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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부끄러운 귀촌 생활의 기억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 코너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는 이야기는 귀농, 귀촌 관련 기사들이다. 거기에는 진솔한 삶의 얘기들, 시골 생활의 고충 같은 것도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이면은 애써 외면하고 내가 꿈꾸는 대로의 시골 생활만을 미화해서 상상하곤 한다. '언젠가는'이라는 단서 아래 그려보는 미래에 대한 꿈마저 없다면 이 팍팍한 삶을 견디어 나갈 희망이 없다.

 

그렇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야말로 귀촌에 실패한 부끄러운 경험을 세월 저쪽에 숨기고 있다. 그러니 나야말로 검증된 귀농자격 미달자이다. 그때 일 년 반의 시골생활에서 얻은 교훈이 없었더라면 세월의 어느 한 지점에서 또다시 나를 꿈같은 귀농대열에 끼워 넣으려는 대책 없는 시도를 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나의 귀촌 경험은 어떤 실패의 내력을 갖고 있기에 그것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만큼 그런 꿈마저 꾸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자책하게 되는 것일까.

 

96년 봄. 결혼 날짜를 잡고 나자 살집 장만에 골몰하던 남편은 다소 엉뚱한 제안을 했다. 전원생활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말만 시골이지 거의 도시나 다름없는' 지점에 근사한 전원주택이 하나 나왔던데 거기서 좀 특별한 신혼생활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관념이 희박하고 현실감각이 형편없는 나는 뭐, 그것도 괜찮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예비신랑은 나를 덜컹거리는 고물차에 태우고 도시를 벗어나 낯선 방향으로 한참을 달리기 시작했다. 별로 멀지 않다더니 차는 무려 삼십 분가량을 쉬지 않고 달렸고 말로만 시골이 아닌 진짜 한적한 시골 면 소재지에 당도해서야 브레이크를 밟았다. 비좁은 농로를 따라 왼쪽으로 차가 조금 더 들어가니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 나타났고 거기 마을 왼쪽에 외따로 떨어진 집이 그가 봐둔 집이었다.

 

마을 한 귀퉁이에 자리한 그 집은 방이 네 개에 거실은 달리기를 해도 될 만큼 넓었다. 조경이 잘되어 있어서 앞뒤 뜰에는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있고 앞마당엔 연못까지 파놓아 말 그대로 근사한 전원주택이었다. 큰돈을 들여서 지은 집 같지는 않은데 주인이 손수 공들여 짓고 가꾼 집임엔 틀림없어 보였다. 집 규모에 비해 전세금은 도시 단칸방 전세금 수준이라는 거였다.

 

"여기 연못가에서 친구들 불러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캬! 생각만 해도 죽인다."

 

도시의 변변한 신혼집 하나 마련할 여유가 없던 남편은 당시 어떡하던지 철없는 예비신부를 그곳 시골에 주저앉혀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과일나무가 종류 별로 안 심어진 게 없어. 꽃도, 사계절 내내 만발하겠네. 예쁜 붕어를 길러볼 거야. 근데 왜 연못에 물이 없어?"

"물? 그거 바로 채우면 되지, 그게 뭐 일이야. 그리고 저기 입구에 밭이 이백 평이나 돼. 주인이 그것도 덤으로 지어 먹으래. 소일거리로 괜찮겠지?"

 

유선방송도 인터넷도 가설되지 않은 시골집에서 주로 혼자 낮 시간을 보내게 될 예비신부를 배려해서 소일거리까지 걱정해 주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심심할 새가 없었다. 시골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을 들은 양쪽 친구 선후배들의 호기심 어린 방문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번갈아 가며 우리 집을 찾는 양쪽 지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삼겹살에 소주가 가득 들려 있었다.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인데 구불구불한 시골 길을 그들은 잘도 찾아왔다.

