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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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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박용만의 은밀한 여행경로. 북경(베이징)-상해-나가사키-서울-하얼빈-블라디보스토크-하얼빈-북경
 박용만의 은밀한 여행경로. 북경(베이징)-상해-나가사키-서울-하얼빈-블라디보스토크-하얼빈-북경
ⓒ 이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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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거래는 이뤄졌다. 일본 영사관의 비밀 지원을 받기로 한 것이다. '일본과 소련 그리고 중국 사이에 한인들만의 새로운 완충국을 건설하는 가능성을 찾자,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일본과 함께 막으면서 그 틈에 한인들의 둔전촌을 건설해 보자.' 그 두 가지 목적 때문에 일본도 접근의 대상이라고 발상의 전환을 한 박용만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자칫 목숨을 내놓는 도박일 수도 있었다.

애초에 남만주를 경유하는 것은 일본의 감시망을 돌파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상해에서 볼 일도 있고 차라리 상해로 내려가 소련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 그래서 중국인 우성(于醒)이라는 가명으로 다음 해 2월 5일까지 국경을 통과하는 입국허가증도 받아놓았다.

그런데 여비가 막연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은 결빙의 우려가 있어 11월 중에는 배를 타야 하는데 여비를 부탁한 블라디보스토크의 천도교 측으로 부터는 송금이 없었다. 박용만은 일본 영사관 측에 7000원의 자금지원과 안전한 여행의 보장을 요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릴 예정인 국민위원회와 연해주 거주 한인들 및 인근 지방 소련 공산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보고하는 조건으로서였다. 북경에서 암약하는 한인 밀정 김달하는 중간 역할을 잘 했다. 일본 영사관을 잘 설득해서 박용만의 이런저런 요구를 최대한 관철시켰다.

영사관의 한인담당 밀정인 통역관 목등극기는 서울의 조선총독부에 상신해서 박용만을 회유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조선에 들어와서 출경할 때까지 동행하고 안내해도 좋다는 허가도 했다. 일본 영사관은 여행 중 경찰이나 헌병 혹은 항만 직원들의 심문을 받을 경우 안전한 통행이 보장되도록 박용만의 사진을 부착한 통행증도 발급해줬다.

독립운동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일본측으로는 결코 손해나는 장사가 아니었다. 거물급의 전향을 받아낼 경우 독립운동을 위축시킬 수도 있고, 고이 돌려보낼 경우 변절자로 낙인찍게 함으로써 독립운동 진영에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할 수 있었다. 변절자는 동지에 의해 살해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일본측은 손 안 대고 코 푸는 재미를 즐길 수도 있는 거였다.

독립운동가 신변 보호 위해 대동한 일본 영사관 통역관

상해의 국제조계지(1920년대)
 상해의 국제조계지(1920년대)
ⓒ 미상(저작권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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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자로 북경 영사관이 본국 외무대신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박용만이 상해로 갈 때 5명의 동행이 있었던 것처럼 적혀 있다. 그러나 자세한 것은 알 길이 없다. 다만 목등극기가 박용만과 동행한 것은 분명하다. 두 사람은 12월 20일 북경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 상해에서는 나가사키 행 배를 탔다. 나가사키에서 부산 행 배로 바로 환승이 되지 않으므로 이틀을 여관에 머물러야 했다.

나가사키 항(1900년대 초)
 나가사키 항(1900년대 초)
ⓒ 미상(저작권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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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밖 멀리 보이는 하늘에는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높이 치솟은 굴뚝들이 하늘이 좁다는 듯 무거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나가사키는 일청전쟁과 일로전쟁 시부터 일본해군의 주력이 주둔하고 있는 군항이 아닌가. 미쓰비시 중공업이 운영하는 거대한 조선소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이 히로시마에 이어 원자폭탄을 투하할 정도로 군수공업이 집중된 지역이었다. 한국에 잠입해서 진해와 나진의 군사시설을 엿보고 미국 영사관에 보고했던 박용만은 나가사키의 군사시설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을 경유할 때 서울에서 얼마 체류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그게 꼭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박용만은 해삼위 지역의 공산주의 현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조건으로 일본 영사관과 거래를 했을 뿐이다.

일본 영사관은 안전한 여행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그에 응했다. 목등극기가 동행한 것도 조선을 통과할 때 박용만의 안전을 완벽하게 보장해주기 위함이었다. 조선 총독부에서 얼굴을 내밀거나 새로운 제안을 할 필요가 없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다만 그 기회를 이용, 일본에 대한 인식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그간의 조선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극진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얼빈에 도착한 것은 1924년 1월 13일. 이틀 후 다시 기차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하얼빈 역(1900년대 초)
 하얼빈 역(1900년대 초)
ⓒ 미상(저작권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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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에 모인 창조파 인사들은 1월 28일서부터 2월 5일까지 회의를 열었
다. 그 자리에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한국독립당'의 가장 중요
한 직책인 비서장에 박용만이 선출됐다. 창조파들이 상해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
로 갈 때도 그들과 동행하지 않은 박용만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뽑힌 건 그의 무게
때문이었다.

한국독립당의 결성은 국제공산당의 인정을 받는 또 다른 한인 공산주의 단체를 만드는 격이었다. 고려공산당 상해파는 러시아 정부에 보고해서 러시아로부터 그들을 축출하게 했다. 박용만은 러일조약의 체결을 앞두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해 또 다시 배신감을 갖게 됐다.

하얼빈 총영사는 1924년 2월 23일자의 '박용만 행동에 관한 건 보고'를 작성했다.

