의 일을 회상하는 기억력도 대단하지만 그의 구술을 70만여자에 이르는 낱말을 사용하여 아름답게 묘사한 기자 능력 또한 일품이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갈 뿐이다."

누가 한 말이던가? 더글러스 맥아더가 한 말이다. 그는 태평양을 핏빛으로 물들인 일본 제국주의를 궤멸시키고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을 받아낸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다. 맥아더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지휘봉을 잡았다. 유엔군 총사령관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그는 만주폭격을 놓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 해임되었다. 그가 1951년 4월 19일 미 의회에 섰다.

한국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맥아더 한국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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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분의 자제분들을 한국의 싸움터에 남겨둔 채 돌아왔습니다. 나는 그들을 잃지 않고 이 비참한 전쟁을 명예롭게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그리고 최소한의 희생으로 완결 지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여 왔습니다. 한국전쟁은 유혈을 점차 증가시키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나는 깊은 슬픔과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52년에 걸친 군인 생활을 마치려 하고 있습니다. 내가 웨스트포인트의 광장에서 선서한 이래로 세계에는 수많은 변동이 일어났으며 나의 희망과 꿈도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시 군영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후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렴의 자랑스러운 귀절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노병처럼 나는 이제 군인생활을 접고 한 사람의 노병으로서 사라져 갑니다."

아름다운 뒷모습이다.

우리도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노병을 갖고 싶다. 허나, 우리의 현실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최근 회고록을 마친 노병도 이렇게 사라져갔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많은 말을 장황하게 풀어놨다. 안타깝다. 그가 청년장교 시절,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돌파한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했다가 전열을 정비하여 국군 최초로 평양에 입성하고 압록강까지 진군했다는 사실은 말 안 해도 안다.

야음을 틈타 꽹과리치며 물밀듯이 밀려내려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지혜롭게 전투했다는 것도 전사(戰史)에 나와 있다. 그가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게 칭송해마지 않는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고 포로 전원을 북한에 송환하려는 미국에 맞서 반공포로를 석방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사람은 자기의 좋은 면만 말하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이 본능에 충실하면 소인배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자기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어야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는 전쟁을 치르며 '자기와의 싸움이 제일 어려웠다'고 술회했다.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그를 지장(智將)이며 용장(勇將)이고 덕장(德將)이라 말한다. 전투에는 용감한 장수일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까? 말까? 자신과의 싸움에서 밀리면 용기 있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

1950년 11월 평양에 입성한 한국군이 생포한 북한 주민들. 기록에는 포로라 되어있다.
▲ 평양 1950년 11월 평양에 입성한 한국군이 생포한 북한 주민들. 기록에는 포로라 되어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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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대장 출신이다. 그리고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그가 어깨에 별이 네개 올라가 있던 장수라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남기고 사라져가야 하지 않을까. 진정 노병을 아끼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다. 그래야 대인배다.

그의 회고록에는 "내가 겪은 6·25,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이 붙어있지만 "군과 함께 60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렇다. 그에게 군, 다시 말해 군(軍)을 빼놓고는 그를 설명할 수 없다. 그가 대한민국 군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만주군복을 입었다면 그 모두를 말해야 옳지 않을까. 일본 제국주의가 세운 괴뢰국 만주군복을 입고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면 그때의 이야기도 남겨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부끄러운 과거일는지 모르지만 그 역시 그 자신의 일생이고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다.

노병의약력
▲ 약력 노병의약력
ⓒ . 중앙일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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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이번 그의 회고록에서는 살짝 비켜가고 말았다. 회고록 말미에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난 그는 1940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교편을 잡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평이하다. 다음부터가 문제다. 주목받아야 할 대목이다. 1941년 만주 군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제5연대 제1대대장을 역임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건너 뛰어버렸다.

봉천에 있던 만주군관학교는 일제가 중국 대륙침공을 위한 초급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다. 사실상 일본 관동군 예하부대였다. 당연히 매일 아침 5성을 암송해야 했고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으며 "덴노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라는 함성을 질러야 했다.

하기 어려운 말도 멍석을 깔아놓았을 때 해야지 시기를 놓치면 김이 빠진다. 이제 91세 노령인 그가 방점을 찍어야 했던 부분은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1940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의 그의 행적이다.

만주군관학교시절의 박정희
▲ 박정희 만주군관학교시절의 박정희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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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못 이겨 박정희는 다까끼 마사오라고 이름을 바꾸었지만 나는 바꾸지 않았다든지, OOOO로 창씨개명 했다고 양심고백을 해야 한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갈 때 "나는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어봉공(一死御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라는 혈서를 쓰며 충성을 맹세했지만 나는 안 썼다든지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해야 한다.

좌로부터 최현, 안창길
▲ 독립군 좌로부터 최현, 안창길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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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4월 소위로 임관한 내가 자무쓰 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 배속되어 3년 동안 근무했지만 안창길, 양정우, 진한장, 최현 등이 이끄는 독립군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다든지 아니면 독립을 외치는 동족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다고 통렬히 참회해야 한다. 우화 같고 만화 같고 기대되지 않지만 생포된 조선독립군을 몰래 풀어준 일화가 있었다면 그것도 밝혀야 한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12월 1일 창설되었다. 사령부는 연길 명원에 있었다. 보병과 기갑 360명으로 발족한 혼성 부대다. 조선독립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이 때 복무했던 조선인 명단이 지금 현재도 연변에 나돌고 있다. 연변 조선족 동포들은 그들을 반민족 행위 역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그의 후손들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고 있다.

연변에서 조국 광복이 아닌 일본군으로서 무장해제를 당한 나는 일본에 부일(附日)한 나를 동포들이 알아볼까봐 무서워서가 아니라 만주에 진주한 소련군을 피해 두만강을 넘었으며 성진, 함흥, 고원, 양덕을 거쳐 평양에 이르는 800km를 걸으면서 동포형제들이 두렵지 않았으면 않았다 고 당당히 말해야 한다. 그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박정희의 아들이 '아버지가 비록 일본 군대에 복무했지만 친일하지 않았다'고 친일인명사전에서 빼달라고 소를 제기했을 때,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혈서가 연변에서 공개되어 패소하지 않았는가. 구린 것일수록 사후에 밝혀지면 추해 보이고 후손이 망신당하게 된다. 연변을 비롯한 길림성 일대에는 그 당시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무서운 시한폭탄이다.

"조선 청년들이여, 천황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자" 라고 선동하며 조선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내몰았던 춘원 이광수는 훗날 "일제가 이렇게 일찍 패망할 줄 몰랐다"고 비겁하게 술회했다.

역사는 용기 있는 고백은 용서하지만 비열한 변명은 용서하지 않는다.


태그:#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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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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