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답사기가 많지는 않지만, 몇 해의 시간이 흐르면서 칼럼의 제목도 바뀌어갔다. '내 마음속 그리운 문화유산을 찾아', '돌방의 문화유산 사진기행' 등으로 독자들과의 짧은 만남을 추억한다.

오랜 고심 끝에 돌아온 또 다른 나의 칼럼 제목은 '다시 보는 우리문화유산의 美'이다. 혹자들은 '이름만 짓다 볼일 다보겠다'는 우려도 하겠지만 그동안 사유의 변화와 함께 말하고픈 것들도 그만큼 달라졌음이리라. 요즘 유행하는 글쓰기가 '다시 가는, 다시 쓰는, 다시 찾는' 부류의 것들이지만, 그들 틈에 끼여 덕 보려는 마음은 애당초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나는 지금 우리문화유산을 진실로 다시 보고픈 마음뿐이다.

앞의 칼럼들에서 필자가 시종일관 말하여온 것은 문화유산이 간직한 내면의 아름다움들이었다. 누군가 우리문화유산과 마주대할 때 혼자만이 엿볼 수 있는 이 비밀스러운 즐거움은 대상의 실상이 쉽사리 간파되지 않는 미묘함 가운데 늘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남들에게 증명할 수도, 세상의 잣대로 좋고 나쁨을 가늠하기도 어렵다.

겨울 황차(黃茶)와 검은 곶감
▲ [그림 하나] 겨울 황차(黃茶)와 검은 곶감
ⓒ 남병직

관련사진보기


근래 금강경 강좌에 푹 빠져 지낸다. '무릇 상 지어진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금강경 사구게의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지금껏 목숨처럼 붙들고 살았던 상(相) 하나 내려놓으려한다.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의 길이 나에게는 어떻게 현현할지 자못 궁금할 따름이다. 인연과보에 따라 그들을 무심히 만나고 싶다. 어느새 우리문화유산의 내밀한 아름다움이 가슴 깊은 곳까지 밀려들어 잔잔히 물결 짓는 환희를 꿈꾸어본다.

지리산 실상사의 겨울 소경(小景)
▲ [그림 둘] 지리산 실상사의 겨울 소경(小景)
ⓒ 남병직

관련사진보기


"실상사 초입에 들어서면 문득 마음이 설레옵니다.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퉁방울 두 눈을 부라리며, 커다란 주먹코에, 삐져나온 송곳니, 바람에 하늘거리는 수염의 당신이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림을 알기 때문이지요.

밤낮 절 집의 수문장을 서는 그대와 마주하면 밤손님 따라온 사나운 귀신들도 그만 혼쭐이나 달음질칩니다. 그러나 정작 오금을 저리는 것은 두발이 땅에 달라붙어 도망치지 못하는 당신인 걸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만 가지 험상궂은 인상을 짓고 으르렁거리지만 한껏 겁에 질려 커다랗게 부풀은 눈자위를 보면 핼쑥한 당신의 마음을 헤아릴 것도 같습니다.

오늘밤에도 느닷없는 악의 무리들이 야간 기습을 일삼을 테지요. 두 눈에 한껏 힘을 주고, 그들을 바라보세요. 흔들림 없는 눈빛은 악의 무리를 조복시킨 부처님의 밝은 마음이니까요."

중요민속자료 제15호 남원 실상사 석장승
▲ [그림 셋] 중요민속자료 제15호 남원 실상사 석장승
ⓒ 남병직

관련사진보기


지리산에 위치한 실상사(實相寺)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선종 9산의 하나로 실상산문을 열면서 개창하였다. 당나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홍척은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지었다.

실상사가 호국을 위한 풍수비보의 목적이라면 실상사를 위한 비보는 절 초입에 자리한 3기의 돌장승이다. 장승은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이 장승 역시 경계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뜻에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장승의 몸체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대장군(大將軍),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라는 이름이 새겨져있고, 기단석에 영조 원년(1725)에 세워진 것을 기록하고 있다.

어수룩한 장승들의 빙그레한 웃음을 뒤로하고 멀리 산문으로 길을 잡으면 실상사 천왕문이 이내 앞을 가로 막는다. 흔히 사찰에 들어서면 삼문(三門)을 지나는데, 일주문(一柱門),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이 그것이다.

실상사는 여타의 사찰과는 달리 일주문과 불이문이 없고,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곧바로 진입하는 평지가람의 배치를 따른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으로, 천왕들은 수미산(須彌山)의 동서남북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한다고 한다.

실상사 천왕문 사천왕의 생령좌(生靈座)
▲ [그림 넷] 실상사 천왕문 사천왕의 생령좌(生靈座)
ⓒ 남병직

관련사진보기


일반의 불보살과 천인들은 아름다운 연꽃자리에 앉기가 다반사인데, 실상사 천왕문의 사천왕은 아귀를 밟고 선 생령좌(生靈座)의 모습이다. 사천왕의 육중한 두 다리에 온 몸이 짓밟혀 발버둥치는 아귀는 꽤나 고통스러워 보인다. 양쪽으로 치켜 올라간 눈썹과 막 튀어 나올 법한 두 눈동자, 아래윗니가 드러나 크게 벌려진 입가에서는 고통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메아리친다.