 

그렇게 방문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밤새워 술 마시는 날이 많아지고 봄이 훌쩍 지나 여름이 되자 술자리는 시원한 마당으로 옮겨졌다. 예쁜 붕어를 놓아 기르겠다던 연못은 알고 보니 물을 채우고 나면 며칠 만에 슬그머니 물이 말라버리는 부적격 토양이었다. 붕어를 기르기로 했던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은 채 우리는 말라버린 연못가에 앉아 붕어처럼 술을 마셨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락호아!" 시골에 처박힌 친구를 위해 멀리 도시에서 찾아오는 고마운 벗들과 우의를 다지며 이어지는 술자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고 객이나 주인이나 분위기에 취하다 보면 날을 새기 마련이었다. 초저녁 식사를 겸해 시작된 술자리는 훌쩍 새벽이 되기 십상이고 우리들 술자리가 비로소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새벽녘이면 마을 농부들은 일찌감치 삽을 들고 경운기를 몰고 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밭이랑 마당에는 무서운 기세로 풀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마당 정원은 어느새 꽃이나 나무보다 무성한 풀들이 몽땅 점령하고 있었다. 내 깐에는 틈틈이 풀을 뽑고 김을 맨다고 했지만 비가 한 번 오고 나면 훌쩍 자라버리는 식물들의 무서운 생명력은 게으른 인간의 노동력보다 훨씬 질기고 강했다. 나중에는 뽑다가 지쳐 에라, 저것들도 생명인데 그냥 내버려두자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잡초가 너무 우거진 거 아니니?"

 

더러 걱정을 보태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들 또한 겨우 풀 몇 포기 뽑아 주는 시늉을 하고는 이내 술자리로 돌아앉았다. 정원이 앞뒤로 너무 넓었다. 마당에 딸린 텃밭에, 덤으로 짓게 됐다며 고마워하던 이백 평의 고추밭 고랑의 잡초들까지 나를 비웃듯이 왕성하게 자라났다.

 

"아, 몰라. 더 이상 못해. 태평농법이라는 것도 있잖아? 난 그냥 태평농법으로 할 거야"

"네 덕에 이런 집에서 술도 마시고 좋다. 여긴 참 별도 좋고 달도 밝구나. 느그들 참 잘 생각했어. 어떻게 시골에 살 생각을 다 하고 말이야. 응?"

"난 너희들이 이렇게 찾아오니 너무 좋아. 정말 고맙고. 앞으로도 자주 와야 돼."

"안 그래도 야, 우리, 자주 오고 싶어. 술 마시기 이렇게 좋은 데가 어딨냐. 공기가 맑으니깐 술도 전혀 안 취하는 거 같다야. 건배"

 

친구는 취해서 꼬부라진 혀로 전원생활을 감행한 내 탁월한 선택을 격려해 줬다.

그런 우리들의 포석정 연못가의 한심한 작태를 못내 못마땅한 시선으로 죽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다름 아닌 마을 이장님이었다. 울력에 한 번도 안 나오고 소문난 애주가인 자신을 한 번도 술추렴에 정식으로 초대한 적 없는 이방인들이 이장님 눈에는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모 성씨가 주류를 이루는 전통적인 집성촌 마을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젊은 것들이 어느 날 홀연히 흘러들어온 것부터가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새벽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을 울력에 동참하라는 이장님의 간곡한 당부를 마이크로 여러 차례 듣긴 했지만 농업 관련 공사 같은 그런 일들은 우리랑 별 상관없는 일이라는 판단 아래 묵살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럴 때는 동네서 살짝 외딴집이라 모르쇠 하기에 좋은 집 구조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늘 새벽까지 술자리가 이어지는 일이 잦은 우리 일상에 새벽 울력은 심각한 시차상의 문제가 있었다.

 

울력에도 안 나오는 젊은 것들... 당신들 간첩이지?

