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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동굴 속에서

 

"피를 많이 흘렸다면서 치료는 뒷전이오?"

희미한 신음소리와 함께 흰갈매기는 우리 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애써 상체를 세우려고 해보았지만 역부족이자 그 자리에 바로 드러누워버렸다.

 

"아힝, 자기, 어쩌다가 그랬쪄?"

 

인형웨이터는 손에 든 병의 뚜껑을 열곤 흰갈매기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리곤 어서 마시란 손짓을 하고 그가 가냘프게 목젖을 움직여 마지막 한방울까지 다 마실 동안 감동적인 눈길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옆에 와앉으라고 손짓으로 말했다.

 

"엊저녘에 멜레나와 신나게 춤출땐 언제고, 이건 또 무슨 상황극인지.."

 

조제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흰갈매기는 씁쓸한 미소를 보이더니 이내 안색을 바꾸어선,

"이거 마시면 그나마 얼마만에 나을 수 있소?하고는 희미하게 쳐다 보며 말했다.

 

"글쎄, 일전에 초록머리가 마신 술보단 약효가 더 빨라앙. 몰라잉, 아픈데 말하면 힘드니까 눈을 감고 있어봐."

인형웨이터는 눈물을 글썽여가며 흰갈매기를 아기 재우듯 가슴께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하지만 아랑곳 없이 흰갈매기는 작은 한숨을 한번 내뱉고는 말을 이어갔다.

 

"멜....멜레나가 한밤중에 정어리 통조림을 찾길래.. 페르도의 작업장에 들어갔...었소. 거긴...밤이건 낮이건 불이란 걸 켜지 않는 곳이지. 페르도야 일을 끝내고 클럽 멘도사건 어디건 가 있을 테였고...캄캄한 어둠 속에서 선반 위....를 더듬어서 통조림 몇개를 찾아냈다오. 드디어 세개 째의 캔을 집어든 순간, 뭉클..한 무엇이 손에 닿았소. 얼른 손을 뗐지만 스치는 바람이 귀밑을 지나치는가 싶더니.."

 

흰갈매기는 힘이 든지 잠깐 한숨을 내쉬더니,

"순식간에 어깨죽지가 한꺼번에 압축되는 느낌이 밀려들었소. 어떤 고통도 없었지. 다만 무언지 모르기 때문에..두려움은 몇 배로 커졌고...그 다음엔 눈 앞에서 선홍빛의 불꽃이 서서히 다가왔소. 그리곤 정신없이 흔들리는 배를 타고 있는 듯한 꿈을...꾸었지. 가끔씩 신선한 꽃과 바람의 냄새도 났었어. 그리고 눈을 떠보니 이곳이군."

그는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인형웨이터가 이내 말을 막아버렸다.

 

"이제 말은 그만행. 이 피 좀봐."

그러자 조제는 주머니를 뒤지면서,

"나도 열망사냥꾼이란 놈한테 물려봤지만 고통은 없었어. 다만 지독히 멍청해지는 기분이라 할까? 판단력이 없어진단 말이지. 치기가 마구 발동하면서 세상이 만만해 보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선 그대로 콱 죽어버리는 게 좋겠다 싶은 마음도 들더라구."

 

"그건 당신의 천성을 반영해서 독이 발휘되는 거기 때문이라... 생각하오. 소심하고 나약한 어떤 이 중에는 더욱 폐쇄적으로 변하기도 한다더군....이놈의 독은 그 인간의 근본 속성을 알게 해주는 최면제 같은 거라고..아무리 소심해도 근성이 강한 사람은 이겨내고 꿋꿋이 자신의 내면과 싸워서 일어나려고 애쓰지. 물론 속은 곪...아터지고 진물이 흘러서 언제 딱지가 앉게 될지는 몰라. 조금 나을 만하면 또 그 놈의 독이 슬슬 퍼지는 거야...평생 그 상처를 붙들고 싸우다가.. 곪아터진 상처가 어느 한순간에 폭발할 수도 있어. 하지만 새 희망을 자꾸 마음에 담아도 그놈의 독은 그 작은 열망마저도 야금야금... 갉아먹고 마는 거야...그 여자도 그...렇게 죽었다지 아마....."

 

"누구....?"

나는 불안한 기분으로 물었다.

