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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고질적인 기자회견 울렁증을 드러냈다.

 

20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북악산 등산을 마친 뒤 열린 오찬 간담회 자리에서다. 이날의 만남은 지난 1일 생방송 간담회에서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잘 안 한다"는 지적을 받은 뒤에 마련됐다. 당시 이 대통령은 "설 지내고 국회도 새로 열리면 한번 기자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생각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발언 뒤 공식 기자회견과 산행 뒤 오찬간담회라는 두 가지 형식의 만남을 고민하다가 대통령과 출입기자단의 산행을 마련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공식 기자회견은 다소 딱딱할 것 같아서 오찬 형식의 간담회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날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은 국민들이 바라는 진솔한 소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자들의 입장에서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물가폭등과 전세란, 저축은행 연쇄도산 등 민생고에 대한 해결책은 있는지, 대통령이 치적이라고 자랑한 UAE 원전 공사는 어떻게 되어가는지, 구제역 때문에 300만 마리의 가축을 살처분했는데 날이 풀린 후 환경 문제는 걱정할 필요 없는지, 대통령까지 나선 개헌 논의는 어떤 식으로 실마리를 푸는 게 좋을지...

 

대선후보 시절에는 "우리나라에 문제가 있다면, 딱 하나 국가의 리더십이 없다"(2007년 4월8일 드림포럼 강연)고 큰소리쳤던 대통령이 전임자 이상의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는 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는 상황이다.

 

대통령은 지난해에도 기자들로부터 민간인 불법사찰 등 껄끄러운 질문을 받으면 "오늘 얘기하려는 주제와는 다른 것 같다"고 피해갔는데, 해가 바뀐 후에도 이러한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산행 내내 국정현안에 대해 언급을 하지않는 대통령에게 모 일간지 기자가 마이크를 잡고 개헌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1일 방송간담회에서 개헌의 필요성 얘기했는데, 정치권 논의가 진전이 있기보다는 갈등이 촉발되는 것 같다. 개헌 문제의 진도를 나가기 위해서 대통령이 개헌에 미온적인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나 손학규 민주당 대표 등과 직접 소통할 생각 없는가? 대통령이 개헌 발의권을 행사할 용의는 없는가?"

 

오찬간담회 사회를 본 박정하 춘추관장이 "너무 공격적인 질문이다. 대통령님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냐?"고 하자 이 대통령은 "그건 뭐 생각할 여지도 없고..."라고 질문을 바로 묵살해버렸다.

 

"밥 잘 먹고 등산 다녀와서 그런 딱딱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분위기에 안 맞는 질문이다. 이 다음에 정장하고 넥타이하고 대답하기로 약속을 하겠다."

 

이 대통령은 산행 중에도 기자들이 뭔가 질문을 하려고 하자 "산에 와서 다른 얘기하는 것도 환경파괴"라는 답변으로 넘어갔다.

 

이 대통령이 자신에게 거북스러운 질문을 애써 묵살하는 것은 "청와대 식구인 출입기자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그릇된 언론관이 반영된 측면도 있다. 이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에게 "여러분들이 사실은 청와대 와서 같이 근무하면 이건 인지상정이다.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가족적인 개념이 없다면 그건 어느 사회에 가도 문제아라고 본다"고 말했다.

 

2001년 한나라당 이회창 당시 총재는 그해 10월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후 "특히 이번 선거 기간에 애써주신 출입기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립서비스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한 식구로서 너무 애쓰셨다"고 말했다가 '권언유착'이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이 대통령도 똑같은 논란을 빚을 수 있는 말을 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남북관계와 신공항·과학벨트에 대한 질문을 2개 더 받은 뒤 "이상으로 기자회견을 끝내겠다. 춘추관장에게 (사회) 맡겨놓으면 해가 다 가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정치평론가 유창선 박사는 "대통령이 민생위기를 진솔하게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도와달라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 오늘도 하고싶은 얘기만 하고 입을 닫아버렸다"며 "소통부재는 이 대통령의 고질적인 문제 같다"고 촌평했다.


태그:#이명박,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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