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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어려운 사람

2010년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인권대회에 참가하였을 때이다. 중국이 인권대회를 주최하다 보니 인권을 보는 시각이 참여자들 사이에서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서구자본주의의 자유주의적 인권관과 중국식 사회주의 인권관이 충돌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한쪽에서는 최고의 인권으로 인간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의 기초로서 사회적 구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토론이 끝나고 캐나다에서 정치철학을 전공하는 한 교수와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미셀 푸코(1926~1984)에 대하여 말했더니 자못 흥미롭게 내 말을 들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불어를 하는 사람이라 푸코의 책을 원전으로 읽었지만 참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의 책 어떤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교수에게 당신은 불어를 사용하면서도 그러니 나 같이 불어를 모르면서 그의 모든 책을 번역어로 읽어보는 사람은 어떻겠냐고 하면서 웃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를 독자들은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 미셀 푸코는 본 고장 사람들도 어렵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러니 그의 책을 읽으면서 머리가 쥐가 난 다느니 혹은 내 지적 능력에 한계를 경험했다더니 하는 말은 하지 마라. 그 사람의 글, 어려운 것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푸코에게서 무엇인가 얻기를 희망한다. 비록 그가 알쏭달쏭한 말을 했을지라도 분명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그의 책이 어렵지만 읽고 또 읽어본다. 그의 이야기를 조금씩 이해하면 세상이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비밀의 창을 열고 들어가 조금씩 우리에게 진실을 보여준다. 그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희열을 느낀다. 바로 그거야, 내가 알고 싶은 것이 바로 저거야, 하면서 박수를 보낸다. 그러니 조금 어렵더라도 푸코를 읽자, 그리하여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 세상의 진실을 알아보자.


푸코는 누구인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 michel-foucaul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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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 푸코. 1926년 프랑스 중서부의 프아티에서 태어났다. 부친을 비롯하여 조부, 외조부가 모두 의사인 집안에서 태어나 의학도의 길을 걸어갈 것이 기대되었지만 본인은 다른 길을 걸었다. 수재들이 들어가는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철학, 심리학, 정신병리학 학위를 받았다.
1961년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광기의 정신착란: 고전시대 광기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마친 다음 프랑스 중부 클레로몽페랑 대학 및 파리 벵센 대학의 철학교수로 일하다 드디어 프랑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학문의 전당 콜레주 드 프랑스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인간의 지식이 어떤 과정에서 형성되고 변화하는지를 탐구했고, 그 과정에서 각 시대의 지식의 기저에는 무의식적 문화의 체계가 있다는 사상에 도달하였다.

그는 이 같은 사상에 기초하여 다수의 문제작을 저술하였다. <고전주의의 시대에 있어 광기의 역사>(1961), <병원의 탄생>(1963), <말과 사물>(1966), <지식의 고고학>(1969),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1975) 등과 말년에 쓴 <성의 역사> 시리즈로 1권<앎의 의지>(1976), 2권<쾌락의 활용>(1984), 3권<자기에의 배려>(1984) 등이 대표작이다. 그는 1984년 사망하였다. 사망원인은 에이즈로 알려졌다. 그의 나이 57세 되던 해였다.

푸코, 근대의 이성에 도전하다

푸코가 추구한 평생의 과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이성을 해체하여 그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인간은 과연 이성적인 존재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 그 많은 부조리가 발생하는가, 죽고 죽이는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그것이 이성으로 설명 가능한가.

푸코는 고개를 저었다. 계몽주의의 결과 인간의 이성은 찬양되었다. 그로 인해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 해방, 풍요가 약속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바로 <근대>가 우리에게 약속한 유토피아였다.

그러나 푸코에겐 그러한 유토피아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근대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통제와 폭력 위에 설립된 건축물에 불과하였다. 그는 이러한 근대사회의 속성을 낱낱이 풀어헤치고 싶었다. 그것이 그가 그 어렵게 쓴 책들에서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푸코는 주체적 의식의 소유자로서의 인간 존재를 부정한다. 이런 면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철학과는 크게 다르다. 실존철학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결단할 수 있고, 결단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누구도 그것에 간섭할 수 없다. 누가 나의 인생에 간섭한다고 해도 종국적으로 그 인생의 책임자는 바로 '나'다.

이에 반해 푸코는 인간의 의식적 행위 너머에 존재하는 '구조'에 주목한다. 인간은 그 구조를 벗어나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결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푸코는 구조주의자다. 자신은 죽을 때까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감시와 처벌>,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책

<감시와 처벌 : 감옥의 역사>(미셀 푸코 저/오생근 역) 겉표지
 <감시와 처벌 : 감옥의 역사>(미셀 푸코 저/오생근 역) 겉표지
ⓒ 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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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여러 저작이 국내에 번역되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읽기 쉬운 책이 없다. 번역의 문제도 상당하다. 도대체 읽고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오생근 옮김, 나남출판)은 상대적으로 읽을 만하다. 해설서도 다수 나와 있으니 그 의미를 아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다.

