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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다. 며칠동안 하늘은 청명하리만큼 맑아서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모처럼 화창한 날씨가 지속되고 있는데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다면 너무나 우울하지 않은가? 서울 모처라도 나가서 콧구멍에 바람이라도 집어넣어 보자. 필자는 청계천과 광화문광장을 추천해볼까 한다. 청계천을 따라 걸으며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고, 광화문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마주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래는 청계천 안내소에 꽂혀 있던 안내책자에 담긴 내용이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이다. 조선초 도성 건립과 배수 물길을 위해 개천 정비 사업을 진행했다. 태종 때 자연천 정비를 하면서 둑을 쌓아 하천의 모습을 만들고 이후 세종 때 지천과 세천에 대한 추라 정비를 했으며, 청계천을 처음으로 생활하천으로 규정하였다. 오늘날 청계천의 모습은 영조 때 이르러 완성되었다. 1760년과 1773년 개천 정비 작업을 두 번 진행하여 개천의 폭을 넓히고 양쪽에 돌을 쌓고 수로를 직선으로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관리부족으로 지난 500년 동안 청계천은 하수구로 전락하였고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광복과 한국 전쟁 이후에도 위생상태가 좋지 않던 청계천은 복개가 되어 위로 고가도로가 건설 되었다가 2003년 7월부터 복원사업을 시작해 2005년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청계천의 총 복원 길이는 청계광장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를 잇는 5.84km의 거리로 산책삼아 걷는데 약 2시간이 소요된다. 옛모습을 되찾은 광통교를 비롯하여 22개의 다리가 놓여 있고 9개의 분수가 있으며 특히 경관이 뛰어난 청계광장을 비롯하여 광통교, 정조반차도, 패턴천변, 빨래터, 소망의 벽, 하늘물터, 버들습지는 청계 8경으로 불린다. 오늘은 청계광장에서부터 삼일교까지의 짧은 거리를 걸어보기로 한다.

 

청계천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을 때 가장 많이 찾는 장소가 소라기둥이다. 을지로를 오가며 무심코 지나쳤던 소라모양 같기도 하고, 뿔모양 같기도 한 이 구조물에도 특별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 이 작품은 대표적인 팝아티스트인 올덴버그 부부의 작품이다. 보통 아내와 함께 디자인을 하는 올덴버그는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대부분 아내 혼자서 디자인을 하고 그는 드로잉을 맡았다.

 

올덴버그의 아내가 이 작품에 대해 구상을 할 당시, 우리나라의 한복과 도자기를 보고 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기둥을 휘감고 있는 빨간색과 파란색은 우리나라의 태극문양을 본뜬 것이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삼각뿔 형태가 위로 치솟은 모습은 청계천의 샘솟는 모양과 서울의 발전을 의미한 것이고, 안쪽에서 휘날리는 리본은 한복의 옷고름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설치비용으로 340만 달러, 우리돈으로 약 34억 원을 투자했고 모든 비용을 KT에서 부담했다고 한다. 아주 비싼 구조물이라니 소중히 다뤄야겠다. 투자된 비용을 안다면 이곳에 낙서를 하는 사람은 없겠지?

 

청계광장, 광통교... 청계천 8경 빼놓지 말고 둘러보세요

 

청계천의 산책은 인공폭포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청계천에도 8경이 있는데 그중 앞서 보았던 소라기둥과 이 청계폭포를 볼 수 있는 청계광장이 1경이다.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하루에 한강물 12만 톤이 사용된다. 대충 짐작조차 해볼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폭포 위로 세워진 검정색 기둥에는 도깨비와 비슷한 모습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나티'라는 짐승의 얼굴을 한 요괴의 얼굴을 새긴것으로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준다.

 

청계천 인공폭포 바로 앞쪽으로는 '팔석담'이라는 8개의 돌이 있다. 전국 팔도의 돌을 가져와 금수강산의 혼을 모아놓은 곳으로 돌 위에는 각 도의 이름이 새겨진 쇠붙이가 부착되어 있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돌은 제주도를 나타내며 제주도의 돌 현무암을 놓은 것이다. 팔석담이 끝나는 곳에서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빌어보자.  이렇게 모아진 동전은 깨끗이 씻겨 불우이웃돕기에 쓰인다고 하니 좋은 일에 작은 보탬이나마 줄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청계천에는 22개의 다리가 있으며 그 중 가장 먼저 만나는 다리가 모전교이다. 毛廛, 과일을 파는 가게라는 의미이다. 옛날 이 모전교가 있던 자리에는 과일가게가 즐비했고, 그곳에 다리가 생겨 자연스럽게 모전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모전교 다음에 만나는 다리가 청계 2경 광통교인데 이 다리는 예전에도 많은 이들이 다니던 다리로 정월 대보름에는 답교놀이며 연날리기를 하던 전통이 새겨진 곳이다. 다리 밑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면 아주 오래된 것 같은 돌이 섞여 있다. 이는 500년 이상된 조선돌로서 콘크리트로 덮여있던 청계천을 다시 열면서 찾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만히 서서 느껴보면 돌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남다르다.

