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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전 국무총리
 정운찬 전 국무총리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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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지난 17일 극동포럼 초청 강연에서 "역사를 영어로 외국인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을 많이 시켜야 한다"며 "영어보다 국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대학입시에서만은 국사를 영어로 테스트하는 방안을 강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당장 이것을 보도한 인터넷 기사마다 수 백 건의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 이 발언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역사를 영어로 외국인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을 많이 시켜야 한다"는 것은 좋은 의견이다. 하지만, 그 대책으로 제시한 것이 "국사를 영어로 테스트하자"는 것이기에 많은 이의 분노를 샀고, 원색적인 비난도 받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제안이 실현되면 어떻게 될까?

난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어느 해에는 국사를, 어떤 해에는 세계사, 근현대사를 가르쳤다. 세계사를 가르칠 때는 루브르 박물관 홈페이지, 타이완의 고궁박물관 홈페이지도 들어가 보았다. 이란, 터키의 역사 관련 웹사이트에 들어가 이미지 자료를 퍼온 적도 있다. 영어판 웹페이지 서비스를 해 주기에 가능했다. 내 수업 자료를 풍성하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기에 그럴 때는 영어가 참 감사하고, 유용했다.

그러나 국사는 다르다. 국사 수업 자료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구입한 화보, 유적지에 가서 직접 찍어온 사진, 누군가 블로그에 올려둔 여행 사진 등으로 제작한다. 국사 수업자료를 만들면서 외국 사이트에 들어가 볼 필요는 없었다. 영어를 알지 못하면 한국사 자료 제작이 부실해지거나, 심각한 타격을 받는 경우도 없다.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지 않는 한, 모든 국사 용어를 영어로 완벽하게 아는 중·고교 역사 교사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국사용어 영어 번역 문제,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만약 국사 시험을 영어로 치러야 한다면 국사 용어를 바르게 영어로 번역한 표준 용어집부터 시급히 만들어 일선 학교에 배포해야 한다. 고등학교 교사씩이나 하는 네가 게을러서, 아니면 국사 용어를 영어로 번역할 자신이 없어서 책임을 교육과학기술부에 넘기는 것이냐는 비판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본격적으로 국사 수업을 시작하게 되는 단원, 구석기 시대를 예로 들어 보자. 구석기 시대의 영어 번역으로는 old stone age와 the paleolithic age라는 표현 두 가지 모두를 쓴다. 국가가 표준을 제시해주지 않아 내 맘대로 용어를 선택한다면(특히 교육문제에 관한한 완벽하게 준비해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기에, 아마도 국사 용어 영어번역은 교사 개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나는 old stone age를 고를 것이다. 가뜩이나 영어를 외계어로 인식하는 아이들에게 국사책을 펴자마자 좌절감을 주어 포기하게 하지 않으려면, 그것이 더 좋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능에서 구석기 시대는 the paleolithic age라고 나올 것 같다. 출제하시는 분들이 old stone age같은 수준 낮은 표현보다는 the paleolithic age같은 고급스런 표현을 선호하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불쌍한 '내 아이들'은 구석기 시대를 달달 외웠어도 paleolithic이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 문제를 풀지 못할 수도 있다. 영어를 몰라서 국사 문제도 풀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서변동에서 신석기 유물 대거 출토. 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서변동 출토 신석기 시대 유물들의 일부.
 서변동에서 신석기 유물 대거 출토. 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서변동 출토 신석기 시대 유물들의 일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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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leolithic age, the neolithic age 같은 단어는 어쩌면, 영어 공부를 하다가 만날 수도 있지만, '소학(小學)', '주자가례(朱子家禮)' 같은 용어는 다르다. 중국에서 나온 책이기에 어떤 영어 번역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중국어로는 Xiaoxue, Zhuzijiali 라고 발음하는데, 중국에서 만든 책이니 영어 표기는 중국어 발음대로 하는 것이 맞느냐, 우리나라에서 발음하는 대로 Sohak, Jujagarye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으냐하는 고민이 생길 수 있다.

국사 시험을 영어로 치르는 목적이 외국인에게 국사를 잘 설명해 주기 위해서라면,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Sohak이 아니라 Xiaoxue가 더 나을 것이다. 그러면,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소학'과 'Xiaoxue'를 동시에 외워두어야 할까?

