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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린 공원(자오린 공원)'에서 도마 안중근 유묵비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오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마음도 불편했다. 섬세하고 화려한 얼음 조형물 감상도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안타까운 마음을 공원의 하얀 눈밭에 뿌리고 발길을 돌렸다. 

 

선물센터에 들렀으나 눈에 띄는 게 없어 구경만 했다. 밖으로 나오니까 들어가기 전보다 더 추웠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맹추위는 밤이 되니까 더욱 날카로워졌다. 찬바람이 살갗을 스치는 게 아니라 가느다란 싸리채로 언 살을 때리는 것 같았다.

 

박영희 시인이 "오늘(1월 11일) 하얼빈 기온이 영하 28℃ 나갔다고 하네요. 40℃까지 내려갈 때도 있으니까, 그렇게 큰 추위는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소리가 나오면서 걱정이 되었다. 빙등제를 관람할 밤에는 영하 30℃ 이하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식당에 도착하니까 오후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박 시인에게 빙등제 관람과 목단강으로 이동하는 다음날 일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빙등제 관람은 두 시간 정도, 날이 워낙 추워 걸어서 송화강을 건너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박 시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빙등제에 앞서 봤던 개그 공연

 

 중국 식당에서 저녁 식사 후 열린 개그 공연. 하나같이 즐거워하는 표정에서 중국인들의 낙천적인 성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중국 식당에서 저녁 식사 후 열린 개그 공연. 하나같이 즐거워하는 표정에서 중국인들의 낙천적인 성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 조종안

저녁을 맛있게 먹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1층 홀이 무척 소란스러웠다. 좁은 공간에 마이크 음량까지 높여놓아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옛날 어른들이 "바깥이 왜 그렇게 시끄럽냐, 중국집에 불이라도 났냐?"라던 우스개가 떠올랐다.

 

마이크를 쥔 남녀가 한쪽에 설치한 간이무대에서 중국어로 한마디 할 때마다 테이블에서는 박수와 함께 폭소가 터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식후 서비스로 라이브공연을 하는 것 같았다. 

 

천정에 매달린 다양한 장식과 벽에 걸린 붉은색 부적들이 화려함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정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목소리의 높낮이와 각설이 옷차림, 웃기는 몸짓 등이 개그를 하는 모양이었다. 뒤따라 나오던 총각 가이드도 코미디 공연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화강에서 만난 팽이치는 소년

 

버스에 올라 인원점검을 마치니까 저녁 7시 20분, 빙등제가 열리는 송화강 쪽으로 차를 몰았다. 안전 가이드는 빙등제는 원래 '조린 공원'에서 해마다 개최해왔는데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태양도공원 빙설축제'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꽁꽁 언 송화강에서 팽이 치는 소년. 어렸을 때 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꽁꽁 언 송화강에서 팽이 치는 소년. 어렸을 때 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 조종안

빙등제 행사장에 도착해서 송화강으로 내려갔다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10대로 보이는 소년이 고향에서도 사라져버린 팽이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른손에 팽이채를 쥔 소년은 팽이가 넘어질세라 팽이 허리를 열심히 쳐댔다.

 

많은 사람이 얼음두께가 6m도 더 된다는 송화강 위에서 마차를 타고, 썰매도 타는 등 다양한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중 팽이치기는 어렸을 때 추억들을 떠오르게 해서 40년 만에 만난 고향의 지우처럼 다가왔다.

 

팽이에 쇠구슬을 박고 막대 끝에 40cm 정도 길이의 끈을 달아 팽이 허리를 때리면 빠른 속도로 돌았다. 팽이가 한 곳에서 오래 돌면 "야, 꽃 쏜다!"라며 좋아했다. 아이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던 팽이는 달항아리 모양의 '항아리 팽이'. 겨루기할 때 여간한 팽이와 부딪쳐도 쓰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화강을 끼고 있는 하얼빈은 팽이치기를 즐기고, 압록강 하류의 단둥에서는 제기차기를 즐기는데 이유는 압록강이 얼지 않기 때문이라는 가이드 설명에서 놀이문화도 지역의 환경에 따라 좌우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상상 속 신비의 나라 궁전을 떠오르게 했던 전시장

 

 제12회 빙등축제 전시장 입구 풍경. 영하 30도 추위에도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는 모습이 부럽게 보였습니다.
제12회 빙등축제 전시장 입구 풍경. 영하 30도 추위에도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는 모습이 부럽게 보였습니다. ⓒ 조종안
빙등제 행사장은 한마디로 휘황찬란했다. 온갖 모형의 얼음 조각 조형물들이 오색의 조명을 받아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입장을 기다리는 관람객으로 입구가 무척 혼잡했다. 그래도 몸 빠른 가이드 덕에 추운데서 기다리지 않고 입장할 수 있었다.

 

하얼빈 빙등제는 1963년부터 매년 겨울에 열리고 있으며 지금은 세계적인 얼음축제로 인정받고 있단다. 올해는 '빙설세계 동화왕국'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테마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60만 제곱미터 공간에 18만 입방미터 얼음을 사용했다고.