" ... 박용만은 상해, 나가사키, 경성을 경유해 지난 달 13일 하얼빈에 도착해 동 15일 오후 3시발 열차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이번 달 18일 오후 7시에 하얼빈에 돌아와서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호텔에 묵고 20일 오후 9시 남행열차 편으로 귀연(歸燕 - 북경귀환)의 길에 올랐다. 당지 체재 중 절대로 타인과 접촉을 피하고 하등의 언동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동인의 이번 여행은 모O의 양해가 있었음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가 시찰한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의 정황에 대해서 느낀 바는 다음과 같다..."

보고서는 북경 영사관의 협조 요청에 따라 하얼빈 영사관이 움직였음을 보여준다. 박용만이 제출한 보고문은 '국민위원회에 대해'와 '블라디보스토크 재주 선인에 대해'와 '일본공산당원에 대해'와 '그로데고우 지방 공산당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또 '연경야화'라는 제목의 글도 제출했다.

'적의 양해 하에 국내 출입은 부적절'... 국민위원회에서 제명된 박용만

블라디보스토크 역
 블라디보스토크 역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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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야화 (1) 
1. 하얼빈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 1월 12일 하얼빈에 도착해 익일 블라디보스토크에 타전해 국민위원회 제군에게 내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할 것이라는 걸 통고했다. 그 익일 반전(反電)이 있었다. 내게 뽀그라니치나야에 이르러 공산당 대표 기세르리요노프와 회견하라고 알려 왔다. 1월 15일 하얼빈을 출발해 뽀그라니치나야로 향했다.
2. 국민위원회에서 경험한 사실 (중략)
3. 위원회 폐막 후의 내외의 관계 (중략)

박용만은 블라디보스토크와 그 인근 지역을 방문해 지역 한인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들의 공산당에 대한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공산주의는 전통적인 가치나 체제를 뒤집어엎었다. 농경지를 국유화하고 농작물을 몰수했다. 소련의 비밀경찰은 쥐도 새도 모르게 인명을 살해했다. 종교는 물론 집회나 언론의 자유를 말살했다. 교육도 일당 독재에 맞게 고쳤다. 사상의 자유는커녕 통신의 자유도 금지했다. 이러한 현지사정들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의 추구를 당연시 하는 미국 사회에 익숙했던 박용만에게 적대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렇지 않아도 1921년 6월 소위 '자유시 참변'을 목격했던 그로서는 소련에 대한 악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유시 참변'은 한인들의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재앙이었다. 박용만은 그런 경험들을 제 2 항목에 적었다.
     
연경야화 (2)
1. 적화(赤禍)에 대한  론 (중략)
2. 적화방지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중략) 
3. 적화방지의 방책 (중략)
나의 우견으로서는 일본은 차라리 조선인민을 지휘해 출동하여 러시아를 정벌할 임무를 져서 시베리아의 동부를 숙청하는 것이 제일의 양책으로 고찰된다.
4. 연해주의 실황과 문죄의 시기 (중략)
5. 러시아 적군(赤軍)의 병력과 작전계획의 일절 (하략)

당시 일본의 밀정이나 배신자가 된다는 것은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한 번 배신자로 규정되면 처단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박용만이 그걸 모를리 없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이번 길을 택했다. 가장 큰 동기는 소련에 대한 실망감과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감 때문이었다. 이전에 가장 증오했던 적은 일본이었지만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다면 그 일본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적화방지 방책을 다시 곱씹으면 심중의 비밀코드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즉 "일본은 차라리 조선인민을 지휘해 출동하여 러시아를 정벌할 임무를 져서 시베리아의 동부를 숙청하는 것이 제일의 양책으로 고찰된다"는 문장은 시베리아 인근에 조선 인민을 집결시켜 무장화시켜줄 수 없겠는가를 타진하는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박용만 평생의 꿈이 둔전병의 양성이었고 이제 만주에서 자력으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의 힘을 빌어서라도 꿈을 이룰 수 없겠는가 찔러 보는 거였다. 일단 한인들의 무장세력이 조성만 된다면 그 진로의 조정은 차후의 문제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박용만은 국민위원회에 참석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일본 영사관의 협조와 묵인 아래 회의 참석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물론 허황하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자기의 숨은 구상도 은밀히 내비쳤다. 즉 만주에서 소련과 일본 사이에 완충국을 건설하는 것을 시도하자면 일본측과의 교감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과 동포사회의 공산주의 동정을 일본 영사관에 보고해야 한다는 얘기는 숨겼을 공산이 크다. 하얼빈 총영사의 보고가 근래 공개됨으로서 그 비밀이 드러난 것이다.

1900년대 초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거리 개척리의 모습
 1900년대 초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거리 개척리의 모습
ⓒ 미상(저작권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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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추방된 창조파 인사들은 상해로 돌아와 1924년 6월 7일 한국독립당 조직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6월 15일 국민위원회 집행위원 명의로 다음과 같은 결정서를 발표했다.

"국민위원 박용만이 적의 양해 하에 국내에 출입한 사실은 본인의 구공(口供)에 의해 명백하므로 독립운동 총책임을 부하한 국민위원 또는 비서장의 중직을 띈 신분으로 차등 불철저한 탈궤적(脫軌的) 행동을 감행했음은 개인의 일시적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데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이를 용허할 것이 아니다. 그러면 먼저 비서의 책임을 면하고 국민위원회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한다."

박용만의 제명을 결정한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은 김규식, 신숙, 이청천, 김응섭, 강구우, 한형권, 오창환, 김세준 등이었다. 결정서의 내용에
'개인의 일시적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데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의 유보적인 표현을 보면 박용만이 여러 동지들 앞에 자신의 행동을 떳떳하게 밝혔음을 알 수 있다. 국민위원회 집행위원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다수였으므로 일본 영사관에 무엇을 보고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극히 아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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