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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강경대씨와 고 최고은씨.
 고 강경대씨와 고 최고은씨.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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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31일 고려대에서 박원순 변호사는 젊은 대학생들에게 한 강연에서 "힘들수록 성공한다, 젊은이들이 걱정이 많은데, 절대 굶어 죽지 않는다"며 꿈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할 것을 독려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돈은 따라 온다"는 것이 생활이 어려울 때마다 스스로 되 뇌 이는 나의 생활신조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한국의 혹독한 현실은 박원순 변호사의 젊은이들을 위한 희망찬 독려나 나의 생활신조를 산산조각으로 무너뜨렸다. 한 꿈 많고 열정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예술인이 싸늘한 냉방에서 한겨울 추위와 배고픔을 못 이기고 영양실조로 굶어죽었다.

교회 장로가 서울을 하느님께 바치고 대통령을 하며, 영화배우가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고 G20 정상회의를 하는 나라에서 한 젊은이가 전쟁도 아닌 평화 시에 배고파서 굶어죽은 것이다.

지난 주 고 최고은씨 또래인 30대 초반의 덴마크인 독립영화제작자를 만났다. 명함에 '비디오 아티스트'와 '영화제작자 (film maker)'로 되어있었다. 그가 만든 영화를 보니 상업용 영화가 아니고 예술성을 추구하는 다큐멘터리 식 영화였다. "이것으로 생계가 해결되니?"라고 물었다.

"정부에서 제작비를 지원해 줍니다."

자기는 다큐 스타일 독립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주로 그런 작품을 만드는데 정부에서 재정지원을 해주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단다. 그이는 지금 한국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 활동 등 비극에 찬 한국현대사에 대한 독립영화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 왔다. 나는 그이와 최고은씨의 얼굴이 오버랩되어 보였다. 기분이 묘했다. 같은 나이 또래의 두 예술인이 하나는 굶어 죽고 하나는 마음껏 자기의 역량을 발휘하고...

최고은씨 사망 며칠 후 점심 시간에 10년 후배를 만났다.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고 최고은씨 죽음에 대한 무거운 이야기 등을 나누다가 헤어지고자 지하철로 내려가는데 가만히 내 손에 무엇을 쥐어준다.

"형, 어려우실 때 쓰세요. 인문학 하시는 분들을 도와 드리려고 모아놓은 겁니다."

돈이다. 내가 직장을 잃고 몇 달째 지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주는 것 같았다. 순간 목이 메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데 뜨거운 눈물이 뺨으로 흘려 내렸다.

강경대! 나는 그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도 나보다 10여 년 어리다. 1991년 4월 24일 명지대학교 학생이던 그는 시위 중 백골단이라 불리는 사복 경찰관들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 나는 그에 관한 기사를 1991년 4월 영국 유학 중에 봤다.

강경대의 죽음을 시작으로 전남대생 박승희(4월29일), 안동대생 김영균(5월1일), 경원대생 천세용(5월3일)의 분신에 이어,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의문사(5월6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분신(5월8일), 노동자 윤용하 분신(5월10일), 시민 이정순 분신(5월18일), 노동자 정상순 분신(5월22일), 성균관대생 김귀정 시위 도중 압사(5월25일),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 분신(6월1일) 등이 이어졌다. 1991년 4월에서 6월 소위 '분신정국'이었다. 영국언론에서도 한국의 '분신정국'을 연일 보도했다.

당시 나는 무작정 영국에 유학 와서 영국의 장학단체에 장학금을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400만 원의 장학금을 신청한 한 장학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면담을 했다. 그리고 1991년 6월 나는 그 단체로부터 신청한 장학금보다 10배가 많은 4000만 원의 장학금을 받았다. 너무나 놀라웠다. "무슨 착오가 생긴 것인가? 신청 액수보다 많은 10배를 주다니!" 지도교수도 놀라고 너무 반가워했다. 자기 생전에 장학금을 신청한 것보다 10배나 더 준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중에 나는 그 장학단체의 사무처장을 만났다. "아니 어떻게 신청한 장학금의 10배를 주시나요?"라고 놀라움에 물었다. 60대 초반의 나이가 지긋한 그 사무국장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단체에서 당신의 장학금 신청서를 검토 하는 기간 중 한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강경대 같은 분들이 한국에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당신이 노력 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장학금을 10배로 줍니다."

나는 놀라웠다.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젊은이 강경대의 죽음에 내가 큰 빚을 졌다. 그 후 나는 그 장학단체 등의 도움으로 영국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도 모르는 사람들로 인해 도움을 받는다. 앞서 말했듯이 1991년 4월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대학생 강경대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나를 구했다. 그래서 2000년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부터 지금까지 나는 항상 강경대와 같이 억울하게 생명을 국가폭력에 의해 잃은 분들에 대한 부채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그 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일을 했고 그 일을 통해서 국가폭력의 희생자인 다른 많은 강경대들을 만났고 그 분들의 눈물과 억울한 한을 보았다.

다시 최고은씨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녀도 강경대처럼 또 다른 '국가폭력'의 희생자다. 그 또래의 덴마크 영화 제작자처럼 그녀도 자신의 꿈을 키우고 열정적으로 살았어야 하는데. 그래서 훗날 제2의 백남준이나 제2의 스필버그가 되었어야 하는데....

국민의 안위를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나 국가는 필요가 없다. 각 개인이 자기의 소질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해주고 도와주는 것이 정부와 국가의 역할이다. 그런 정부를 빨리 만드는 길 만이 더 이상 강경대와 최고은을 재생산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 확신한다. "강경대 같은 분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 주세요" 이 말이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다.


태그:#최고은, #유인촌, #강경대, #김성수, #복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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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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