 

광통교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돌들은 조금 특별하다. 상단에는 예전 왕가에만 쓰이던 당초문양이 새겨져 있고, 하단 넓은 부분에는 구름을 탄 신선이 합장을 한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돌은 태종(이방원)의 어머니인 신덕왕후의 무덤에 있던 돌로 청계천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광통교는 축조 당시 신덕왕후 능을 이장하고 방치해 두었던 신장석을 다리 교대석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중 일부가 거꾸로 놓여 있는데 그것에 대한 사연이 기구하다. 단순한 실수라는 설도 있고, 조선초기 왕권장악에 있어 신덕왕후와 적대 관계에 있던 태종이 그녀를 미워해서 복수심에 돌을 뒤집어 놓았다는 추측도 있다. 평소에는 거꾸로 매달아 어지럽게 하고, 비가 오면 물이 차올라 물고문을 시킨다는 해석이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덕왕후의 무덤이 큰 비에 3번 정도 떠내려 갔고, 지금은 정릉에서 신덕왕후의 무덤을 볼 수 있다.

 

'정조반차도'에서 숨은 정조 찾기?... 고수도 찾을 수 없다

 

청계천 22개의 다리 중 가장 넓은 다리는 바로 광교다. 넓을 광(廣)자를 써서 말 그대로 크고 넓은 다리라는 의미를 가지는 이 다리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숭례문으로 연결되는 큰길이었으며 지금은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가는 큰길을 이어주고 있다.

 

광교에는 성종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날 밤 백성의 삶을 살피기 위해 암행을 나온 성종은 다리 밑에서 잠들어 있던 한 백성을 발견하고 그의 사연을 들어보았다. 임금이 어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장의 진상품을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는 사연을 들은 임금은 그의 정성에 감탄을 하고 같이 나온 무예별감의 집에 재우게 했다. 날이 밝아 임금을 만나러 간 청년은 그가 어젯밤에 만난 남자임을 알게 되었고, 성종은 그에게 충의초사라는 벼슬을 내려 돌려보냈다.

 

이런 훈훈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다리이니만큼 광교 아래는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광교 아래 갤러리는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개방되는 전시관으로 신청을 하면 누구든 무료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 단, 작가로 활동하는 프로가 아닌 순수 아마추어야 한다.

 

광교를 지나면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바로 청계 3경으로 불리는 정조반차도라는 그림이다. 광교와 장통교 사이에서부터 삼일교 인근까지 이어지는 정조반차도는 폭 2.4m, 길이 192m의 세계적으로도 유래없는 크기이다.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도자 벽화로 만든 것이다. 1779명의 수행원과 779필의 말이 호위하는 어가 행진을 담은 이 그림은 김홍도의 지휘 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규명 등 당대 내로라하는 화원들이 합작한 작품으로서 문화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정조반차도에서 숨은그림 찾기를 해보자. 이 많은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정조를 찾을 수 있을까? 아무리 숨은 그림 찾기에 능한 사람이라도 절대로 찾을 수가 없다. 정조가 탄 좌마와 그의 신하가 양산을 받치고 있는 모습만 있을 뿐 임금의 모습은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살아계실 때는 그의 용안을 그리지 않는 것이 당시의 예법이라 그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재활치료' 마치고 돌아온 이순신 장군님... "정말 쌍꺼풀이 있네"

 

청계천 산책을 마치고 광화문 광장으로 이동한다. 광화문 광장의 끝에는 경복궁이 있는데 그 경복궁의 정문의 이름이 광화문이라서 그것을 따 광장의 이름이 붙여졌다.

 

광화문 광장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이순신 장군 동상이다. 이순신 장군이 서 있던 자리에는 원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4·19 때 철거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이 두려워 할 인물을 세우자 하여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 이순신 장군이 '골다공증'이라는 병명을 얻고 입원을 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한 달 간의 치료를 끝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그런데 재활치료를 위해 입원하셨던 장군님이 쌍꺼풀 수술까지 덤으로 하셨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려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렌즈를 쭉 당겨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찍은 후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본 순간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말 있다! 쌍꺼풀"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로는 거북선과 북이 놓여 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눕혀져 있는 북을 두고 말들이 많다고 한다. 전쟁중이거나 승리를 나타낼 때는 북을 세워두는 것이 정석인데 광화문 광장의 북은 눕혀져 있다. 원래 눕혀 놓고 치는 북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다시 세워 설치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지만 옛것을 살려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다고 한다.

 

세종대왕 동상은 2009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이곳에 세워졌으며 앞쪽으로는 세종대왕의 발명품 천문의가 놓여있다. 세종대왕 동상에 대해서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덕수궁을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덕수궁에도 세종대왕 동상이 있다. 박정희 정권 때 동상세우기 운동이 유행을 했고, 그로 인해 덕수궁에까지 그 바람이 일어 세종대왕 동상을 세웠는데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을 세우려는 계획을 논의하던 중 덕수궁의 것을 그대로 가져오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표정이 너무 엄하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광화문 광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온화한 표정을 지닌 지금의 세종대왕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 동상 뒤쪽에는 지하로 통하는 입구가 있다. 계단을 내려가면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에 관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는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으니 시간이 된다면 함께 둘러보는 것도 좋다. 광화문 광장 바로 뒤쪽에 있는 경복궁까지 함께 둘러본다면 하루코스로 안성맞춤이지 않을까? 단, 화요일은 경복궁의 휴관일이라는 것을 숙지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http://dandyjihye.blog.me/140124399834 개인블로그에 게재된 글입니다.


태그:#청계천, #광화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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