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최초 사용했던 청사 건물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최초 사용했던 청사 건물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박용만이 북경에서 상해로 간 건 1920년 3월 29일. 그 닷새 후 임시정부 각원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안창호에게 말했다. "저는 군사(軍事)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외교의 일은 볼 수가 없습니다. 면직(免職)을 원합니다." 그의 소청은 국무원 회의에서 수락됐다. 4월 19일자로 의원면관이 됐다.

그 두 달 후인 6월 박용만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신채호, 유동열 등과 함께였다. 아직 가족들은 그곳에 살고 있어 블라디보스토크는 그에게 친숙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두만강을 건너가 일본군을 습격하는 의병활동의 전통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박용만이 노리는 것은 하와이의 대조선국민군단과 유사한 군대조직을 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번듯한 농장이라든가 다른 물적 자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젊은 장정들을 새로 규합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박용만은 그 해 말 신채호와 함께 북경으로 돌아갔다. 군사단체들의 통일을 이루자면 어떤 대책이 필요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각지의 단체들을 회동시키고자함이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대책 없는 승리에 그치고 말았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무장투쟁을 지휘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자잘한 독립군들의 단체들을 한 데 통합하는 게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 이후 많은 부대들이 시베리아로 이동했기 때문에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는 이듬해인 1921년 4월 20일에서야 북경 교외 3패자화원(三牌子花園)에서 열릴 수 있었다.

참가한 단체들은 내지국민공회(內地國民會-박용만), 하와이 국민군단(김천호, 박승선, 김세준), 북간도국민회(김구우), 서간도군정서(송호), 내지광복단(권경지), 하와이독립단(권승근, 박건병, 김현구), 조선청년회(이장호, 이광동), 노령대한국민의회(남공선), 내지노동당(김갑), 내지통일당(신숙, 신달모, 황학수) 등 10여 개였다.

1930년대 북경거리 풍경
 1930년대 북경거리 풍경
ⓒ 秦風(저작권해제)

관련사진보기


회의에서는 두 가지 의제가 주로 논의됐다. 시베리아와 만주에 산재한 독립군의 행동통일 방안과 독립군의 총지휘를 상해 임시정부에 위임할 수 있겠는지 여부였다. 첫 의제에 대해서는 시베리아의 독립군부대는 후일의 국내 '대진공'을 위해 준비하고, 만주의 부대들은 지휘계통을 통일하여 국경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소진공'을 감행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둘째 의제가 논의될 때 하와이 대조선독립단 대표 권승근이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보도한 영자신문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장차 독립하는 것을 전제로 한국을 국제연맹의 통치에 둘 것을 청원하는 것이었다. 이 유명한 '위임통치청원서'는 이승만과 정한경이 서명해서 1919년 3월 3일 백악관에 전달했으나 회답을 받지도 못한 채 물거품으로 끝났다.

애오라지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을 마다 않고 있는 독립 운동가들에게는 신채호의 표현처럼 '있는 나라를 팔아먹는 이완용 보다 없는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이 더 역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군사통일주비회는 참가단체 전원의 이름으로 이 불신임 결의안을 4월 27일 임시정부에 통고하고 3일 이내에 임시의정원의 해산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국적의 토벌', '재 북경 야욕정객의 음모', '야욕한의 주토'라는 등의 격렬한 문구로 비난했다.

상해를 떠난 이승만이 마닐라를 경유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1921년 7월 8일. '태평양시사'에 '이승만의 행방불명'이라는 기사가 실리자 이승만파의 부인네들이 떼 몰려와 항의하고 뒤이어 그들의 남편들이 몰려와서 신문사를 짓부순 것은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하고 난 다음 벌어진 일이었다.

박용만이 주동이 돼 임시정부 불신임안을 결의한 사실을 상해를 떠나기 한 달 전쯤 접했을 이승만은 분통을 삭일 수 없었을 게다. 하와이에 도착하자 그 사실을 추종자들에게 알렸다. 때마침 '태평양시사'의 기사가 그들의 분통에 불을 댕겼다. 그렇다고 8월 2일 벌어진 '태평양시사' 습격사건은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파의 중견들이 대원들에게 8월 22일 발송한 '통첩'을 보면 박용만파에 대한 적개심은 숫제 살기가 번득인다.

"우리가 이번에 거사한 일은 3년 동안을 두고 참고 견디어오던 것이 다 헛것이요, 점점 해만 더 받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임시정부의 운명과 대한독립이 점점 퇴보되는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을 들여다보고 어찌 더 참고 더 견딜 수 있사오리요. 그러므로 저 대역부도(大逆不道) 박용만의 당류들을 박멸하여 위로 정부를 보호하며 아래로 민심을 안돈시켜 놓아야 우리의 정무 곧 내치 외교에 차서를 따라 진행할 수 있을 것을 깨닫고 물질과 몸과 성력을 다 바쳐 왜적을 박멸하기 전에 저 왜적 보다 더 해를 주는 박용만의 당류들을 진압한 후에 순전무의한 애국민의 충심단결로 왜적을 소탕하자는 의기남녀가 일심일성으로 분발 용진함이니(중략)"

이 '통첩'은 하와이에 있는 미국 연방수사국(FBI) 손에 들어가 기록물로 보존됐다. FBI가 주목한 부분은 '통첩' 끄트머리에 있는 내용이다.