푸코의 해설서 중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서상복 지음, 김영사)은 푸코와 하버마스를 대비한 책인데 어려운 푸코를 이해하는데 그만한 책도 없다.

그럼에도 <감시와 처벌>은 만만한 책이 아니다. 볼륨도 볼륨이지만 웬만한 끈기가 없으면 책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법학을 공부한 내가 푸코에 대한 책 몇 권을 읽고 이 책을 알기 쉽게 소개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인권을 매일 같이 이야기하고 연구하는 나에게도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푸코가 이야기하는 것이 결국 인간의 자유와 관련되어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내 분야이기 때문이다. 푸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고 내 시각을 보태 이 책을 풀어보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감옥의 역사, 신체형에서 자유형으로

<감시와 처벌>은 다음과 같은 유죄판결문으로 시작한다. 매우 충격적인 예이다. 그대로 옮겨 보자.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 사형수 호송차로 실려 와, 공개적으로 사죄할 것" 다음으로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23쪽)

이 판결은 실화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다미엥이라는 사람에 대한 판결문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도 근대 이전에는 이랬다. 조선시대 대역 죄인에 대한 능지처참형이 바로 그것이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받은 형벌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능지처참형이 다미엥이 받은 거열형에 근접했을까. 나는 그렇게는 보지 않는다. 유사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이 우리 조상들 보다 더 참혹했다. 서구인들의 과거 신체형은 우리의 상상을 넘는 공포 그 자체였다. 푸코는 이를 지극히 화려하고 호화스런 의식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왜 이런 처벌을 내렸을까. 권력에 감히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누구도 왕권, 권력에 도전하면 이런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민중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악한 신체형이 18세기 후반 이래 감옥에다 범죄인을 감금하여 교정하는 자유형으로 바뀌었다.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이제 더 이상 신체에 손을 대지 않는다. 감옥이라는 공간에 감금한 다음 규율을 통해 교육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형벌의 목적이 되었다.

이것은 합리적 계산에 입각한 효과적인 징벌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원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원칙이 있다. 이들 원칙 모두가 언뜻 보아도 매우 합리적이다. 첫 번째 원칙인 '양의 최소화 원칙' 하나만 보자.

"범죄는 그것이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범죄에 대한 그런 생각에, 그것보다 어느 정도 큰 형벌의 불이익을 결부시키게 되면 범죄는 저지르고 싶지 않은 행위가 될 것이다." (148쪽)

가혹한 형벌을 신체에 부과하지 않아도 범죄인이 형벌의 불이익을 생각하여 범죄를 억제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오히려 그 이상의 처벌을 하려다 보면 범죄인은 완전범죄를 노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범인 잡기만 어려워진다. 그것은 결국 범죄인이 권력을 농락하는 꼴이 된다. 그러니 이러한 원칙은 고도의 계산이 따른 것이다. 일종의 심리학이 동원된 것이다.

사람을 진짜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강압적인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이고 관념적이어야 한다. 예컨대, 계량화를 통한 비용-효과분석을 형사정책에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합리주의적 사고가 아닌가. 이런 사고의 결과가 바로 신체형에서 감옥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규율의 실체, 국가가 신체를 통제하고 정신을 통제한다

새로운 감옥의 탄생은 단순한 형벌제도의 변화가 아니다. 푸코는 이 변화가 18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인간과 사회를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규율사회'의 건설이라는 측면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본다.

감옥은 그 규율사회의 하나의 전형일 뿐이다. 푸코에 의하면 규율사회는 감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학교, 병원, 군대, 공장 등 주요한 사회기관 모두는 알게 모르게 공통적으로 인간의 신체에 관한 과학적인 관리법을 적용하여 예속적이고 복종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복종적인 인간, 푸코가 말하는 근대국가, 근대사회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사회의 시스템이 우리들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 사회가 규격화한 사람만이 쓸모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으로 키워지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 아니 어떤 때는 사회가 설정한 정상의 기준에서 일탈한 광인이 되어 사회의 쓰레기가 된다. '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으면 인간들이여 사회의 규율에 따르라' 이것이 근대사회의 핵심이다.