 

이장님이 우리를 향해 취한 특단의 조치는 가혹한 것이었다. 특기할만한 사건이 좀처럼 일어날 리 없는 무료한 시골지서에다가 우리 부부를 간첩으로 신고해버린 것이었다. 그날도 친구 부부가 전날 놀러 와서 함께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오전에 가까운 절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그 절에는 우리랑 아는 총각이 출가를 해서 수행 중에 있었다. 실컷 마시다가 지겨워지면 생각났다는 듯이 누군가 '김 OO이가 입산한 절이 이 부근이지 아마? 우리 낼 거기나 한 번 갈까?' 해서 일정을 잡게 되는 것이 우리 집 방문객들 일반적인 접대 코스였다.

 

오전 중에 차를 몰고 막 대문을 벗어나 얼마나 갔을까. 길가 찔레 덤불 안에서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이 후다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하마터면 차로 칠 뻔했다. 우리도 놀랐는데 우리랑 마주친 경찰은 더 놀라는 눈치였다.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들켜버린 상황이 몹시 당황스러운지 경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마침 바쁜 용무라도 있다는 듯이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경찰이 왜 우리 집을 살피고 있지? 그 외길은 우리 집으로만 향하여 난 길이었다. 하지만 딴 용무 차 그냥 지나는 길인가 보다 하고 그 상황에 별다른 의심을 품진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마을에서 우리가 행한 이질적인 행위에 비해 너무 무신경하고 낙관적인 젊은이들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날 밤 우리에게 이 근사한 전원주택을 세 내주고 자신들은 읍내에서 훨씬 더 근사한 진짜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다는 집주인 아주머니가 들이닥쳤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지금 경찰서엘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오는 길에 그 방정맞은 이장과 한바탕 싸우고 오는 길이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이유인즉슨, 우리 부부를 마을 이장님이 지서에다 아무래도 그 젊은 사람들 간첩인 것 같다고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당연히 집주인을 몰래 불러 우리에 대한 신상정보를 캐물었던 모양이다. 이장이 우리를 지서에 간첩으로 신고한 근거는 이런 것이었다.

 

어느 날 마을에 홀연히 흘러들어온 정체불명의 젊은 것들이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마냥 놀고먹는데 뿐만 아니다. 역시 수상한 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데 그들은 모였다 하면 밤을 새워 떠들고 놀기 일쑤다. 그런가 하면 부부가 끄떡하면 차를 몰고 나가서 하루나 이틀씩 집을 비우기도 한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동네 이장이라는 막중한 입장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불온한 자들이다. 반드시 그 간첩들을 색출해서 평화로운 우리 집성촌이 뜨내기 간첩들의 접선장소가 되는 것을 막아 달라.

 

이장님은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우리 다음으로 마을에서 한가한 분 같았다. 이사 오고 나서 얼마 후 일부러 친정 부모님까지 오셔서 마을 이장님이랑 이웃 분들한테 인사를 했다. 젊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살겠다고 하니 마을 어르신들이 모쪼록 잘 봐 달라 그런 뜻의 당부 말씀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장님 눈에는 여전히 우리가 미심쩍은 이방인들이었나 보다.

 

그리고 애주가인 이장님께 술을 대접하지 못한 건 순전히 우리 불찰이었다. 술을 대작하기에 왠지 어려운 상대였던 점도 있고, 아니라도 이장님은 이미 전작이 있으셔서 늘 충분히 취해있었다. 남편은 하릴없이 놀고먹는 게 아니라 그 무렵 지방방송국에서 일감을 얻어 대본을 며칠 분량씩 써서 한꺼번에 보내는 이른바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다. 며칠씩 집을 비우는 건 더러 촬영 팀을 따라 합숙을 하느라 그랬던 거였고, 나는 그동안 시골집에 혼자 있기 무서워 친정집에서 지내곤 했던 게 진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제의 전날 밤 우리 집에 묵었던 친구 부부는 과거 직장 내 노조활동에 깊숙이 관여하여 노동운동을 하다 만나 결혼한 이들이었다. 술에 취해 질렀던 말들도 '정권이 이 모양이니', '누구누구는 변절자'라느니 하면서 다소 격앙된 표현을 쓰기도 했다. '노동자의 현실' 운운하며 울부짖기도 했던가. 그렇지만 그런 대화쯤이야 그 시절 젊은이들이 처해 있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심심찮게 듣게 되는 한탄이었다.

