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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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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유적지에서 차를 얻어 타고 영월읍내로 돌아와 모텔에 배낭을 내려놓은 뒤, 요리골목 끄트머리에 있는 떡갈비 집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요리골목을 걸을 때, 눈여겨 봐둔 집이었다. 저 집에서 떡갈비를 먹어야지, 하면서. 평일 저녁이라서 그럴까, 식당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식당 주인은 우리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떡갈비를 주문하자 음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잡채에 이어 파래전과 계란찜이 나오고, 밑반찬이 놓여진다. 푸짐하다. 공기 밥은 따로 주문하는 거라고 했는데, 주문할 필요가 없었다. 눌은밥이 따로 나왔던 것. 강원도 옥수수 막걸리까지 한 잔 곁들이니 배가 몹시 부르다. 떡갈비는 돼지고기로 만든 것인데, 가운데에 조랭이떡 한 알이 박혀 있다. 으음, 그래서 떡, 갈비로군.

우리가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식당 안은 손님들이 조금씩 늘어나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잠결이라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새벽 3시 즈음이었을 것이다. 새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이 모텔도 방음이 제대로 안 되어 있군. 어느 방인지 모르지만 투숙한 여자가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 소리가 벽을 뚫고, 방문을 뚫고 우리 방까지 들려왔던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말에 간단하게 대꾸할 뿐 여자의 새된 목소리만 길게 쉬지않고 이어진다. 새벽에 잠이나 잘 것이지, 왜 저리 열을 내면서 떠들어대는 것인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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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2월 17일) 묵었던 모텔이 아닌 관풍헌 부근에 있는 모텔이었다. 어제 묵었던 모텔은 시설이 특별히 좋은 것도, 그렇다고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지만 다시 찾아가고 싶지 않아 다른 곳을 택했던 것이다. 이 모텔 역시 그 모텔과 시설은 비슷했다. 건물 외양은 깔끔했지만 내부는 외양만 못했다. 그래봤자 하룻밤 묵어가는 곳이니,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그저 따뜻한 물 팡팡 쏟아지고, 춥지 않으면 되니까. 별 개수를 매긴다면 어제 묵은 모텔이나 이 모텔이나 전부 세 개?

이 모텔은 난방 하나는 끝내줬다. 어제 묵었던 곳은 방안이 썰렁해서 안내실에 가서 난방을 해달라고 했으니까. 주인은 심야전기라서 9시 이후에나 난방이 들어온다고 했더랬다. 그런데 오늘 묵는 모텔은 처음에 들어갔을 때부터 방안이 후끈거렸다. 덕분에 방이 너무 더워 숨이 막힐 지경이라 창문을 열어놓고 자야 했다.

여자의 말투에는 강원도 사투리가 진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사정없이 남자에게 퍼부어대는 지는 해독하지 못했다. 알아듣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귀 기울여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모텔 방에서 새벽녘까지 새된 소리로 남자를 몰아세우는 여자의 열정(?)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여자의 말을 듣고만 있던 남자, 그예 소리를 지른다. 굵고 짧은 단말마의 비명처럼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 저러다가 혹시 남자가 주먹이라도 휘두르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소리가 어느 결엔가 들리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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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마도 내가 잠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침 햇살이 모텔방의 두꺼운 커튼을 통과해서 방안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을 즈음 눈을 떴을 때, 더 이상 여자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밤새도록 창문을 열어놓고 잤더니 모텔에서 잠을 잔 적이 거의 없는 동생은 그게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고 했다. 누군가 창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아닌가, 해서.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있나. 지금까지 여행을 다니면서 수도 없이 모텔이나 여관에서 잠을 잤지만, 단 한 번도 내가 자는 방으로 외부인이 침입을 하거나, 침입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물론 여러 가지 해프닝이 벌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더운 물이 안 나온다거나, 방에 난방이 안 된다거나, 하는. 그래서 모텔비를 환불받아 나온 적도 있고, 방을 바꾼 적도 있다. 혼자서 모텔에서 그런 '쌩쇼'를 할 때면 화가 나다가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지나고 나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니까.

영화 <라디오 스타>에도 모텔이 등장한다. 청령포 가는 길에 있는 <청령포 모텔>. 그 모텔이 영월읍내에 있었다면 아마도 하루쯤 묵었을 것이나, 영월읍내에서 뚝 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냥 지나쳤다.