 

"일기장 주인."

흰갈매기 대신 인형웨이터가 말을 잡아채곤 돌아보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내리누르며 물었다.

 

"그 아가씨에겐 분노의 술로 치료할 생각을 안 해봤어요?"

그러자 이번에도 인형웨이터는 흰갈매기를 아기 달래듯 말을 못하게 고개를 내젓고는,

"그 애가 분노의 술을 최초로 우리에게 제공했엉. 그 전에 우리들은 열망사냥꾼에게 물리기만 하면 모두 죽는다고 생각하고 포기했었써. 다들 조심만 하고 자기 마음을 감추기에 급급했단 말양."

 

그러자 조제는 시큰둥한 말투로 빈정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보카는 병자들의 천국이군요.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자들의...하긴 우리 현실은 더할지도 모르지만."

 

그리곤 주위를 휘둘러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윽! 이봐요. 열망사냥군의 뱃속은 쓰레기 천국이라 해야겠군. 이 놈이 뜯어먹은 꽃들이랑 생선들 좀 봐. 어쩌면 사람 팔다리 하나 정돈 거뜬히 떠다닐 수도 있겠어."

 

조제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는 걸레질 하듯 바닥을 훌훌 닦으며 수선을 피웠다.

인형 웨이터와 나도 조제가 닦아준 곳으로 옮겨서 앉았다. 끈적한 진액 같은게 끝없이 손에 묻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지독한 비린내는 어김없이 우리의 코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아저씨,술기운이 도나 봐요. 흰갈매기가 코를 골며 자는 데요."

내 말에 인형웨이터는 아기에게 하듯이 흰갈매기의 뺨에 뽀뽀를 쪽 하고는 우리 쪽으로 돌아앉았다.사뭇 근심을 했었던 것인지 그의 얼굴이 살짝 수척해 보이기 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입을 열었다.

 

"지금 너희들 처럼 그 애도 11년 전에 여기에 왔었단 말양. 힝, 그리고 혼자 클럽 '멘도사'에 와서 그림도 그리고 일기도 쓰곤 했었써. 금요일 밤이면 페르도는 어김없이 거기 들렀기 때문에 말동무가 됐고, 그 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이었단 말양."

"그럼 흰갈매기도 그 아가씨를 알아요?"

 

"아니, 흰갈매기는 그 애가 죽고 난 이후에 왔기 때문에 그 애를 본 적은 없엉. 그 외에 우리 보카 사람들은 그 애와 잘 지냈엉. 그랬기에 자신의 죽음을 통해 몇 병의 술을 남기고 이 아름다운 보카를 지키고 세상에서 열망사냥꾼을 몰아내고 싶어했는지도 몰라잉."

 

주머니를 뒤적여 나온 껌을 질겅질겅 씹던 조제는 풍선을 크게 불면서,

"말하자면 열사라 할 만하군. 스스로 희생하고 후대에 업적을 남긴, 뭐 그런."

"그건 이 상황과는 좀 안맞는 말이지만 어떻건 그애 덕분에 우린 분노를 추출하는 것에도 생각이 미치게 됐엉.이후론 보카에 와서 자신의 분노가 담긴 술을 몇 병씩 남기고 생을 다한 사람들이 생긴거란 말양."

 

그러자 나는 더욱 간절하게 질문을 해댔다.

"그렇담 세상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열망사냥꾼에게 물렸단 거고, 그 분노가 마음에 잠재돼 있었던 거군요. 지하실의 그 많은 병들을 봤을 때 전 좀 끔찍했어요. 그런데 흰갈매기는 왜 열망 사냥꾼의 표적이 됐을까요? 지나친 열망이나 급격한 자만심 같은, 혐오스런 먹이가 그에게 내재돼 있었던 건가요?"

 

나는 씁쓸히 발아래의 돌기를 톡톡 건드리며 말을 잇다가 한순간에 흠칫하고 뚫어져라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부터인지 그것은 점점 부풀어올랐고 이젠 서서히 풍선처럼 커져갔다. 내가 놀란 눈으로 그 돌기를 쳐다보고 있으니 인형웨이터가 득달같이 외쳤다.

 

"아,안돼! 비켜엉!"

 

 

<계속>


태그:#판타지소설, #중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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