"이 글발을 저쪽 사람들에게 가지 않도록 조심하시와 비밀을 주장하시고 말로나 힘으로나 능력이 자라는 대로 저자들을 뼈가 저리고 마음이 아프도록 위협을 보이시는 것이 상책이올시다. 농장에서는 호항 보다 더욱 좋지 않습니까? "

'농장에서는 호항 보다 더욱 좋지 않습니까?'는 경찰서에서 멀리 떨어진 농장은 은밀히 테러를 하기가 더 용이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읽힌다. FBI는 그 때문에 비상을 걸고 감시에 들어갔다.

상해 임시정부는 태생적으로 갈등 요인을 안고 있었다. 지역과 출신과 경력에 따라 구성원들의 노선이 각각 달랐다. 마음에 드는 직위가 주어지지 않거나 자기의 지위가 특정인의 그것 보다 낮을 경우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박용만, 신채호, 신숙처럼 상해의 임정을 해체하고 다시 새로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조파'로 불린다.

   
신채호(1880-1936)
 신채호(1880-1936)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박용만(1881-1928)
 박용만(1881-1928)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비록 창립 당시부터 하자와 결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해체하는 대신 보완하고 개혁하자는 '개조파'로 안창호, 박은식, 김창숙 등이 있었다.

    
안창호(1878-1938)
 안창호(1878-1938)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은 임정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고수파라고 볼 수 있다.

   
김구(1876-1949)
 김구(1876-1949)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노선과 주장이 달라 서로 진영을 달리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 결과 한 데 모아도 신통치 않을 운동 역량은 갈갈이 찢기게 된다. 그것은 전선을 하나 더 만드는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기도 하다.

'창조파'에 속한 사람이 다수이긴 했지만 박용만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된 것은 비록 그의 노선이 정당하다 하드래도 중국에서 그의 위치를 고립시키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의 불행한 종말을 앞당기는 악수(惡手)가 될 수도 있었다. 1924년 1월 박용만은 창조파들이 회동한 국민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  그때 일본 영사관의 조건부 지원을 받음으로써 곤혹스러운 흠집을 남기게 된다.

'군사통일주비회'가 채택한 선언서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됐다.

"본 군사통일회의는 일반국인의 의사를 대표하여 중국 상해에서 부정당 불신성하게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일체로 불승인하고 과거와 장래의 제반 시설을 무효로 인(認)함과 1919년 4월 23일 내지 국민대회에서 발포된 대조선공화국 임시정부의 계통을 승(承)하여 일신(一新)히 조직할 일과 이를 조직함에는 전국 민의에 부응하기 위해 국민대표회를 소집할 것을 내외에 선언하노라. 우리의 독립문제는 군사가 아니면 해결이 불능이요, 군사운동은 통일이 아니면 성공은 난망일세. 군사통일의 절대필요에 의해 내외지 각 단체의 연합으로 성립된 본회의는 그 목적이 실로 이에 있으며 그 정신이 또한 이에 있을 뿐이로다.(하략)"

군사통일주비회가 열렸던 북경의 건물
 군사통일주비회가 열렸던 북경의 건물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상해임시정부의 불승인 이유로는 4 가지를 들었다. 이것은 한 군데로 힘을 몰아주지 않는 분열행위로 지탄받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임시정부가 호응을 받을 수 없는 결점들이 무엇들이었나를 짚어보게 한다.

첫째 - 상해임시정부는 원래 상해 한 구석에 있는 극소수인의 사심으로써 만세성중(萬歲聲中) 내지 국민대회에서 조직 발포된 정부를 무시하며 또한 내외지 동포의 의사를 널리 모우지 않고 국부적으로 조직됐으며 처음부터 대미위임통치 청원사건이 발로됨을 불구하고 이승만이 그 수령을 맡았으니 그 조직이 근본적으로 부정당, 불신성한 바이요.

둘째 - 상해임시정부는 성립 이래 내놓을 성적이 없을 뿐 아니라, 러시아에 있는 대한국민의회에 대하여 무성의한 타협을 개시한 당시에 사기적 수단으로서 내지정부 봉대(奉戴)의 조건을 상해 정부 개조의 형식으로 환작(幻作)하여 대국(大局)의 분규를 야기했으며,

셋째 - 상해임시정부는 3년간 시정이 각각 자가의 사당을 심거나 문호를 세움에 야비적(野鄙的) 행위 뿐으로서 그 영향은 점차 일반사회에 파급되어 독립선언 당시에 거국일치로 통일되었던 민심을 분열 상태에 빠지게 했으며,

넷째 - 상해임시정부는 국가의 무상한 수치요, 민족의 막대한 오욕인 대미위임통치청원사건에 관하여 대방(代方)으로 미국에 향하여서나, 안으로 한국인에게 향해서나, 밖으로 열방에 향해 일언의 변명이 없을 뿐 아니라, 외려 그 각원(閣員)은 매국매족의 행위를 감행한 이승만을 절대로 옹대(擁戴)하여, 밖으로 국가의 체면을 불고(不顧)하고, 안으로 민족의 정신을 현혹케 하니, 대미위임통치에 대해 묵인 혹은 뇌동의 책임을 못 면할 바이라.

'군사통일주비회'는 군사 총지휘부를 상해임정에 맡기는 결의 대신 임정 불승인과 '국민대표회' 소집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한 후 막을 내렸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 참고문헌 -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