관풍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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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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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의 관풍헌은 쓸쓸했다. 아침 햇살이 건물 위로 쏟아지니 퇴락한 단청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이곳에서 소년 단종은 사약을 받고 짧은 삶을 마감했다. 청령포에서 머물던 소년 단종이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홍수 때문이라고 했다. 이 곳 자규루에서 소년은 자신의 신세를 자규에 빗댄 시를 지었고, 때문에 누각의 이름이 매죽루에서 자규루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스산한 겨울이 깃들어 있는 관풍헌 앞마당. 관풍헌은 소년 단종이 죽은 뒤, 허물어져 민가가 들어섰다가 정조 때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영월을 순시하다가 터를 찾아 중건하였다고 한다. 관풍헌과 자규루는 영월 읍내를 이리저리 오가다보면 눈에 쉽게 띈다. 그러니 오며 가며 들르기 딱 좋은 곳이다.

관풍헌 마당에서 한동안 서성이면서 겨울 햇볕을 쬐었다.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으니, 더 따사로운 것 같다. 봄이 코앞에 다가오긴 왔나 보다. 매서운 겨울 날씨라 한껏 추울 것이라고 예상을 단단히 했는데, 빗나갔다.

관풍헌에서 나와 영월시외버스터미널 앞 버스정류장에서 선암마을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한데 그곳에서 버스가 서는 것이 아닌가 보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시외버스터미널 매표소에 가서 물어보니 주천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걸어가야 한단다. 그런데 버스 시간이 12시 20분이라던가. 2시간 반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건데, 그럴 수야 없지.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 멀고(영월읍에서 거의 20km), 결국 택시를 탔다. 여행 가서 가끔은 택시도 타줘야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지, 뭐 이러면서.

한반도 지형
 한반도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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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마을에는 한반도 지형이 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형태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모습으로 유명하다. 그 한반도 지형 덕분에 영월군 서면은 한반도면으로 이름을 바꿨다. 면 이름 바꾸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영월군은 하동면은 김삿갓면으로, 서면은 한반도면으로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바꾼 것이다. 대단하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한반도 지형은 한반도와 똑같았다. 한반도 지형을 둘러싼 물은 얼어붙은 채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 한반도는 반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았고, 하나로 길게 이어져 있다. 하늘에서, 아주 먼 하늘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를 내려다보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한반도 지형을 찾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가족이, 연인이. 그들 대부분은 한반도 지형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고는 서둘러 다른 곳을 구경한다고 가 버렸고, 나와 동생은 숲으로 이어지는 탐방로를 따라 걸었다. 이곳 탐방로, 산책하기 아주 좋은 길이다. 소나무 숲이 있고, 회양목 군락지가 있고, 서강 전망대가 있다.

한반도 지형 탐방로
 한반도 지형 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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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은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부터 동강과 만나는 영월읍까지 이어진 강을 말한다. 이 강은 소년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까지 흘러든다고 한다. 서강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겨울이 깃들어 있어서 그런지 스산하고, 황량하다.

탐방로를 걸어서 주차장으로 빠져 나와, 한반도면사무소가 있는 신천리까지 도로를 따라 1시간 반 가량 걸었다. 신천리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영월읍으로 회귀했다. 오후 5시 51분에 영월역을 출발하는 청량리행 기차를 타야 하므로.

영월관광지도를 들여다보면 볼거리도 많고 가야할 곳도 많지만 2박3일 동안, 그것도 유유자적 걸어 다니면서 죄다 보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다음을 기약해야지.

금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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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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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세종 때 지어졌다는 금강정. 동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정자는 널찍했지만,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찾는 이가 별로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겨울이라서 그런가.

금강정에서는 흐르는 강물과 멀리 동강대교와 영월대교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강 건너에는 영월역이 있고, 뿌연 먼지에 휩싸인 한가로워 보이는 마을이 있다. 금강정에도 따사로운 겨울 햇볕이 내리 쬐이고 있었다. 정자에 걸터앉아 무심히 흐르는 동강을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한 시간쯤 그렇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차를 타기 위해 금강정에서 걸어서 영월대교를 건너 영월역으로 간다.

영월은 버스보다 기차를 타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영월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기차 타고 왔지요? 아, 네. 버스 타고 왔느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일까, 한산했던 영월역은 기차 시간이 임박하자 붐비기 시작했다. 역 대합실 의자가 사람들로 가득 찰 무렵, 열차가 5분 연착할 것이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신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짐을 들고 일어나 역 플랫폼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영월지도를 펼치니, 낯설기만 하던 영월이 익숙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여행은 낯선 곳을 익숙한 곳으로 만드는 마법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영월역 기차 건널목
 영월역 기차 건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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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도보여행, #영월,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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