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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밤의 한 조각

 

지독히 크고 밝은 달이 떠 있었다. 내가 작업실 창문을 열자 샛노란 귤빛 달이 한 아름 쏟아져 들어와서는, 달이 차면 그 아름다움은 절정에 다다른단 사실을 알려주었다. 특히 오늘 같은 보름달은 범죄와 자살, 정신질환, 임신에도 영향을 준다고 믿어지는 미스터리한 그 무엇이다.

 

보름달? 그건 내게 여자를 말해주는 사물이기도 하다. 저녁 무렵부터 생리가 시작되려는지 가슴에 멍울이 잡히는 게 여간 아픈 것이 아니었다. 달이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예술가의 광기를 만든다는 숱한 이야기를 떠나서, 내겐 생리주기가 만들어내는 한 달 이란 기간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보름달에 대한 이미지다. 그와 더불어 여우원숭이 같은 포유동물의 발정기와 섹스는 보름달이 뜰 때쯤 일어난다는 학설은 생리 무렵이면 급격히 상승하는 여자들의 성욕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건 살아있는 젊은 여자로서 현실로 돌아와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보카에서 오빠의 전화를 받은 이후로 불안한 기분은 들쑤셔 놓은 잿불 마냥 야금야금 피어올랐다. 그건 좀처럼 꺼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구 짓밟아 꺼버리기도 아까운 지독한 딜레마를 만들었다.

 

"넌 거기 가선 안 돼."

그 때 그 꿈, 보카에서 꼬맹이는 잡아먹을 듯이 눈에 힘을 주고 다시 한 번 말했었다.

"왜지?"

"길을 잃을지도 몰라. 없어, 아무리 찾아도 없을 거야. 너랑 그는 이미 다른 시간으로 들어왔으니까."

꼬맹이는 말끝을 뭉개버리고는 몸을 떨었다.

 

"그럼 영원히 못 만나?"

"어딘가엔 바닷물이 합쳐지는 지점이 있을 거야. 하지만 거기서 영원히 못나올지도 몰라. 끝없이 헤엄치면서 늙어가는 거야. 넌 우리랑 다르니까... 젊음과 늙음이란 게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

꼬맹이는 다시 올려다보며 사뭇 걱정되는 투로 말했다.

 

"어떻건 지하실로 내려가야 하는 거지?"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물었다.

"돌아가, 일단은 돌아가. 날이 밝으면 약간의 힌트가 떠오를 거야. 남의 인생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는 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니니까 난 네게 답을 가르쳐주진 않을 거야. 길고 지루해도 자신이 알아서 가야해."

 

꼬맹이는 돌아서서 멜레나 쪽으로 시선을 향하더니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열망사냥꾼이 번식하는 곳이란 말야..."

하고 말을 흐렸다.

 

이윽고 왁자지껄 요란한 탱고 공연이 끝나고, 안내원의 표현을 빌자면 '흰갈매기의 행동을 생각하면 평생 안구에 습기가 차지도 않을 만큼 어이없는 촬영'을 마치자 다들 동의 하듯 녹초가 되어 의자에 쓰러졌다. 할머니는 후일에 또 다시 남은 촬영분을 공지하겠다는 말을 하고는 저만치로 가서 뒷수습을 했다.

 

날이 밝으면 정어리 공장으로 일하러 가야하는 마을 남자들은 적당히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와인병을 들고 테라스로 나왔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방죽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와 아이들의 행렬이 아득히 사라질 즈음, 우리 모두도 돌아가는 차에 올랐다.

 

내가 지나가자 기사 아저씨는 싱긋이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거참, 흰갈매기가 제법 신통하게도 꽃 피우는 법을 알아냈군요. 덕분에 멜레나도 한풀 꺾였으니 된 거지."

나는 슬그머니 그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움직일 때 마다 반도네온의 주름처럼 접혔다 펴졌다하는 그의 목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허, 분노의 술에 담근 알뿌리가 약효를 발휘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그 중 하나가 꽃을 피웠으니 그 알뿌린 아직 싱싱한 상태인 건 분명하고..."

"현재와 달리 뒤죽박죽 엉클어진 시간의 배열이네요. "

나는 조용히 차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어느 틈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자 부르릉 하며 시동 거는 소리가 그 적막감을 깨고 바다 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꼬맹이는 멜레나의 딸인가요?"

"아니요. 그 애는 일기장 주인과 각별했어요. 이쯤하고...그 다음은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하는 게 어때요?"

기사 아저씨도 본받은 것인지 모르지만 모두들 어느 선에선 입을 굳게 다무는 것이 일반화 된 듯했다.

 

"길고 긴 꿈이지?"

할머니가 졸린 눈을 비비며 끼어들었다. 더도 덜도 아닌 감자가 꽉 들어 찬 한 자루의 포대 마냥 할머니, 조제, 안내원 세 여자는 몸을 맞댄 채 담요 한 장에 파묻힌 채로 서서히 졸기 시작했다. 빨간 하이힐과 피디는 제일 뒷 자석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며 몸을 밀착하고 있었고 다른 스탭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잘도 코를 골았다.

 

그리고 버스는 예의 그 음습한 터널을 지나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전과는 달리 길고 지루하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페르도가 말했던 것처럼 나도 차츰 인생에서의 시간이란 의미를 알아가고 있기에 그 터널이 예전만큼의 검은 지루함으로 느껴지진 않는 것 같았다. 여행이란 과정에서 가장 핵심은 다음에 다가 올 또 다른 새로움에 대한 설렘을 포함해서 자신과의 대화를 수반한 '시간 즐기기' 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작업실에서 눈을 떴을 땐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저녁이었다. 조제와 나는 전날 늦게까지 와인 파티를 벌이다가 곯아떨어진 거였다. 한 밤에 잠들고 그 다음날 밤에 눈을 뜬다는 건 하루의 절반을 케잌 자르듯 뚝 떼먹힌 기분이었다.

 

"너가 보기엔 어때? 저 달이 꼭 인형 웨이터 얼굴 같지 않냐구."

나는 작업실 소파 한 구석에 파묻혀서 남은 와인을 마시고 있는 조제에게 말했다. 떡진 초록색 머리카락을 한 그 애의 모습은 그 자체로 거대한 알뿌리였다.

 

"있지, 열망 사냥꾼의 병균은 사람의 말을 통해 전염되는 거래."

조제는 읽고 있던 일기장을 탁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탁자 아래쪽에서 뭔가가 부스럭 거리더니 자박자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탄력 있는 스프링 같은 게 톡 튀어나오더니,

"아유, 우리 애기들! 이제 알아넸쪄?"

하고는 보름달만큼이나 크고 둥근 얼굴의 인형 웨이터가 생글거리며 다가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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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판타지 소설, #중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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