'왕오천축국전', '대승기신론소' 같은 우리 조상이 지은 책의 경우에도 문제는 남는다. 그냥 발음만 따서 알파벳으로 표기할 것이냐, '다섯 천축국을 다녀온 이야기' 처럼 풀어서 번역할 것이냐 하는 문제 때문이다. 고려시대의 계급인 '귀족-중류층-양인-천민'도 역시 같은 문제를 갖는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꼭 필요한 일일까? 역사과 교수들이나 번역가들 몇 명만 알거나 고민해도 충분할 일을 전 국민이 다 함께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

아름다운 우리말 살려 쓴 용어, 다 버릴 셈인가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옛날에는 '타제석기'라고 불렀던 것을 지금은 '뗀석기'라고 부른다. '양면핵석기'라고 부르던 유물은 '주먹도끼'로 바꿨다. '즐문토기'는 '빗살무늬 토기'라는 고운 이름을 얻었다. 고고학 용어를 보면 가락바퀴, 슴베찌르개, 찍개, 민무늬토기, 반달돌칼처럼 쉽고 들으면 금방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잘 살린 용어가 많다. 한자투 일색이었던 것을 바꾼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영어로 국사 시험을 본다면 이 아름다운 용어들은 점차 사라져 갈 것이다. 시험을 시행하는 초창기에는 수업 시간에 '주먹도끼'와 'hand axe'를 함께 언급하겠지만, 시험에 'hand axe'만 영어 문장 속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에 '주먹도끼'는 필요 없는 단어가 된다. 수능에 국사가 영어로 출제되니 분명 학교에서 치르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도 영어로 출제하는 학교가 늘어날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모든 학교가 영어로 국사 문제를 내게 될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국사 교사들이 영어 교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엄청 고생하면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면 '주먹도끼'는 하등의 쓸모도 없는 용어가 되고 만다. 시험에 전혀 쓰지 않을 용어를 어느 학생이 애지중지 하면서 외우겠는가? 수능에 영어 국사 시험이 정착되면, 그로부터 몇 년 후 국사 수업시간 풍경은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Bronze Age 단원 시작하기 전에, 저번 시간에 배웠던 내용 복습 좀 해 보자. 우리나라 Paleolithic Age가 언제 시작됐지?"
"70만 년 전에요."

"Paleolithic Age의 대표적인 artifacts가 뭐지?"
"Hand axe요!" "Chopper요!"

"그럼 Paleolithic Age의 대표적인 historical site도 말해볼까?"
"상원 검은모루 cave요."
"공주 석장리요."
"단양 수양개 prehistoric remains요."

"O.K. Neolithic Age를 특징짓는 artifacts는? 이게 발견되면 Neolithic Age라고 단정할 수 있는 artifacts 말이야. 어떤 거지?"
"earthenware요."
"polished stone tool이요."

"그래, 기억해 둬. earthenware와 polished stone tool 이 두 가지는 Neolithic age의 특징적인 artifacts야. 대표적인 Neolithic Age의 earthenware에는 뭐가 있지?"
"Comb-pattern Pottery요."

오염된 한국어, 후손들이 우리를 원망하지 않을까

신라 왕관. 사진 출처는 <히스토리카한국사 가야+신라>.
 신라 왕관. 사진 출처는 <히스토리카한국사 가야+신라>.
ⓒ 이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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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천 년을 이어온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조상이 남긴 유물을 부르는 이름도, 선조들이 남긴 유산을 일컫는 명칭도,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교육하기 적합한 글과 말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단지 현재에 널리 통용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위에 지어낸 상상처럼 얼치기 말을 써야 하는 것일까?

영어에만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는 작금의 우리를 보면 슬퍼지고 걱정도 된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고, 화무백일홍(花無百日紅)이라 했다. 영어가 영원히 세계의 공통어일까? 내가 죽을 때까지는 그렇겠지만, 오백년 천년 후에도 여전히 세계의 공용어는 아닐 것이다. 그때 우리 후손들은 영어에 완전히 오염된 한국어를 한심해 하며 조상인 우리를 원망하지 않을까? 혹은 더 심각하게, 그때쯤이면 우리 땅에는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를 쓰는 후손들이 살다가 정체성을 잃고 주변에 흡수, 동화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이런 식의 국사 수업을 원해서 그런 발언을 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어와 수능에 관해서는 과도하게 대비하는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영어로 국사 시험을 치른다면 몇 년 후의 이런 국사 수업 광경이 웃기는 상상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천년 후 미래의 모습도 기우일 뿐이라고 웃으며 말할 수만은 없을지도 모른다.


태그:#정운찬, #국사 영어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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