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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 김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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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위해, 그리고 산업전선에서 청춘을 바쳤다. 민들레처럼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렇지만 피땀 흘려 일해도 발전이 없다. 새벽에 눈을 뜨면 '행복은,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이러다 병들고 이대로 시들어가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동자가 행복한 노후를 꿈꿀 수 있는 밝은 세상이어야 할 텐데, 지금은 우리를 시들게 하는 세상이다."

고려대병원 청소노동자 김윤희씨의 말이 끝나자 잔잔한 박수가 이어졌다. 5일 오후 서울광장에 모인 1000여 명은 다소 어눌하지만 절절한 김씨의 말에 그렇게 자연스레 박수를 보냈다. 김씨의 오른쪽에 있던 서울시청 신청사 건축 현장 벽면에는 '시민이 행복한 서울, 세계가 사랑하는 서울'이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이날 오후 2시 서울광장에서는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가 열렸다. 민주노총 공공서비스노조 서울경인지부 산하 고려대(고려대병원 포함)·연세대·이화여대 분회는 지난해 10월부터 12차례에 걸쳐 용역업체들과 집단 교섭을 진행했다. 그렇지만 교섭은 원활히 이뤄지지 못했고, 노조는 2월 21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신청을 접수했다.

노동자들은 지난달 말 실시된 찬반투표에서 압도적으로 파업을 결의했다(투표율 91.2%, 투표자 중 찬성률 94.9%). 노조는 7일 열리는 집단 교섭 최종 조정 회의에서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8일 오전 7시 전면 파업에 돌입할 계획이다. 이날 결의대회는 이를 앞두고 열린 것.

5일 서울광장에서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가 열렸다.
 5일 서울광장에서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가 열렸다.
ⓒ 김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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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전당' 내세우는 대학에서 '유령' 취급받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른바 '명문 사학'임을 자부하는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의 분회에 속한 이들 중엔 경비를 담당하는 남성 노동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학에서 청소를 담당하는 여성 노동자들이다. 이날 서울광장에 모인 이들 중 상당수도 동네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파마머리를 한 중년·노년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최근 동국대와 홍익대 사례 등에서도 드러났듯이, 청소노동자들을 비롯한 대학 내 비정규직은 그동안 열악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며 일해왔다.

대학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들은 거의 대부분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 ▲제대로 된 휴게시설 부재 ▲불안정한 고용 등을 견뎌야 했다. 식사를 할 곳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화장실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자세한 대학별 현황은 <홍익대 76만원, 삼육대 238만원 / 똑같이 주 40시간 노동... 월급은 왜?>를 비롯한 '집중 취재 : 청소 노동자' 시리즈 참조).

이렇게 된 데에는 대부분의 대학이 이들을 직접 고용하는 대신 최저가 낙찰제로 선정한 용역업체를 통해 간접 고용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원청인 대학은 '법적으로 우리와는 무관한 문제'라며 뒤로 숨었고, 용역업체들은 질 나쁜 처우를 강요하며 노동자들을 옥죄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이들은 대학 운영에 꼭 필요한 일을 함에도 대학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숨죽인 채 살아야 했다. 그런 혹독한 세월을 견뎌야 했던 대학 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제 더는 '유령'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며 서울광장에 모인 것이다.

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학 내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학 내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김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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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최저임금 인생, 올해는 떨쳐버리자"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이날 결의대회에서 성토 대상이 된 것은 용역업체만이 아니었다. 이들을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해온 대학 당국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연세대(총장 김한중) 청소노동자 김경순씨는 "2011년엔 이 지긋지긋한 최저임금 인생, 가난의 세월을 떨쳐버리자"고 외쳤다. 김씨는 "이젠 당하고 살지만은 않을 것"이라며 "일한 만큼 임금을 제대로 달라"고 요구했다.