6.25전쟁 60주년 서울수복 기념 및 국군의 날 기념행사가 열린 지난해 9월 2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청광장까지 의장대들이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6.25전쟁 60주년 서울수복 기념 및 국군의 날 기념행사가 열린 지난해 9월 2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청광장까지 의장대들이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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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관찰한 바로는 이러한 규율사회의 전형은 군인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 후반 탄생한 상비군인들은 과거와는 다른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이들의 신체는 길러졌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신체에서 반항할 수 없는 인간이 탄생하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8세기 후반이 되자, 군인은 만들어지는 그 어떤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틀이 덜 잡힌 체격, 부적격한 신체를 필요한 기계로 만들면서 조금씩 자세를 교정시켜 나갔다. 계획에 의거한 구속이 서서히 신체의 각 부분에 두루 퍼져나가 각 부분을 마음대로 지배하여, 신체 전체를 복종시켜, 신체를 언제든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구속은 습관이라는 무의식적인 동작을 통하여 암암리에 그 작용을 계속하게 된다. 요컨대 '농민의 몸가짐을 추방해' 버리고, 대신에 '군인의 몸가짐'을 심어준 것이다." (204쪽)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을 푸코는 하나의 정치기술로 보았다. 이 정치기술은 단지 신체를 표적으로 강건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신체의 지배를 넘는 어떤 목적이 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신체의 지배를 통해서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정치기술의 최종목적이다.

이 기술의 요체는 강제 지배가 아니다. 통제되고 있는 사람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의지를 토대로 통제된다. 아, 이렇게도 말할 수 있으리라. 자기의 내적인 욕망에 의해 스스로 순종적인 신민이 되어 권력의 그물코 속에 자기를 걸어 두는 것이라고. 우리는 스스로 기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원해서 말이다.

국민체조 속에 숨겨진 권력의 음모

이쯤해서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말한 것을 우리 주변에 좀 응용을 해 보자. 푸코는 근대 사회의 권력의 속성은 유순한 신민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만일 푸코가 이 나라에서 살았다면 무엇을 보고 자신의 이론을 적용했을까.

분단국가로서 살아 온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회적 규율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푸코가 보기엔 유순한 신민을 만들어 내는 장치는 부지기수로 많은 사회다. 그 가운데서 옛날에 아무도 그 문제점을 생각하지 못한 국민 체조 하나만 생각해 보자.

국민체조.
 국민체조.
ⓒ 대한체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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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민체조라는 것이 성행했다. 학교는 물론, TV를 틀어도 아침에는 국민체조를 했다. 바로 이것이 푸코식 신체 조종의 정치기술이다. 국민체조를 통해 대한민국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특정의 규율체제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신체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지배한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똑같은 생각을 가져야 하며 일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거기에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태극기 앞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전형적인 인간이 탄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탄생한 대한민국 국민은 주체적인 인간이기보다는 권력자의 신민으로서 유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도 도도히 흘러가는 권력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방해를 한다면 그에게는 반역의 낙인이 찍혀 이 사회에서 살기 어렵다.

푸코가 희망하는 사회

우리들 대부분은 근대의 지식을 이성의 산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합리주의로 위장한 지식은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 근대 이전에 권력은 물리력을 행사하여 그것을 유지했지만 근대 이후에는 아주 근사한 지식과 교양에 의해 유지된다. 이제는 볼품없는 힘을 사용하여 인간을 지배할 필요가 없다. 우아한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을 통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통제된 인간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푸코의 시각으로 우리 교육을 보면 가슴 뜨끔해진다. 푸코의 주장에 대하여 우리가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교육이 통제된 인간을 만들기보다는 창조적 인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감히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는가.

하나밖에 없는 출구를 향해 한 눈 팔지 않고 달려가지 않을 수 없는 사회, 다양성보다는 획일을 강조하는 사회, 이견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가 우리 사회가 아닌가.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 순종형 인간이 될 것을 서약하고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간다. 슬픈 군상이다.

푸코가 인간의 주체성을 부정했다고 해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마저 포기했다고 오해하지는 마라. 그는 근대 사회의 본질적 속성을 가감 없이 파헤쳤을 뿐이다. 만일 그가 이런 작업을 통해 꿈꾼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진정 자유로운 사회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유의 진정한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누구도 선과 악을 독점하지 않고, 누구도 도덕과 비도덕을 갈라 부도덕의 화살을 쏘아대지 않는 그런 사회가 그에게는 유토피아인 셈이다. 그런 사회 속에서만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2011년 대한민국,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가. 푸코의 감옥에 갇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를 반성하면서 <감시와 처벌>을 한장 한장 읽어가자. 그 속에서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진짜 자유인이 되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박찬운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인권법 교수이며 변호사이다.



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 번역 개정판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나남출판(2016)


태그:#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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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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