 

 관광객들이 전시장을 돌아보려고 마차에 오르고 있습니다. 시간도 없었지만, 무척 비싸다는 말에 기가 죽더군요.
관광객들이 전시장을 돌아보려고 마차에 오르고 있습니다. 시간도 없었지만, 무척 비싸다는 말에 기가 죽더군요. ⓒ 조종안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니까 마차를 타라고 호객행위를 했다. 타는 사람도 있었는데 무척 비쌀 것 같았다. 가까운 곳에 얼음으로 미끄럼틀을 만들어놓아 잠시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놀이기구 대부분이 유료인데 미끄럼틀은 무료여서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었다.

 

세계적인 겨울축제여서 그런지 러시아,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자주 목격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옆에서 한국어로 대화하는 관광객을 보면 객지에서 우연히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동화 속 상상의 나라에 있는 신비의 궁전이 떠올랐던 조형물. 얼음으로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더군요.
동화 속 상상의 나라에 있는 신비의 궁전이 떠올랐던 조형물. 얼음으로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더군요. ⓒ 조종안

 얼음과 눈을 재료로 만든 불상. 대륙 기질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었습니다.
얼음과 눈을 재료로 만든 불상. 대륙 기질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었습니다. ⓒ 조종안

일반 조형물은 얼음 벽돌로 쌓아 실물 크기와 비슷했으나 불상과 사람 형상은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떠오르게 했다. 세계에서 오직 하얼빈에만 있을 것 같은 각종 얼음 조형물들이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면서 동화 속 신비의 나라 궁전을 둘러보는 것 같았다.

 

불빛이 합죽선처럼 반원을 그리며 돌아갈 때는 조명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웅장한 조형물과 화려한 조명에서 대륙 기질을 느낄 수 있었는데, 대형 얼음을 쌓느라 인력은 얼마나 동원됐는지, 실제에 버금가는 섬세한 조각은 누가 했는지 등 모든 게 궁금했다.    

 

얼음 조형물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게 아니라 실제 야경을 보는 것 같았다. 네온사인처럼 계속 바뀌는 얼음 성곽의 불빛은 감탄사를 터뜨리게 했다. 사람들은 칼날처럼 매서운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색색의 조형물을 카메라에 담았다. 

 

날씨가 추우니까 움직임을 빠르게 하느라 느긋하게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바닥이 온통 눈과 얼음이어서 더욱 춥게 느껴졌다.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입지 않았던 내복까지 준비해서 단단하게 무장했는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움츠러들었다. 손이 시려서 사진 찍기도 쉽지 않았다.

 

땀과 입김이 범벅되어 눈썹이 하얘진 일행도 있었다.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거나 배터리가 방전되어 사진 촬영을 못 했다며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추운 지방에서는 카메라를 따뜻한 품에 넣고 다녀야 한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옛 고구려 성터 같은 얼음 쓰레기장

 

 고구려의 성터를 떠오르게 했던 얼음 쓰레기장. 1년에 6개월은 밤으로 영하 200도 이하로 내려간다는 달나라 야경도 오버랩 되더군요.
고구려의 성터를 떠오르게 했던 얼음 쓰레기장. 1년에 6개월은 밤으로 영하 200도 이하로 내려간다는 달나라 야경도 오버랩 되더군요. ⓒ 조종안

관람을 마치고 버스로 돌아오니까 밤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소변이 마려워 밖에 나갔더니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사람의 시선을 피해야겠기에 눈 쌓인 언덕을 넘어가니까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산더미처럼 쌓인 얼음덩이와 어둠이 북극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빙등제를 준비하면서 조형물을 만들고 남은 재료를 버리는 얼음 쓰레기장인 모양이었다. 소변을 봤더니 녹기는커녕 얼음 두께만 두꺼워질 뿐이었다. 오줌 줄기가 얼어붙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안전가이드가 오기에 상황을 얘기했더니 "요거이 전부 얼음 쓰레기고만이요!"라고 했다. 가이드도 내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버려진 얼음 쓰레기 더미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다른 각도로 보면 옛 고구려 성터를 형상화한 작품 같아서였다.   

 

멀리 떨어진 전시장에서 비추는 불빛이 반사되어 더욱 아름다웠다. 얼음 쓰레기가 동굴의 암염처럼 하나둘씩 쌓인 거라서 자연미까지 더했다. '이글루'를 짓고 남은 빙설(氷雪) 같기도 해서 북극의 야경을 감상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얼음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옆에 있던 가이드가 "빨리 출발해야 됩네다"라고 해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야외에 버린 얼음 쓰레기 더미는 빙등제 전시장에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걸작이었다.

 

전시장에서 늦게 온 일행들은 춥다며 혀를 내둘렀다. 곧바로 출발하여 9시 45분 호텔에 도착, 노트북을 가져온 일행의 도움으로 이틀 동안 촬영한 사진을 USB에 저장했다. 일정을 마치니까 긴장이 풀리면서 피곤이 밀려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12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빙등제#하얼빈#송화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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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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