 

하지만 혐의 없음은 우리 측 낙관이고 의심의 눈으로 보기엔 충분히 간첩행동과 연관 지어 생각해볼 만한 일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비단 그날 일만이 아니라도 우리 집을 드나들던 내 친구와 남편 친구들 또 선후배들 면면을 엮자면 조직도 하나쯤 만들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지만 참 이장님도. 그렇게 허술한 간첩들이 어디 있다고. 아무리 군기가 빠진 간첩들이어도 그렇지. 마당 연못가에 질펀하게 앉아서 술잔을 돌려가며 고성방가를 내지르며 작당하는 간첩모의라니. 아무래도 그건 이장님의 괘씸죄가 너무 터무니없는 죄목을 갖다 붙인 꼴이었다.

 

우리같이 허술한 간첩들도 있나요?

 

정작 집주인 아주머니가 화가 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공들여지어 놓은 집을 사정이 있어 세를 놓으려고 하니 이런 시골까지 들어와 살겠다는 사람들이 좀처럼 나타나질 않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럴싸한 집 외양에 홀려 덥석 세 들어 살겠다는 이런 시세 어두운 세입자를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세입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어렵사리 얻은 세입자를 또 마을 이장이 훼방 놓아서 쫓아내려는 심산이라는 거였다. 우리 이전에도 이 집에 세입자들만 들면 별별 트집을 다 잡아 텃세를 부리고, 결국 마을을 뜨게 만드는 것으로 이장님은 이질적인 전원주택에 대한 적의를 표출했던 모양이었다.

 

대부분 친절한 이웃들과 달리 우리만 보면 불콰한 얼굴을 들이대는 이장님을 우리는 약주가 과하신 탓으로 돌렸지, 그게 우리에 대한 적의인 줄을 몰랐다. 이장 직권으로 자주 소집되는 울력에 상습적으로 불참하는 주민들을, 마이크를 통해 공개적으로 질타하시던 내용도, 그에 따르는 특단의 조치가 내려질 것이라는 엄포도 실은 우리를 겨냥한 것이라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다 하다가 이젠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까지 몰아가네. 주인아주머니는 우리더러 부디 동요하지 말고 잘 버텨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갖가지 방식의 텃세에도 전혀 무감각하고 요지부동인 질긴 뜨내기들에게 마을 이장님이 이번에 씌운 죄목은 무시무시하게도 간첩죄였다. 괘씸죄치고는 너무 가혹한 처벌이었다. 

 

아침에 찔레 덤불 안에서 뛰쳐나온 경찰은 우릴 감시하는 잠복근무 상태였던 모양이었다. 신고가 들어온 이상, 더군다나 그 죄목도 무시무시한 간첩행위를 묵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술 취한 마을 이장님의 생트집으로 치부했다면 집주인까지 불렀을까, 잠복근무까지 했을까 생각하니 찝찝했다. 차라리 우릴 불러 이장님 눈에 나지 말라 주의를 줬다면 모를까.

 

졸지에 간첩으로 몰리고 보니 우리 행동에도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상황이 몸만 귀농하고 마음은 귀농하지 못한 젊은 것들에 대한 민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다. 아무리 늘 술에 취해 다니는 인물이긴 하지만 마을의 행정수반인 이장님의 적의가 그 정도라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었다.

 

차제에 '간첩 같은 것들'로 오인 받을 만한 요소들을 우리 생활에서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는' 미덕을 단기간에 일방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 내용은 사뭇 조심스럽고 민첩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한밤중에라도 술이 고프면 조용한 시골길에 쌍라이트를 밝히고 질주해 오던 버릇을 자제하고 면사무소 지난 지점을 마을 하마비로 여기고 최대한 저속에 차량 조명을 죽인 상태에서 조용히 들어왔다. 술김에 아무리 감정이 치달아도 '민주주의의 후퇴니' '무능한 정부'니 등등의 불온한 단어를 삼갔고 술자리도 이웃들이 밭 갈러 가는 새벽 전으로 적당히 마무리했다. 물론 야외에 전을 펴고 큰소리로 웃고 떠들던 무모한 행동은 있을 수도 없었다. 