김씨는 "이번 집단 교섭에서 우리의 요구 사항은 ▲최저임금(시간당 4320원) 대신 생활임금(시간당 5180원) ▲새벽에 나와 힘들게 일한 후 쉴 수 있는 휴게공간을 제대로 마련할 것 ▲대학 총장이 우리의 임금 및 노동조건 문제를 책임질 것"이라고 밝혔다.

고려대(총장 김병철) 청소노동자 이영숙씨는 "그동안 참고 참고 또 참았지만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했다. 이어 "용역업체와 교섭을 계속했지만, 역시나 시간당 4320원 이상은 내놓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고 비판한 후, "우리가 요구하는 생활임금이라는 것이 그리 많은 금액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조를 결성한 지 10년 가까이 됐지만 임금 문제 때문에 빗자루 놓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이씨는 대학 당국이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등록금 올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노동자들이 힘들어하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대학 당국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서울 지역의 모든 학교 노동자들을 위해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노동자들이 앞장서자"고 덧붙였다.

하늘은 맑았지만 봄바람은 제법 쌀쌀했던 이날 서울광장을 지킨 노동자들은 "진짜 사장인 대학 총장이 우리 문제를 해결하라"고 외치며 이들의 호소에 화답했다.

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에서 청소 노동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에서 청소 노동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 김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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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생 "청소노동자들이 머무는 곳과 총장실을 바꿔보자"

'대학답지 못한 대학'에 대한 비판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하기 위해 광장을 찾은 대학생들에게서도 나왔다.

이화여대(총장 김선욱) 학생 김승주씨는 "김선욱 총장은 학보를 통해 '이화인은 비판적 시각으로 불의를 고발해야 한다'고 했다"며 "그 말에 따라 이화여대의 불의를 고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 당국에 대한 김씨의 비판은 매서웠다. 김씨는 "이화여대는 새 학기를 맞아 '아름답고 깨끗한 캠퍼스'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그런 캠퍼스를 만든 청소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학교 당국은 그동안 노동자들을 차별하고 멸시했으며, 계단 아래 차가운 곳에서 밥을 먹도록 내몰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청소 노동자들이 머무는 차가운 곳과 총장실을 한 번 바꿔보자"고 제안한 김씨는 "총장은 30분도 못 견딜 것"이라며 대학 당국에 역지사지의 지혜를 주문했다. 그러자 광장에 있던 노동자들 사이에서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김씨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라'는 서명에 "개강 후 3일 동안 1만5000 이화인 중 8300명이 서명했다"며 학생들의 호응이 만만치 않다고 상황을 전했다.

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에서 이화여대 학생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에서 이화여대 학생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 김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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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만에 절반에 가까운 학생이 지지 서명"

학생들 사이에서 대학 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이상 푸대접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곳은 이화여대만이 아니었다. 연세대 총학생회장 정준영씨는 "개강 후 이틀 만에 1만 명 이상의 연세대생이 노동자들을 위해 서명했다"고 소개했다.

정씨는 "그동안 이런저런 서명운동을 많이 해봤지만 이번 같은 일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정씨에 따르면, 연세대 분회 조합원들은 자신들이 직접 청소한 강의실을 돌며 학생들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오늘 아침 내가 이 강의실을 청소했다"는 말로 시작해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학생들의 마음을 울렸다고 정씨는 전했다.

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여성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 문제를 비판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승리 결의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여성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 문제를 비판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김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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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는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며 대학 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밝혔다.

고려대생 진주씨는 "먼저 싸움을 건 것은 노동자를 차별하고 무시한 학교"라며 "돈 몇 푼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뜻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행사 주최 측은 고려대에서도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서명이 활발하게 진행돼, 개강 후 3일 동안 이 세 학교 학생의 절반에 가까운 약 3만 명이 서명했다고 밝혔다.

대학이 스스로 '지성의 전당'임을 내세우려면 그 이름에 부합하는 행동부터 하라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학들이 화답할지 주목된다.

한편 오후 3시부터 같은 자리에서 '103주년 3.8 여성의 날 기념 전국여성대회'가 이어졌다.


태그:#청소노동자, #파업, #비정규직,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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