미소와 분노, 중생제도를 위한 부처의 두 모습 중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 삼독(三毒)을 부처의 절대위엄으로 조복코자하는 분노의 신장이 사천왕이다. 천왕문을 들어섬에 흐트러진 마음자리를 다시금 다잡았다.

보물 제35호 실상사석등(實相寺石燈)
▲ [그림 다섯] 보물 제35호 실상사석등(實相寺石燈)
ⓒ 남병직

관련사진보기


절 집 마당 가운데 홀로 우뚝한 실상사 석등과 돌계단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져든다.

"경내는 불빛 한점 없이 깜깜하다. 넓은 뜰 가운데 부스럭 인기척이 일었다. 까까머리의 동자승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불씨하나를 가슴 속에 지니고 대 석등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섰다.

언제부터인가 절 집의 아침을 처음으로 밝히는 이 신성(神聖)의 일은 절집 막내의 몫으로 돌아갔다. 칠흑의 밤바다에 빛나는 신심(信心)을 일으키는 그를 위해 노스님은 석등 앞에 조그만 돌계단을 마련해주었다.

아장아장 계단을 딛고 올라 발끝을 곧추세운다. 품속에서 옮겨진 작은 불씨가 석등에 닿자 중생의 눈과 귀를 가린 암흑의 무지가 아침이슬처럼 일순간 사라졌다. 멀리 잠든 도량을 깨우는 맑은 사물의 쇳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고 치렁거린다. 은은한 불빛아래 몸을 드러낸 대 석등은 부처의 진신(眞身)을 맞이하기 위한 대자연의 변주를 시작한다.

땅을 울리는 범종의 웅혼한 쇳소리가 가라앉는다. 천지간을 요동치는 법고의 휘몰이가 요동친다. 청량한 꽃잎으로 음양의 조화를 삼은 석등의 신체(神體)는 대자연의 변주 가운데 무위(無爲)의 춤을 추는가 싶더니 무여열반(無餘涅槃)의 바다에 진리의 소리로 흩어지다 점점이 사라진다."

실상사 삼층석탑과 대 석등
▲ [그림 여섯] 실상사 삼층석탑과 대 석등
ⓒ 남병직

관련사진보기


실상사 목탑지의 주춧돌들
▲ [그림 일곱] 실상사 목탑지의 주춧돌들
ⓒ 남병직

관련사진보기


잠시 정신을 추스르고 극락전으로 발길을 옮긴다. 극락전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탄 후 순조 31년(1831)에 다시 지었고,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집이다. 건물 안은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뒤쪽 높은 기둥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불단 위에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당그랑 그랑 맑은 쇳소리를 울리며
내를 따라 사하촌(寺下村)으로 간다

어느 날은 소리에 햇빛이 내려
가을 하늘 속보다 더 깊은
심연의 적요(寂寥)에 이른다

오늘도 바람 한 점 없는
절 모서리에서 풍경(風磬)은 소리도 없는
그윽한 소리를 울리며 적멸에 오른다

- 양문규 시 '쇠붕어 물속을 헤엄쳐 간다'

실상사 극락전의 쇠붕어
▲ [그림 여덟] 실상사 극락전의 쇠붕어
ⓒ 남병직

관련사진보기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실상사 서방극락의 길목에, 쇠붕어 한 마리가 바람을 가르고 유유히 날아간다. 하늘로부터 길게 내려온 외줄기 동아줄에 간신히 몸을 동여맨 당신은 인연과보의 무심한 바람을 따라 무유정법의 바다로 침잠하는가!

절집에 으레 풍경하나 있기는 마련이지만 하필 극락전 작은 쪽문에 물고기를 메어단 연유는 무엇일까? 이 쪽문 너머 저곳이 니르바나의 세계인 까닭일 게다. 눈 밝은 선승이 있어 극락전의 작은 문을 드나듦에 아상(我想)을 버리는 하심(下心)의 경책으로 삼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리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청량한 기운이 극락전 작은 뜰에 한 줄기 바람을 일으킨다. 처마 끝 대롱대롱 몸을 의지한 애처로운 미물들은 오후의 단잠에서 잠시 깨어난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절 집 물고기 삼년에 배운 것은 눈 뜨고 잠자는 재주밖에 없다. 잠자는 가운데도 늘 깨어있으라 귓전을 울리는 부처님 말씀이 나긋나긋하다. 가슴에 다짐을 하고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올린다.

바람이 분다. 가는 곳을 모르는 인연의 바람이 불어온다. 길이 있되 정해진 길이 없는 제법의 공한 도리를 깨친 그대여, 지나는 바람에 한바탕 신나게 헤엄치며 놀 뿐이다.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의 그리운 사천왕상
▲ [그림 아홉]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의 그리운 사천왕상
ⓒ 남병직

관련사진보기



태그:#남원실상사, #우리문화유산의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구경북지역 대학생문학연합(효가대 난문학회) 동인/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문화지킴이간사/ 국립문화재연구소 복원기술연구실 연구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