 

남편 친구들은 오면 이웃집 비설거지를 자진해서 거들기도 하고 우리 고추밭에 풀을 뽑는다고 고랑을 다 망쳐놓기도 했다. 나는 이웃집 마실을 부쩍 자주 다니기 시작했고 남편은 험악한 자신의 인상을 보완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착실하게 날마다 수염을 깎았다.

 

"근데 작은 방에 있는 책들은 어떡하지? 어디다 치우기도 그렇고?"

"설마."

"알아? 혹시 집까지 수색하자고 들지. 진짜."

 

남편의 대학시절 가벼운 운동 경력과 그 시절 학습했음 직한 '불온한 서적'들이 새삼 신경 쓰였다. 이장님 정말 웃긴다. 말은 그러면서도 우리는 내심 긴장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웃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고 좋은데 이장님 한 분의 간첩 신고가 자꾸 마을 주민 전체의 눈초리로 확대해석 되면서 뒷덜미가 서늘해져 오는 것이었다.   

 

진짜 결혼한 사람들이 맞는지. 오다가다 만나 대충 살림 차린 사람들 아닌지. 차마 말은 못하고 늘 궁금해 하던 이웃 할머니를 모셔다가 함께 결혼 앨범이랑 결혼식 녹화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 정식 부부임을 확인시켜 드렸다. 당시 유행하던 웨딩포토를 둘 다 싫어해서 집에는 결혼을 입증할 만한 사진 하나 벽에 걸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에겐 자연스러운 것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보자면 한없이 의심투성이일 터. 안으로 숨어들고, 소곤소곤 속삭이고, 선량하게 위장하고. 정작 진짜 간첩 같은 행위들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다행히 우리 집과 가까운 이웃들은 모두 좋으신 분들이셨다. 아무렴 우리를 간첩으로 보고 있진 않는 것 같았다. 다만 이장님의 텃세와 괘씸죄가 좀 과하게 작용했을 뿐이었다. 시골 지서의 요시찰 인물이 아닌, 선량한 이웃 주민으로 거듭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받아들여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일년 반...이장님과 화해도 못하고 끝난 귀농생활

 

마을을 떠나기까지 일 년 반 남짓. 끝내 이장님과는 공식적으로 화해하지 못했지만 이장님에 대한 적의는 추호도 없었다. 이장님의 황당한 간첩 누명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이질적인 귀촌 생활에 대한 반성과 노력 없이 영원한 이방인으로 머물렀을 것이다. 그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살았던 시절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가장 흥미롭고 즐거운 추억거리다. 우리가 한때는 간첩이었다는 오해마저도.

 

죽이고 싶도록 미운 놈. 철 천지 원수진 놈. 지구에서 사라져야 할 놈. 그런 놈들을 간첩이라 누명 씌워 매장시키던 무시무시한 시절은 아니었다. 과거 군사정권과 차별화를 부르짖던 문민정부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진짜 얄미운 놈. 살짝 패주고 싶은 놈. 그런 인간들을 그냥 '간첩 같은 것들'로 매도하는 것으로 분풀이는 가능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의 귀농일기에 관음증적인 흥미를 보이며 기웃거리는 것은 간첩누명까지 써가면서 경험한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간절한 까닭이다. 더욱 옥죄어진 생계에 묶여 거주 이전의 자유가 부자유스러운 딱한 처지고 보니 다른 이들의 시골생활이 더 용기 있어 보이고 부러워진다. 타인의 삶을 보면서 느끼는 대리만족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지금의 내 처지가 그런 것 같다. 그 시절 우리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친구들 또한 그런 호기심과 선망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태그:#귀촌, #이장님 , #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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