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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사로잡은 책 <분개하라!>.
 프랑스를 사로잡은 책 <분개하라!>.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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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부터 서점가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베스트셀러가 프랑스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분개하라!(Indignez vous!)>라는 제목의 이 책은 30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팸플릿 형식의 소책자다. 이 책은 프랑스 남부도시인 몽펠리에에 위치한 작은 출판사에서 작년 10월 말에 8000부가 출간된 후, 불어식 표현을 빌리자면 "작은 빵처럼"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출간된 지 석 달째인 지금까지 50만 부 이상 팔렸고, 출판사에서는 쇄도하는 주문을 커버하기 위해 85만 부까지 계속 찍어내고 있는 형편이다. 이 책은 유럽과 미국, 일본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될 예정인데 그중에는 한국어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93세의 노인인 스테판 헤셀(Stephane Hessel)이다. 헤셀은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헤셀의 부모는 유대인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1950년대 후반 프랑스 영화계를 강타한 누벨바그의 중요 멤버인 트뤼포의 영화 <쥘과 짐>의 모델이기도 하다.

부모를 따라 1925년 프랑스로 이주한 헤셀은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철학 전공)을 마치고 1937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다가 1944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헤셀은 유대인 수용소에 감금돼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수용소 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레지스탕스의 도움을 받아 사형 직전에 신분을 바꾸는 데 성공, 극적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구하게 된다. 종전 후엔 유엔 비서직을 맡아 1948년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가하였으며,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살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좌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헤셀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일종의 유언장을 남기고 있다. 온몸으로 겪어낸 20세기의 인생경험을 살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가 전하는 유언의 핵심은 책의 제목에 그대로 담겨 있다. "분개하라!"

그러면 무엇이 이미 한 발을 무덤에 걸친 이 노인을 분개하게 하는 것일까? 프랑스 내부적으로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펼치는 외국인 이민자 추방 정책, 퇴직 연령 상승, 사회보장제도 파괴, 기득권층을 위한 배금주의 정책이 헤셀을 분노하게 했다. 대외적으로는 이윤에만 눈독을 들이는 신자유주의 경제,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봉쇄 정책 등이 헤셀의 화를 돋우는 요인들이다.

"이보시게 젊은이들, 가장 나쁜 태도는 무관심이라오"

헤셀은 <분개하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레지스탕스(저항)의 기본 동기는 분개였다." (11쪽)
"우리에게 있어 저항하는 것은 독일군의 점령, (프랑스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는 알제리 (독립)전쟁이 이어졌다. 알제리는 독립국이 되어야 했다. 그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1943년에 적군을 이끌고 온 스탈린이 나치에게 승리했을 때 우리는 모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 우리가 이 참을 수 없는 (스탈린) 독재에 항거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미국의 자본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공산주의에 한 귀를 열어놓고 있어야 했던 상황이긴 했어도. 나의 기나긴 삶은 내게 분개할 이유를 끊임없이 제공해주었다." (12~13쪽)

그러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적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헤셀도 그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오늘날 분개해야 할 이유가 덜 분명해졌고 이 세상이 더욱 복잡해진 것은 사실이다. 누가 명령을 내리고 누가 결정을 하는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모든 종류의 흐름을 구별한다는 게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 그러나 이 세상에는 참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보기 위해선 잘 바라보고 찾아야 한다. 난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찾아보시오, 분명히 찾을 것이오.' 가장 나쁜 태도는 무관심이다. '무슨 방법이 없잖아, 나 혼자 알아서 처리해야지 뭐.' 당신들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서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를 잃고 있는데, 그것은 분개하는 능력과 그 결과로 이어지는 앙가주망이다." (14쪽)

잘못 돌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 분개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앙가주망(참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충분치 않다는 것이 이 노인의 주장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분개하라!>를 1면에 다룬 <리베라시옹> 2010년 12월 30일자.
 베스트셀러가 된 <분개하라!>를 1면에 다룬 <리베라시옹> 2010년 12월 30일자.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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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운 등을 긁어주어 베스트셀러가 되다

<분개하라!>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에 획득한 사회복지가 사르코지 집권 후 여러 방면에서 박탈되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분노를 삼키고 있었던 프랑스인들에게 <분개하라!>가 경종을 울렸기 때문이다.

또한 출판 시기가 선물을 주고받는 연말과 맞아떨어진 점도 작용했다. 지난해 말에는 초콜릿 대신에 이 소책자를 선물하는 기현상이 발생하여 책의 판매부수를 증가시켰다. 한 권에 3유로라는 저렴한 가격도 여기에 한몫했다.

또한 저자 헤셀의 독특한 약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작용했다.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한 헤셀은 잃어버린 인간의 가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사르코지의 정책과는 정반대다. 헤셀이 주장하는 것은 희망과 인간의 자긍심을 되찾는 일이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것은 그만큼 프랑스인의 희망과 자긍심이 하락했다는 증거다. <르 몽드>(1월 3일자)는 일간지 <르 파리지엥(Le Parisien)>이 최근 실시한 BVA-Gallup 여론조사 결과 2011년을 보는 시각이 가장 비관적인 이들이 프랑스 사람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53개국의 6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 조사에서 61%의 프랑스인이 올해 경제가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는 다른 나라(28%)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또한 67%의 프랑스인들이 올해에는 실업률이 작년보다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으며, 37%의 프랑스인들이 2011년이 2010년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해가 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속가능 균형성장'을 지향하는 새 글로벌 경제질서를 결정할 서울 G20(주요 20개국)정상회의 본회의가 열린 2010년 11월 12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본회의장 입구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지속가능 균형성장'을 지향하는 새 글로벌 경제질서를 결정할 서울 G20(주요 20개국)정상회의 본회의가 열린 2010년 11월 12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본회의장 입구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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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스테판 헤셀, #분개하라, #사르코지, #신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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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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